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은 273책으로 된 필사본이다. 원본은 1년에 한 권씩 작성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사건이 많을 때는 2권 또는 3권으로 나누어 작성하였다. 비변사가 설치된 1510년(중종 5)에서 1555년(명종 10)까지 45년 동안 임시 기구로 존재할 당시의 등록 작성 여부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최소한 1555년(명종 10)에 국가 상설기구로 확정된 때부터는 등록이 작성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임진왜란 이후 이 책은 다른 기록과 함께 모두 소실되었기 때문에 왜란 후 1616년(광해군 8)까지, 즉 전후 합계 62년 간의 등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617년(광해군 9)부터 1892년(고종 29)까지 276년 간의 등록 273책만이 현재 남아 있다. 1865년(고종 2)에 비변사가 의정부에 흡수된 이후에는 의정부 안에 비변사와 같은 조직을 두고 기록을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1862년(철종 13)부터 1892년까지의 기록은 이전의 『비변사등록』과 같은 체재로 작성되었다. 1865년(고종 2) 이후의 기록은 원본 표지에 ‘의정부 상(議政府上)’ 또는 ‘정부 상(政府上)’이라 쓰여있다. 그래서 '의정부 등록(議政府謄錄)'이라는 명칭이 적합하겠지만, 그 체재가 철종 이전의 것과 일치하기 때문에 이것도 『비변사등록』 속에 포함시킨다. 따라서 『비변사등록』은 1617년부터 1892년까지의 총 276년 분이 남아 있어야 하지만, 중간에 없어진 부분이 많다. 276년 중 54년 간의 등록이 없어졌다.
비변사는 설치 당시, 변방의 군무에 대비한다는 목적으로 국방 문제에 치중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확대, 강화되어 국방·외교 및 국정 전반에 관한 문제를 결정하는 최고의 국정 의결기관으로 변하였다. 그에 따라 『비변사등록』도 국정 전반에 관한 기본적 기사가 수록되었다. 그래서 『비변사등록』은 비변사에서 회의가 있을 때마다 낭청(郎廳, 郎官)이 입회해서 매일 매일의 회의 상황과 그 의결 상황을 직접 기록하였다. 때문에 원본은 단 한 질뿐이며, 낭청이 직접 붓으로 쓴 필사본이다. 한 질뿐인 원본은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에 있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1959년부터 1960년에 걸쳐 해서(楷書)로 옮겨 쓴 뒤, 구두점을 찍어 영인본 28책으로 출판하였다.
『비변사등록』은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및 『일성록(日省錄)』과 함께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1차 사료가 된다. 특히 실록을 편찬할 때 『비변사등록』을 기본 자료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 사료적 가치는 『조선왕조실록』보다도 더 높게 평가된다. 또한, 이 책에는 제도어염수세정수절목(諸道魚鹽收稅定數節目)·호조주전절목(戶曹鑄錢節目)·공장응행절목(工匠應行節目) 등 사회·경제 문제와 관계 있는 사목(事目)·절목(節目)·별단(別單) 등이 무려 250여 종이나 수록되었다. 따라서 조선 후기 사회·경제 연구에 귀중한 사료로도 인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