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

산업
개념
인간이 살아가는 데 유용한 여러 가지 물자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체계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내용 요약

산업은 인간이 살아가는 데 유용한 여러 가지 물자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체계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이다. 토기 생산을 기점으로 시작되어 철기와 청동기의 등장으로 본격화했다. 우리나라의 산업은 수공업과 상업이 농업의 보조적인 위치에 있던 전산업 단계, 17세기 이후 상업과 수공업이 상당히 발전하는 이행기 단계, 19세기 말 이후 근대산업 단계, 광복 후 현대산업 단계로 구분된다. 60년대 1차산업 중심 구조에서 90년대 중반에 3차산업의 비중이 53.3%인 산업구조로 바뀌고 경제개방화와 민간자율화에 맞는 산업정책이 추진되고 있다.

정의
인간이 살아가는 데 유용한 여러 가지 물자나 용역을 만들어내는 체계적인 행위를 가리키는 경제용어.
개설

인간이 이러한 체계적인 행위를 하기 시작한 역사는 오래이다.

우리 나라의 경우에도 그런 행위가 시작된 시기는 멀리 50만∼60만 년 전으로 소급된다. 그러나 돌을 다루어 도구나 생활자료로 쓰고 있던 신석기시대 중기에 이르기까지는, 아직 체계가 잡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목적도 단순했다.

그 당시에는 성원 개개인 또는 그들의 집단생활에 유용한 것을 만들어 쓸 뿐, 우발적인 교환을 제외하고는 개인 또는 집단끼리 생산물을 서로 교환하여 더욱 유용하게 사용할 줄을 몰랐다. 이렇게 체계가 잡히지 않은 행위를 산업이라 일컬을 수는 없다.

한편 신석기시대 말기에 해당하는 기원전 5000년경부터는 우리 나라에서도 토기를 구워 쓰게 된다. 토기를 만드는 도구로서 아직 물레를 사용했던 것은 아니지만, 토기를 짓고 굽는 일은 높은 수준으로까지 발전된다.

하지만 그 일은 상당한 기술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소수의 토기장(土器匠)만이 해낼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수렵·어로 또는 초기농업에 정착하고 있던 많은 성원 또는 집단은 당시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유용했던 토기를 소유하고자 원했고, 결국 그들은 스스로 쓰다 남은 물자를 서로 교환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초기교환이 이루어짐에 따라서 생활과 생산양식은 엄청나게 진전되기 시작한다. 높은 열을 이용하여 토기를 전문적으로 굽고 있던 토기장의 기술적 수준은 더욱 체계적으로 높아질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사회에서는 일찍이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이 전개되기 시작한다. 기원전 1000년경부터 구리와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놋쇠)가 등장하고, 기원전 600년경부터 철기시대가 전개되었다.

청동기나 철기의 생산력이 굳건한 터전을 잡게 된 기원전 500∼400년부터 우리 나라에서도 계급사회의 제1단계인 고대적인 사회가 성립되었으며, 이즈음부터 고대와 중세를 포괄한 전근대적인 산업이 발전한다.

여기서는 우리 나라의 산업을 서술의 편의상 크게 전산업, 이행기(移行期)의 산업, 근대의 산업, 광복 후의 현대산업 등 4단계로 구분하려 한다.

전산업사회와 이행기에 있어서의 산업에 대해서는 농업이 중심적인 산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주로 상업과 수공업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산업인 농업을 바탕으로 한 수공업과 상업은 민족문화 발전에 지렛대와 같은 역할을 담당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대산업에 대해서는 우리 나라가 산업사회로 진입한 1962년까지의 여러 계기와 과정을 약술한 다음 현대의 고도화한 산업에 접속시킬 것이다.

