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한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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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빙(藏氷)할 때와 개빙(開氷)할 때 사한신(司寒神)에게 행하던 국가의례. 제사.
이칭
이칭
기한제(祈寒祭), 동빙제(凍氷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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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장빙(藏氷)할 때와 개빙(開氷)할 때 사한신(司寒神)에게 행하던 국가의례. 제사.
내용

‘기한제(祈寒祭)’ 또는 ‘동빙제(凍氷祭)’라고도 한다.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지속된 국가의식이며, 소사(小祀)로 행하였다.

주로 음력 12월 얼음을 떠서 빙고(氷庫)에 넣을 때 장빙제를 지냈고, 춘분 또는 음력 2월 빙고문을 열 때 개빙제를 지냈다. 저장된 얼음은 궁중제사와 연수(宴需)·피서 등에 쓰였다. ‘사한’은 추위를 관장하는 북방신의 이름으로 현명씨(玄冥氏)라 한다. 채빙(採氷)해야 될 시기에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으면 이재(異灾)라고 하여 사한단을 설치하고 날씨가 추워지기를 기원하였다.

사한제의 기원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으로 『춘추좌씨전』 소공(昭公) 4년조에 의하면, 검은 소와 검은 기장(농작물)으로 사한신에게 제사 지낸 기록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문헌기록은 고려시대에 비로소 나타난다.

『고려사』 지(志) 권17 예(禮) 5 길례(吉禮) 소사조(小祀條)에 의하면, 사한은 맹동(孟冬 : 음력 10월)과 입춘에 얼음을 저장할 때와 춘분에 얼음을 낼 때 제사 지내는데, 신위(神位)는 단상(壇上)의 북방에서 남향으로 설치하고 왕골자리를 깐다고 하였다.

축판(祝板 : 축문판의 준말)에는, “고려 국왕이 삼가 모관(某官) 모(某: 성명)를 보내어 공경스럽게 제사한다.”라고 하였으며, 생뢰(牲牢: 제사에 바치는 희생)로는 돼지 한 마리를 썼다.

제의는 제사 3일 전에 모든 향관(享官: 제관)이 산재(散齋 : 제사 전에 목욕재개 하는 일)를 2일간 하였다. 곧, 하루는 정침(正寢)에서 하고, 하루는 본사(本司)에서 하는데, 본사가 없을 때는 상서성(尙書省)에서 숙박하고, 치제(致祭)는 하루 동안 향소(享所)에서 하였다. 치제일에 상림령(上林令)은 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을 빙실(氷室) 안 오른쪽에 마련해놓고 제사가 끝난 뒤에도 그대로 두었다. 이는 화살을 쏘아 재앙을 없애기 위한 의식행위이다. 상림령 이하 제관은 삼헌을 하고 재배를 하며, 제사가 끝난 뒤 축판은 재소(齋所)에서 태웠다.

한편, 1036년(정종 2) 4월과 6월조에 보면 얼음을 진상하는 시기를 입하절(立夏節)로 정하였고, 반빙(頒氷: 나라에서 여름철에 관리에게 얼음을 나눠주던 일)하는 시기는 6월부터 입추까지로 하였으며, 그 대상은 문하시중 등 17인에 한하여 10일마다 한 번씩 하사하였다. 그리고 1297년(충렬왕 23) 6월 사람들이 모두 장빙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는 부분이 있어 한때 장빙법이 실시된 사실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3년(태종 3) 정월조에 사한제의 축사(祝史)를 임명하지 않은 일에 대하여 의정부의 이방녹사(吏房錄事)가 탄핵을 당하고, 이를 사헌의 과실이라 하여 왕이 사헌부에게 출사(出仕: 관아에 출근)하도록 명한 일이 있고, 또 1413년 4월 고려의 예(禮)를 따라 제사의 규모를 소사(小祀)로 정한 기록이 있다.

1424년(세종 6) 12월에도 기한제를 행하였고, 1448년 11월조에는 사한제가 12월 월령(月令)에 있는데 장빙은 매양 11월에 있음을 지적하고, 기후가 일정하지 않음을 고려하여 장빙의 시기를 당해서 택일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택일은 서운관(書雲觀)에서 하였고 산재와 치사(治事)는 고려시대와 같았다.

