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연성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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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로군정서 사관연성소 입구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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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독립군 정예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북간도에 세운 한인 사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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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20년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서 독립군 정예 사관을 양성하기 위해 북간도에 세운 한인 사관학교.
내용

1920년 10월에 벌어진 청산리대첩에 참가한 정예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북로군정서 독립군 편성과 훈련책임을 맡은 김좌진(金佐鎭)이 주도, 북로군정서 근거지가 있던 왕청현(汪淸縣) 서대파(西大坡) 십리평(十里坪)에서 약 30리 정도 떨어진 삼림지대에 8동의 병영을 건축, 설립하였다.

이후 북로군정서에서는 간도 일대에서 한인 장정들을 모집하여 독립군을 편성함과 동시에, 18∼30세 사이의 청년들을 사관생도로 선발, 정예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교육과정은 6개월로 단기 속성과였고, 교수과목은 정신교육·역사·군사학·술과(術科)·체조 및 호령법 등으로, 전투훈련·총검술·군사학·축성교범(築城敎範)·육군형법·군대내무서(軍隊內務書)·야외요무령(野外要務令) 등의 교재를 인쇄하여 가르쳤다.

군사교관은 신흥 학우단(新興學友團)에 의뢰, 교관 이범석(李範奭)과 신흥무관학교 졸업생 김춘식(金春植, 이명 金勳)·오상세(吳祥世)·박영희(朴寧熙)·백종렬(白鍾烈)·강화린(姜華麟)·최해(崔海)·이운강(李雲岡) 등을 초빙하였다.

군사훈련은 구한국군대식 방법을 기본으로 하고, 1정보 크기의 연병장 2개를 만들어 매일 실시하였다. 술과시간에는 일본군 모형을 만들어 놓고 사격연습을 하였다.

1920년 6월 당시 이미 기초훈련을 끝낸 군인이 약 600명이었고, 회색 군복에 상등병 견장을 달고 훈련중인 생도가 약 300명이었다.

1920년 9월 9일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였다. 일제의 압력으로 중국군이 출동, 공격해 오자 북로군정서는 서대파의 근거지를 버리고 1920년 9월 17, 18일 장정에 올랐다. 자연히 사관연성소도 폐지되고 말았다.

이 때 졸업생 200여 명이 중심이 되어 교성대(敎成隊)가 편성되었는데, 나중소(羅仲昭)를 대장으로 하는 이 별동부대는 화룡현(和龍縣) 삼도구(三道溝) 청산리(靑山里) 방면의 선발대로, 청산리대첩에 참여한 독립군 주력부대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참고문헌

『獨立新聞』(上海版, 1921 .2. 25.)
『독립군의 전투』(민족문화협회, 1980)
『한국민족독립운동사연구』(신용하, 을유문화사, 1985)
『독립군사』(윤병석, 지식산업사, 1990)
『現代史資料』 27(姜德相 編, みすず書房,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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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자
윤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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