전산업사회(서기전4∼16세기)의 산업

전산업사회란 우리 민족이 놋쇠와 쇠그릇을 일반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고조선 말기부터 고구려·백제·신라 등에 이르는 고대사회, 그리고 중세사회인 통일신라·고려 및 조선 전기인 16세기까지를 포괄하는 기간이다. 이처럼 2,000여 년에 걸친 오랜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산업은 나름대로 끊임없는 변천과 발전을 거듭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는 모든 산업이 개인과 집단의 자가수요를 위한 자급자족적인 행위의 단계를 넘어서지 못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각기 선천적인 자질과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여러 가지 상이한 직업에 종사하려는 본능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으므로, 우발적 또는 필연적으로 여러 가지 직업으로 분화되게 마련이다.

특별한 사회적 제재가 작용하지 않는 한, 사람들은 척박한 토지를 경작하느니보다 산짐승을 잡거나 수공업 또는 장사를 하는 편이 훨씬 더 유리하다고 확신하며, 따라서 그들은 수렵·수공업 또는 상업에 전념하려는 본능적 충동을 받게 된다.

이러한 충동은 우리 나라의 전산업사회에 있어서도 유형적으로 나타났다. 많은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수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점차 늘어났다.

수공업부문

이 시기의 대표적인 수공업은 석가공, 길쌈, 토기, 놋쇠·쇠·금은 세공 등 제조가공업이었다.

① 길쌈:일반적으로는 우리 나라에서 식물이나 동물에서 얻은 원자재를 가공하여 피륙을 짜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000년 전후로 추산되고 있지만, 기록상으로는 기원전 3∼1세기에 처음으로 나타난다.

적어도 4∼5세기에 이르면, 최근까지의 길쌈방법과 유사한 방식으로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산업사회 시기 우리 나라의 직물수공업은 다음 두 가지 특징을 지닌다.

하나는 그것이 선천적으로 솜씨가 뛰어난 부녀자에 의해서 부업의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적 조건이 뽕나무나 삼 또는 목화를 재배하기에 알맞은 데다 민족성이 섬세하고 근면하여 필요한 원료를 생산할 수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생산물 중에서 고급품은 주로 왕실이나 관가에 수납되었고, 직접생산자는 자가수요에 충당한 나머지를 상품으로 교환하기도 한다. 또 그것은 실물화폐로도 썼으므로 길쌈의 민족사적 의의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고려 말기는 목화씨가 들어옴에 따라서 조선 전기 이래 무명과 솜옷·솜이불이 일반백성에게 보급되어 의생활에 혁명적인 변혁이 일어났다. 폭신하고 따뜻하며, 우아하고 질긴 데다 눈처럼 하얀 빛깔이 민족적인 기호에 꼭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② 놋쇠·쇠제품 수공업:석가공과 금은세공을 포함한 놋쇠와 쇠점의 수공업은 이 기간에 높은 수준으로 발달하였다. 놋쇠와 쇠문화는 신석기시대의 여러 가지 사회경제적 토대 위에서 구현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유형의 수공업은 기원전 6∼5세기부터 이루어지기 시작하여 통일신라기에 꽃을 피웠고, 고려기에 승계되었다가 조선 전기에는 도리어 쇠퇴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에 대한 물적 증거로서 다음 네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 당시의 무덤이나 주거지에서 발굴된 출토품들이다. 이를테면, 기원전 4∼3세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입증된 대전광역시 서구 괴정동의 돌무덤이라든지, 같은 시기의 충청남도 아산군 신창리 돌무덤, 그리고 평양시 금탄리와 평안북도 용천군 신암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많은 놋쇠붙이가 있다. 거기에서는 특히 수많은 토기와 얼마간의 석기도 출토되었다.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걸쳐 형성된 신라의 금관총과 천마총에서는 금은 귀금속 장신구, 놋쇠붙이 쇠붙이 외에 커다란 쇠솥과 쇳덩어리[鐵錠]가 대량으로 나왔다. 전자에서는 1,200㎏, 후자에서는 521㎏이나 출토되었다.

둘째, 절간이나 그 주변에서 보관 또는 발굴된 놋쇠 불상·범종·향로 등 불교용구이다. 높이 3.33m, 입지름 2.27m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은 그 대표작의 하나로서, 771년(혜공왕 7) 온 나라의 힘을 함께 기울여 놋쇠 12만 근으로 부질(주조)한 것이다.

