진·도에는 나룻배와 참선(站船) 등을 배치하여 통행인의 내왕과 조운(漕運)의 편의를 도모하였고, 또한 도성출입자에 대한 감시와 죄인의 규찰 등을 담당한 중요한 교통로의 하나였다.
특히, 한강변에는 중랑교(中浪橋)·전관교(箭串橋)·광나루[廣津]·삼전도(三田渡)·흑석진(黑石津)·동작도(銅雀渡)·한강도(漢江渡)·노량진(露梁津), 마포(麻浦)·서강(西江)·공암진(孔巖津)·임진도(臨津渡) 등의 진·도가 설치되어 행인의 출입상황과 강수(江水)의 깊이를 측량하고, 때로는 한강에서 통진(通津)의 강가에 사는 양인 및 공사천으로서 생선간(生鮮干)으로 삼아 내선(內膳)을 위한 생선을 잡아 바치도록 하였다.
유래는 국초의 진도별감(津渡別監)을 1415년(태종 15) 종9품의 도승으로 개정한 데서 비롯된 것이며, 조선 후기 별장이라 하여 병조에서 관할하였다. 조선 초기는 이조에서 양반 자제들로 임명하였으며, 특히 삼전도와 같은 곳은 국왕의 왕릉참배로 인하여 사무가 많아 사리에 밝은 사족으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내왕인의 규찰과 죄인의 압송, 진도선(津渡船)의 관리, 내선용 생선의 진상, 강수측량 등의 임무를 맡았으며, 만약 선주(船主)나 진부(津夫) 등이 잘못하거나, 짐을 실은 배들이 치패(致敗)된 경우 즉시 달려가서 구해야 하였는데, 그렇지 않은 경우 치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