1476년 (성종 7)과 1486년 12월에도 겨울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이 얼지 않으므로 홍문관에 명하여 옛 법대로 기한제를 행한 바 있으며, 1499년(연산군 5)에도 기한제를 행한 뒤 추위가 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511년(중종 6) 11월 추위와 더위가 절후를 잃어서 일기가 봄과 같으므로 대사헌 윤금손(尹金孫)이 북경(北京)에 갔을 때 중국 황제가 겨울에 눈이 오지 않는 것을 변고로 삼아 기설(祈雪)을 친행한 사실을 아뢰자, 중종은 임금이 하늘을 받들어 때를 받는 도(道)가 마땅히 이와 같아야 된다고 하며 기한·기설의 예를 설행하도록 하였다.

1551년(명종 6)과 1566년 12월에도 장빙을 위하여 기설·기한제를 옛 제도에 따라 실시하였다. 그 뒤 1767년(영조 43) 개빙제 때 교서(敎書)하여 이르기를 현명씨는 우사(雩祀) 가운데 제5위에 있는데, 우단(雩壇 : 기우단)에는 압(押: 화압의 준말: 수결과 함자)을 쓰고, 개빙제에는 압을 쓰지 않는 점을 들면서, 같은 신인데 그 제도를 달리한 것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하였다.

또한, 사한제 축문의 현명(玄冥) 밑에 씨자(氏字)를 첨서(添書)하도록 명하여 그 뒤 이것이 정식으로 되었다. 또, 1709년 12월 겨울이 따뜻해서 얼음이 얼지 않아 사한제관으로 유신(儒臣)을 차출해서 보내고, 임금도 삼경에 자정전(資政殿)에 나와 땅에 자리를 깔고 부복하여 기한하였는데, 강물이 얼어붙자 제관에게 상을 내린 일도 있다. 그 뒤 사한제는 1908년(순종 2) 〈칙령〉에 의하여 철폐되었다.

제의는 그 시기가 음력 12월이므로 기설제와 병행하여 실시하기도 하였으며, 기설제와 마찬가지로 3차까지 설행(設行)하였다. 초차(初次)에는 종묘·사직·북교(北郊)에 정2품관을 보내고, 재차(再次)에는 풍운(風雲)·뇌우(雷雨)·산천·우사에 정2품관을 보내고, 3차에는 삼각산·목멱산(木覓山)·한강 등에 근시관(近侍官)을 보내서 수시로 치제하게 하였다.

제관 헌관은 3품 이상으로 정하였고, 전사관(典祀官)은 봉상시(奉常寺) 주부(主簿) 이하의 관원으로 삼았다. 사한단은 남교(南郊) 빙실의 북쪽에 있는데 그 제도는 영성(靈星)과 같으며, 현명씨를 제향하는 신좌(神座)는 북쪽에서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였다. 동빙고와 서빙고는 얼음을 저장하기 위한 빙실로 조선 국초에 설치되었다.

동빙고는 남교 두모포(豆毛浦: 지금의 성동구 옥수동)에 있었는데 연산군 때 둔지산(屯智山) 밑으로 옮겼고, 서빙고는 둔지산 산록(지금의 용산구 서빙고동)에 있었다. 동빙고에 저장된 얼음은 나라의 제향에 사용되었고, 서빙고의 얼음은 궁중의 각 전(殿)과 관아백관들에게 공급되었다. 반빙시기는 음력 3월부터 9월 상강까지였으며 그 대상에 따라 반빙시기와 기간, 공급하는 수가 각각 다르게 취급되었다.

사한제는 기우제·기설제·기청제와 같이 풍년 농사를 위한 농경의례적인 면보다는 나라의 제향과 잔치, 그리고 여름의 더위를 식히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는 얼음을 잘 얼게 하기 위한 제의인 동시에, 한편 자연의 이변을 없애기 위한 간절한 바람에서 발생한 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춘관통고(春官通考)』
『서울육백년사』-문화사적편-(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87)
『서울시육백년사』2(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8)
집필자
김선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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