셋째, 당시에 이루어진 쇠부질·놋쇠부질을 하던 쇠점·놋쇠점터의 유적지 및 그와 관련된 유물이다. 경상남도 울주군 달천리와 평안북도 개천군 일대에는 쇠둑부리(용광로)터와 무쇠부질(주조로)터가 흩어져 있고 지금까지도 쇠를 곤 찌꺼기인 쇠똥이 발견된다.

넷째, 가장 뚜렷한 것은 기록자료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변진조(魏志東夷傳弁辰條)에 “나라에서 쇠가 났다.”는 내용이 있다. 삼한시대에 이미 토철이나 철광석을 파다가 쇠둑부리에서 무쇠부질을 하였음이 명백하다.

그처럼 높은 수준의 기술과 열처리를 필요로 하는 수공업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논자에 따라서는 통일신라에는 유철전(鍮鐵典)·마전(麻典)·와기전(瓦器典) 등 관료조직이 있었고, 고려시대에는 그 조직을 승계한 장야서(掌冶署)·중상서(中尙署) 등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그것을 승계하여 중앙과 지방관아에는 궁정(宮廷) 또는 관영수공업이 경영되었다고 하지만, 몇몇 특수부문을 제외하고는 실증적 자료가 희박하다.

오히려 통일신라시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의 그러한 수공업은 해당분야의 수공업을 전업적으로 경영한 금소·은소·동소·철소라고 불리는 소(所)에서 소리(所吏)의 책임과 지휘감독 아래 전문적으로 생산되었던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강하다.

③ 질그릇:가야를 포함한 삼국시대의 토기수공업은 고도로 발전하였다. 금·은·귀금속이라든지 놋쇠나 쇠제품은 원자재가 희소한 것이어서 주로 왕실이나 귀족의 전유물이었고, 토기는 비록 투박한 것이지만 일반백성도 대량으로 이용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일반백성이 묻힌 조그마한 무덤에서도 많은 토기가 출토되고 있음을 통해 확인할 수가 있다.

물레를 사용하거나 가마에 싸재어서 굽는 등 한층 높은 수준의 생산방법으로 토기를 지어내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 말기인 기원전 10세기 전후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온도가 얕은 불에 구운 토기에 잿물을 칠하여 자기그릇을 굽는 기술은 토기생산기술에서 쉽사리 이어진다. 통일신라 말기에는 자기가 생산되기 시작하였고, 10세기 전후에는 그 기법이 한걸음 진전하였으며, 12세기에는 청자의 생산기법이 절정에 달한다.

토기와 청자를 굽던 점터는 전국 각지에서 발견되고 있지만, 가장 규모가 크고 전형적으로 청자를 굽던 곳은 전라남도 강진군 대구면에 있는 대구자기소(大口磁器所)이다. 여기에서 발견된 많은 자기조각을 모아 살핀 결과에 따르면, 우리 나라의 가을하늘처럼 푸르른 비색을 띠고 날렵하게 구워진 조각은 1,000개 중 한두개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회청색·회색 또는 갈색을 띠고 있으며 모양도 투박하다.

전자는 절예품(絶藝品)으로서 왕실이나 관가에 공물로 강제로 수납되었다. 그중 일부가 국왕이나 귀족들의 무덤에 부장되었다가 도굴되거나 발굴되어 오늘에 전해진다. 이들 중 상감청자의 성가는 가장 높다.

자료에 따르면, 12세기부터 수납은 더욱 강제되어 소민들이 이산하기 시작한다. 고려 말기에 이르러 유교의 신흥사대부들은 소민들을 신분이 천한 노예로 박대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수납을 더욱 강요하였고, 결국 조선 초기에 이르러서는 모든 소가 사라지고 만다.

각각의 소에 소속되어 있던 장인들 중 일부는 사대부집의 노비로 들어가고 다른 일부는 각 지방으로 흩어진다. 이에 따라서 고려말기부터 그 기법이 퇴락하기 시작했던 청자는 조선 초기에 이르러 완전히 자취를 감춘다. 대신, 조선 초기에는 청자태토에 백토가루를 칠하고 투명한 잿물을 발라 구운 분청사기가 주로 많았다.

