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당 설화」는 임진왜란 때 승병장으로 활약한 사명당 유정에 관한 설화이다. 사명당이 출가하게 된 내력을 다룬 후처 응징 설화 유형, 사명당이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펼쳤던 활약들을 다룬 유형, 사명당이 스승 및 관료와 재주를 겨루는 유형, 사명당의 신이한 면모를 드러낸 유형 등이 있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민족적 적개심과 자존심을 반영하고 있으며, 오늘날에도 문헌 설화 및 구비 설화로 전승되고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장(僧兵長)으로 활약한 사명당(四溟堂) 유정(惟政)에 관한 이야기이다.
사명당에 관한 설화는 여러 가지가 있는데, 내용에 따라 그가 출가(出家)한 내력을 말하는 후처 응징(膺懲) 설화 유형, 임진왜란 후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가서 펼쳤던 활약들을 다룬 유형 등으로 나눌 수 있다.
후처 응징 설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명당은 속성(俗姓)이 임(任)이고 전처소생(前妻所生)의 아들과 후처소생(後妻所生)의 아들을 두었다. 전처의 아들이 장가간 첫날밤에 어느 자객에 의해 목이 잘리자, 죽은 전처의 아들과 결혼한 신부가 신랑 살인 혐의를 받게 되었다. 신부는 누명을 벗고자 남장을 하고 집을 떠나서 범인 색출(索出)에 전념(專念)하였다. 그러다가 신랑의 계모(繼母)가 하인을 사주하여 저지른 일임을 밝혀내고 이를 시아버지인 사명당에게 알린다. 사명당은 벽장에 숨겨 둔 항아리 속에서 아들의 머리를 찾아내고, 후처와 그의 아들을 모두 묶어 집과 함께 불태운 뒤 재산을 노복(奴僕)에게 나누어 주고 집을 떠난다.
이 설화는 「사명당전」에 수록(收錄)되어 있으며, 전주, 안동, 밀양 등 여러 지역에서 구비 설화(口碑說話)로도 다수 채록(採錄)되었다. 한편 구비 설화에서는 사명당이 출가한 또 다른 원인이 전승(傳承)되기도 한다. 그 내용은 소년 사명당을 사모(思慕)하는 여러 여인 중 한 여인이 살해당하자, 사명당이 속세(俗世)를 버리고 출가했으며, 세 명의 여인도 불가(佛家)에 출가했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사신으로 간 사명당의 활약상을 담은 유형이다. 이 유형은 주로 「임진록」에 집결되어 있는데, 구비 설화로도 채록된 것이 많다. 사명당의 활약상 역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는데, 그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사명당이 일본에 사신으로 갔을 때, 왜왕(倭王)이 왜국(倭國)의 시를 병풍에 적어 지나가는 길에 진열해 놓고 자국의 문물(文物)이 번성함을 자랑했다. 이에 사명당은 그 병풍의 시를 모두 암송(暗誦)했고, 병풍의 시가 모작(模作)이라고 했다. 왜왕은 사명당을 무쇠로 만든 방에 묵게 하고, 숯불을 피워 무쇠방을 달구어 사명당을 태워서 죽이려 하였다. 그러나 사명당은 ‘빙(氷)’ 자를 천장에 써 붙여 도술(道術)을 부렸고, 왜왕이 방문을 열었을 때 사명당의 수염과 눈썹에 고드름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사명당은 왜 이렇게 방이 춥냐고 호통을 쳤다. 왜왕은 또 다시 사명당을 죽이고자, 숯불로 무쇠 말을 벌겋게 달군 후 사명당에게 올라타 보라고 요구했다. 그러자 사명당이 비를 내려 불에 달구어진 무쇠 말을 식혔다. 그리고 비를 계속 내려 왜국을 물에 잠기게 했다. 마침내 왜왕은 항복했고, 사명당은 항복을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왜왕에게 매년 사람의 가죽 300장과 고환 서 말씩을 조선에 조공(朝貢)하도록 명했다.
한편 『지봉유설(芝峰類說)』, 『청야만집(靑野謾輯)』 등의 문헌에 사명당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의 일화가 있는데, 내용은 아래와 같다.
사명당이 왜장(倭將) 가토 기요마사의 진영(陣營)에 들어갔을 때, 길에는 수 리에 걸쳐 기치창검(旗幟槍劍)이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사명당은 이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가토 기요마사는 사명당에게 조선에 보물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사명당은 가토 기요마사에게 “그대의 머리가 오직 보물”이라고 했다. 가토 기요마사가 그 이유를 묻자, 사명당은 “그대의 머리에 천금 만호(千金萬戶)의 상이 걸려 있으니 어찌 보물이 아니겠느냐”라고 했다.
이 밖에도 사명당이 스승이나 관료(官僚)와 우월(優越)을 겨루는 유형의 이야기들이 있다. 사명당이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西山大師)와 누가 더 재주와 능력이 뛰어난지를 시합하자, 서산대사의 재주와 능력이 더 뛰어났다고 한다. 하지만 이산해(李山海)가 사명당을 얕잡아 보고 시구(詩句)로 공격했을 때, 사명당은 즉석에서 이를 받아쳐서 이산해에게 망신을 준다. 이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않은 인물을 조명하거나 지배층(支配層)을 비판한 이야기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사명당의 신이한 행적을 드러낸 유형의 이야기들이다. 먼저 사명당이 꽂아 놓은 지팡이라는 수목 설화가 있다. 사명당은 지팡이를 꽂아 놓고 사라지면서, 이 나무가 살아 있으면 사명당 자신도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아직도 그 나무가 살아 있다고 한다. 또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에 있는 사명당영당비(四溟堂影堂碑)는 국가에 큰일이 있을 때마다 땀을 몇 말씩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명당 설화」는 구국(救國) 도술 설화로서 널리 전승되고 있다. 임진왜란 시에 형성된 왜적에 대한 민족적 적개심(敵愾心)을 반영하면서, 전쟁으로 상처 받은 민족적 자존심의 회복에 대한 열망을 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