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역(驛)과 함께 사용되었는데, 이는 역과 관련을 가지고 설치되었기 때문이다.
원이 언제부터 설치 · 운영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 시대부터 우역(郵驛)을 설치하고, 사신의 왕래처에 관(館)을 두었던 점으로 보아 이 때부터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고대 국가 형성시기인 삼국 시대 지배 체제가 확립됨에 따라 지방 통치를 강화하고, 외교적으로 유교 사상, 즉 주례(周禮)를 인용한 빈객의 접대, 그리고 불교의 사회 복지 및 포교 활동 등에서 원이 설치된 사상적 기반을 찾을 수 있다.
조선시대에 1,310개소의 원이 설치된 곳은 서울에서 개성부 · 죽산 · 직산 · 포천에 이르는 길은 대로(大路), 서울에서 양근, 죽산에서 상주, 진천에서 성주, 직산에서 전주, 개성부에서 중화, 포천에서 회양에 이르는 길은 중로(中路), 나머지는 소로(小路)의 역 · 관과 인접한 지역이었다.
해당 지역에는 원우(院宇)를 짓고 서울 지역은 5부, 지방은 수령이 부근의 주민 가운데 승려 · 향리 · 관리를, 대로는 5호, 중로는 3호, 소로는 2호를 원주(院主)로 임명했으며, 이들에게 잡역을 면제해 주는 대신 원 운영의 책임을 맡겼다.
또한, 원의 운영 경비로 충당하기 위해 대로는 1결 35부(負), 중로는 90부, 소로는 45부의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했으며, 한성부와 관찰사가 이를 감독하였다.
원은 교통 사정이 원활하지 못한 당시에 여행자를 도둑이나 맹수로부터 보호하고, 사신 접대와 숙식을 제공했으며, 지방에서 기로연(耆老宴 : 나이가 많은 정2품 이상의 문신을 예우하기 위해 베푼 연회) 실시와 진제장(賑濟場)을 두어 굶는 사람들을 구제하는 구실도 아울러 하였다.
또 공공의 임무를 띤 여행자뿐만 아니라 때때로 일반 행인에게도 휴식 및 투숙처로 제공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원이 여행자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백성을 위무하는 하나의 방편으로 삼고 이의 운영에 관한 대책을 자주 논의하였다.
원은 사용자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점차 쇠락했고, 공용 여객의 숙식을 고을이나 역에서 담당하는 사례가 많았으며, 특히 임진왜란을 겪고 난 조선 후기에는 그 폐해가 많아 주막 또는 주점으로 변천하였다.
또한, 참(站)에는 참점(站店)을 설치함으로써 원은 그 모습을 감추고 지명만 전하게 되었으니,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등이 그것이다. 조선 시대 원의 조직은 ≪동국여지승람≫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