상업부문

재화나 용역을 공급하는 사람과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서로 그것을 매매교환하여 쌍방의 이익을 도모하는 상업은 이 시기에 들어서며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구석기시대에는 우발적인 교환이 이루어졌을 뿐이지만, 청동기시대 말기에는 토기와 놋쇠붙이가 등장함에 따라 산업적 성격을 띤 교환이 서서히 시작된다.

그 뒤 쇠붙이를 사용한 고대적 사회에 이르러서는 교환이 활발하게 전개된다. 그러나 자급자족을 원칙으로 하고 있는 많은 생산자층은 대부분 농업에 종사했고, 일반수공업의 지배적인 형태는 부업적인 것에 머물렀다.

또 높은 수준의 숙달된 전문적 기술을 요하는 금은세공, 놋쇠·쇠 및 고급도자기는 주로 귀족적 수요에 응했을 따름이므로, 당초에는 상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실용적이고 투박한 도자기라든가 올이 굵은 삼베·명주와 무명 따위는 교환경제를 크게 자극한다. 쇠를 달구거나 도자기를 빚는 기술, 그리고 길쌈하는 방법을 익히지 못했던 전국 각지의 많은 일반백성들은 그러한 물자를 자신이 생산한 물자와 교환함으로써 조달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상업이 점차 발달함에 따라 직접교환이 불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백성들은 일정한 날짜에 도시근교나 교통의 요지에 장을 열고, 비교적 여유가 있는 자신의 생산물을 내다팔고 스스로가 필요로 하는 물자를 구입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시장을 도성에 있는 경시(京市)에 대해서 향시(鄕市)라고 한다.

삼국시대의 도성이나 큰 고을에서 번창하기 시작했던 경시와 향시는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더욱 발전한다. 이와 더불어 직접생산자와 수요자 이외에도 상업을 전업으로 하는 전문상인이 등장한다. 즉, 각자에게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장사하는 것이 가장 유익하다고 판단한 사람들이 상업을 전업으로 택하였던 것이다.

그들 중 부피가 크고 비교적 무거운 상품을 지고 장나들이를 하던 사람을 등짐장수(부상), 비교적 값이 나가고 부피가 작은 상품을 보자기에 싸들고 다니던 상인을 봇짐장수(보상)라고 한다. 그러나 조선 전기에는 수공업과 마찬가지로 상업을 말업이라고 심하게 박대하였기 때문에, 육의전이라고 불린 서울의 관어용시장 이외의 각 고을에 번창했던 장은 심하게 쇠퇴한다.

이행기 사회(17세기∼1894)의 산업

이행기(移行期)라 함은 전산업사회에서 현대산업사회로 진전하는 과도기 단계를 말한다. 임진·정유 양난이 마무리된 17세기 초기 조선왕조의 재정적 기반은 뿌리에서부터 흔들렸다. 양난을 겪는 사이에 그때까지 경제적 기초를 이루고 있었던 일반백성이 많이 죽거나 사방으로 흩어졌고, 토지가 황폐하여 재정수입이 고갈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재정이 고갈될수록 백성에 대한 수탈이 가혹화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한편 전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기로는 왕실이나 관가뿐만 아니라 일반백성도 마찬가지였다. 백성들에게는 당장 먹을 양식과 입을 옷과 살 집이 필요했는데 남은 것이라고는 잿더미밖에 없었다.

그러한 극한적 위기를 극복하게 한 여러 가지 요인 중 가장 획기적인 것이 대동법의 실시였다. 대동법은 1608년(광해군 즉위년) 경기도에서 실시되기 시작한다. 비록, 봉건지배층의 반대에 부딪혀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되기까지는 1세기나 걸렸지만, 종래의 무절제했던 공납과 요역이 원칙적으로 폐지되고, 대신 토지 1결에 대해서 대동세로 지역적 여건에 따라 쌀 열두 말 아니면 삼베나 무명 2필 또는 돈 열두 냥을 수납하게 된다.

그 결과 정부측으로서는 일정액수의 재정수입을 미리 예견할 수 있었으므로, 이른바 양입제출(量入制出)의 원칙에 입각하여 재정상의 세입과 세출을 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다른 한편 납세자인 일반 백성의 입장에서 보면, 이제야 저마다의 자질을 발휘하여 힘껏 일하고자 하는 동기가 부여된다.

왜냐하면, 이전까지의 잡다하고 과중하였던 인두세적인 현물노동지대인 공물과 요역이 예측 가능한 일정액수의 실물화폐형태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직접생산자였던 많은 백성들은 저마다에 주어진 여건과 지니고 있는 기량에 따라서 얼마쯤 자유롭게 여러 가지 생산업에 종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서, 상업·수공업·농업 등 여러 가지 산업부문에서는 마침내 전산업사회와는 구분되는 근대시민적인 요소가 싹터 힘차게 자라기 시작한다.

상업부문

17세기 중기 이래 상업은 놀랄 만큼 발전한다. 이 시기의 상업은 그 이전과는 달리 다음 세가지 현상을 뚜렷이 드러낸다.

첫째는 상품의 공급자와 수요자 사이의 인적 합동현상이고, 둘째는 팔릴 재화와 지불될 대가와의 물적 교환현상이며, 셋째는 재화가 판 사람으로부터 산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대신 대가가 산 사람으로부터 판 사람에게로 건너가는 등가적 이전현상(等價的移轉現象)이다.

대동법이 실시됨에 따라 구시대의 시전에서 전개된 강제적 부등가교환이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또 관가로부터 미리 넉넉한 대동세의 공가(貢價)를 받고 물자를 조달하여 제공하는 전기적·어용적인 계공인(契貢人)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상업은 스스로 내부적인 모순을 안고 있었으므로 봉건적인 한계선을 뛰어넘을 수가 없었다.

반면에, 위의 세가지 현상이 뚜렷하게 보장되기 시작하면서 백성들이 주도하는 사영상업은 17세기 후기부터 국내외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다.

일반백성이 주체가 된 상업은 향시(장)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시작한다. 강력한 억상정책으로 16세기 말기까지 폐쇄상태에 놓여 있던 전국 각 지방 읍성 근처의 장은 17세기 후기부터 활기를 되찾는다.

공물수납이 폐지됨에 따라서 종래의 공물용 특산물이라든지 부업적 수공업품은 물론이요, 각 지역의 수공업제품이라든지 특산물과 농수산물이 상품화되어 각 고을의 장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것들은 5일 간격으로 공급자인 동시에 스스로 수요자가 된 일반장꾼에 의해서 서로 거래되기도 했고, 지역 내의 거간(居間) 또는 중·소상인들에게 매매되었다. 소금 등 해산물이라든지 지역 외 특산품은 주로 보부상에 의해서 공급된다.

무엇보다도 가격이 시장원리에 의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으므로 공급자와 수요자 쌍방에게 끝없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장날에는 더 많은 장꾼이 모여들었고, 18세기 말기에 이르면 크고 작은 장의 수효가 1,000개를 넘어서기에 이른다.

이들 중 팔도의 감영·읍성 주변에 자리잡은 여덟 개의 큰 장과 개성장·안성장·강경장·동래장에는 특히 많은 장꾼과 물자가 집산하여 상업자본을 축적한 대상고도 많이 생긴다.

이때부터 생산물을 거두어들이는 계절에 따라서 특정지역에 특수시장도 번창하기 시작한다. 봄과 가을 약재의 수확기에 열리는 대구의 약령시, 4∼5월 조기잡이 계절에만 열리는 강경의 파시가 그 좋은 보기이다.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말기에 개성에는 50만 냥 이상의 대상고가 50인, 함흥에는 100인, 북청에는 30인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 장꾼이나 중·소상인 및 대상인자본의 상업활동은 앞서 전제한 세 가지 현상이 보장됨으로써 가능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상행위는 분명히 봉건적인 것과는 분명히 구분되는 근대적인 요소가 뚜렷이 엿보이는 것이다.

17세기 후기 이래 이 부문에 있어서는 중앙정부의 규제가 강력하게 작용하고 있었으므로, 국내의 다른 산업과 대비할 때 상대적으로 저조하다. 그럼에도 일반상인이 주체가 된 잠무역(潛貿易)을 포함한 사무역은 크게 발전된다. 그것은 17세기 후기 이래 국내의 사회경제현상 중 다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첫째는 원자재·반제품·완제품 등 외국상품에 대한 수요가 그만큼 증대하였다는 것이고, 둘째는 수입한 대가를 충당할 만한 국내산업이 발달하였으며, 셋째는 엄격한 규제를 받으면서도 높은 교역이윤 동기에 자극된 주체적이고 적극적인 사무역업자가 존재했다는 세 가지 조건이다. 그러한 국제무역의 주된 대상은 중국과 일본이었다.

중국과의 무역도 관리 주체에 따라서 공·사 두 갈래로 나누어진다. 중국 나들이를 하는 사신들은 나갈 때 우리 나라 토산물 외에 공식적으로 일정한 양의 포삼(包蔘)이라고 하는 인삼이나 은을 가져갈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1661년(현종 2) 당상관과 통사에게는 1인당 3,000냥, 당하관에게는 2,000냥에 해당하는 인삼이나 은을 가져갈 수 있도록 허락되었다. ≪만기요람≫ 재용편에 의하면, 1802년(순조 2)부터는 포삼 120근을 서울 또는 개성의 상인에게 맡겨서 매매하게 하고, 근당 200냥의 포세를 징수하여 그중 100냥만 사신들에게 등급에 따라 나누어준다고 하였다.

사무역은 사신들을 따라가는 개성의 송상과 의주의 만상이 주로 도맡았다. 그들은 공무역이 이루어지는 중강개시(中江開市)와 책문개시(柵門開市)에 뒤이어 벌어지는 사무역인 중강후시·책문후시에서 대규모의 사적인 교역행위를 벌였다.

품목에 따라 양국간의 가격차가 10∼20배에 달하는 것이 많았으니, 그로 인해 양국 상인들의 이윤동기는 목숨까지도 바칠 만큼 강하게 자극받았고, 따라서 사적인 교역행위는 활발할 수밖에 없었다. 후시 사무역에서 팔리는 주종품목은 인삼·쌀·무명이고 사들인 것은 비단과 모자였으며, 18세기 말기의 거래액은 100만냥을 넘어섰다.

1609년(광해군 1) 조선과 일본간에 체결된 이른바 기유조약 이래 양국간의 공·사무역이 크게 활성화한다. 통신사와 세견선을 중심으로 한 공무역은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었고, 사무역에 있어서도 왜관 안의 대청무역(大廳貿易)의 경우 관인들의 엄격한 통제를 받았으므로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러나 잠무역에 있어서는 중국(中國)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높은 교역이윤이 보장되었다.

이에 잠무역은 관인과 결탁한 대상인이 도맡았다. 공·사무역을 막론하고 들여온 것은 구리·쇠·납쇠가 주종을 이루고, 나간 것은 쌀·무명·삼베·모시·인삼 등이었다. 이 시기의 국내상업과 국제무역은 크게 다음 두 가지 효과를 가져왔다.

하나는 국내외 교환경제체계의 성격을 근대적인 것으로 바뀌게 하는 효과이고, 다른 하나는 수공업·상업·농업 등 다른 산업을 자극하여 결과적으로 경영방법까지 크게 변질시키는 효과였다. 이처럼 상업과 직접 간접으로 관련되면서 수공업·농업 등 다른 산업에 있어서도 초기자본을 축적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공업부문

이행기에 있어서 그 성격을 가장 뚜렷하게 나타내는 산업은 수공업이다. 도구를 사용하여 원자재를 가공하는 수공업은 이 시기의 다른 산업과는 달리 생산의 구조적 성격 때문에 다음과 같은 초기자본가적 경영방법이 얼마쯤 뚜렷하게 나타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윤을 추구하는 초기자본가적인 전주가 판매를 전제로 한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일정한 토지 위에 시설·장비·도구 및 원자재를 갖추는 한편, 정해진 품삯을 지불받는 자유 노동자를 고용하고, 그들에게 몇 갈래로 분화된 공정을 분업적으로 담당하게 하여 협업적으로 완제품 또는 반제품을 생산하는 생산방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초기자본가적 공장제 수공업이 이 시기에는 여러 가지 부문에서 대두되기 시작한다.

① 직물부문:17세기 후기 이래 갑자기 수요가 증가한 무명·삼베·모시·명주 등 각종 직물생산은 각기 주어진 여건에 따라서 특정지역으로 집중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삼베는 경상도 안동·의성 지방에서, 무명은 전라도 광산·나주 지방에서, 모시는 충청도 한산지방에서 각각 전문적으로 생산하게 된다.

이러한 지역의 몇몇 전주들은 목화나 삼 등을 직접 생산자에게 빌려주고 완제품의 절반씩을 나누어 가졌는데, 이는 ‘수넷베’라고 불리는 선대제(先貸制) 수공업을 경영하기 시작한 것이라고 해석된다.

또 어떤 전주들은 스스로 작업장을 차려놓고, 날품이나 달품을 주고 사람을 데려와 시장에 내보낼 ‘장내기베’를 짜내었다. 거기서는 전적으로 실을 잣는 사람, 베를 날고 매는 사람, 그리고 짜는 사람 등 세가지 공정으로 분화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산모시와 안동포 생산에서 한층 더 뚜렷하게 나타났음이 확인되었다.

② 놋쇠부문:이 시기에 놋쇠수공업은 고도로 발전한다. 그 원인은 대동법 실시 이래 사회적으로 주어진 유리한 조건 외에 다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진 데 있다.

첫째는 역사적으로 놋쇠를 다룰 수 있는 기술자인 각종 놋쇠편수가 많았다는 것, 둘째는 전 민족적으로 놋쇠그릇을 선호하여 수요가 급증한 점, 셋째로 놋쇠의 원료가 대량으로 공급될 수 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원료인 구리쇠와 납쇠의 일부는 기유조약 이래 일본에서 들어왔고, 일부는 함경도 갑산에서 개발된 큰 규모의 구리광산에서 공급되기 시작한다.

먼저 관영놋쇠점의 대표적인 경우를 찾아보면, 서울에는 동전인 상평통보(常平通寶)를 부질하는 관영놋쇠점이 있었다. 1678년(숙종 4)부터 중앙과 지방의 각 관사에서 대량의 동전을 부질하였는데, 1779년(정조 3) 당시 서울에 있는 관영주전소에는 21인의 장인이 종사하는 50개의 작업장이 있었다.

1,050인이 일하는 커다란 수공업장에서 상평통보를 부질하였다. 그들은 우두머리 기술자인 도편수의 지휘와 감독을 받으면서 대량의 돈을 부질하였다고 한다.

17세기 후기부터 사영 놋쇠수공업은 앞서 말한 조건이 갖추어짐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크게 번창했다. 이들 중 이 시기의 특징적인 규모를 갖춘 것은 경기도의 안성·개성, 충청도의 청주, 전라도의 전주·남원, 경상도의 봉화·금산·고령, 강원도의 강릉, 평안도의 정주, 함경도의 갑산에 있는 놋쇠점이다. 놋쇠수공업은 기술적으로 크게 두가지 방법으로 구분된다. 하나는 부질법이고, 다른 하나는 방짜법이다.

부질법이란 도가니에서 녹인 쇳물을 거푸집에 부어 식기·대접·보시기·칠첩반상기·제기·불기 등을 짓는 방법이다. 이 방법은 청동기시대 이래의 오랜 전통을 지니며, 그 대표적인 것은 경기도 안성시 안성동에 있었다.

18세기 중기 이래 안성에서는 전국적으로 성가높은 놋그릇을 지어왔는데, 19세기 전후 4인의 편수를 포함한 20인 안팎의 일꾼을 고용하여 그릇을 만든 놋쇠점이 40∼50채에 달하였다고 한다.

일꾼 중에서도 쇳물을 녹이는 불이편수, 거푸집에 쇳물을 지어붓는 뒤불편수, 거푸집 속에 갯토로 무집을 만드는 거푸집편수, 그리고 가질틀에 그릇을 끼워 겉을 매끈하게 깎아내는 가질편수 등 4인은 모두 오랜 경력을 쌓은 높은 수준으로 숙달된 기술자여야 했다.

이들은 각각 풀무꾼·갯토꾼 등 허드레일꾼을 지휘하면서 분화된 각 공정을 책임지고 전담한다. 여기에서도 서울의 관영 동전놋쇠점에서처럼 생산을 네가지 공정으로 나누어서 협업적으로 생산하였다. 그러나 관영의 경우와는 달리 안성에서는 편수와 허드레꾼에게 미리 서로 약속한 날품삯과 달품삯이 지불되었다.

한편 놋쇠덩어리를 화덕에서 달구어 망치로 두들겨 그릇을 만드는 방짜법도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식기·대접·향로·화로·수저·장신구 등을 만드는데, 특히 많은 힘과 잔공이 드는 대신 값이 부질놋쇠보다 갑절이나 비쌌다고 한다.

특히 징·꽹과리·바라 따위와 같이 충격을 많이 받는 용구를 만들 때는 이 방법만을 쓰며, 부질방법으로 만들어서는 아무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방짜놋쇠점은 17세기 후기 농악놀이가 발달함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번창하였다.

18, 19세기에 있어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평안도 정주군 납청에서 경영된 이른바 ‘납청양대’이다. ‘납청양대’의 표본인 징의 생산과정 중 전주·도편수·불편수·가질편수의 구실과 공정은 안성유기와 동일하다. 그러나 방짜공정은 틀잡기·그릇짓기 및 울음잡기 등 세 가지로 분화되어 여기에서도 분업적인 협업을 하였다.

③ 쇠부질부문:17세기 이래 쇠점은 경영주체에 따라 공인경영(貢人經營)과 사영 두 가지로 구분된다. 공인경영은 공인이 경영의 주체가 되어 있다. 수철계공인(水鐵契貢人)은 미리 넉넉한 대동미화(大同米貨)를 받고 왕실이나 관아에 쇠붙이를 조달해주는 독점적 상공인이다.

그들은 서울 강서 수철리를 중심으로 사방 10리 터 안에 무쇠점을 차려놓고 사방 100리 안에 있는 모든 쇠부질일을 총괄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수철리에는 많은 쇠부질 장치를 갖춘 쇠점이 있었는데, 공인의 우두머리가 그것을 총괄하고 각 쇠점에서는 각 공정의 숙련기능공인 골편수·불편수·도래질편수의 책임 아래 도합 42인씩의 풀무꾼·오리꾼·허드레일꾼이 서로 얽혀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편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일꾼들의 삯료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에 불과하였으므로, 여기서 경영의 근대적인 요소를 찾기는 힘들다.

경상도 울산 달내쇠곳 언저리와 토함산·치술령, 운문산 기슭에 있었던 사영쇠점의 경우, 생산공정은 위와 비슷하지만 고용형태가 판이하다. 선구적인 쇠부질 초기자본가인 이의립(李義立)과 그의 후손 등 혈연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경영한 쇠부질터가 많다.

이들 중 19세기 말기에 운문산 기슭 말음의 전주 홍순영(洪淳榮)이 경영한 무쇠부질점에서는 각 공정을 분업적으로 전담하여 협업적(協業的)으로 경영하였고, 편수와 일꾼들에게 미리 약속한 임금을 주었다.

④ 백자기부문:17세기 후기부터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사기였던 분청사기는 자취를 감추는 대신에 전국 각지에서 백자기가 대량으로 생산되었다. 이 시기의 백자기 수공업도 관영과 사영 두 가지로 구분된다.

전자는 경기도 광주에 있는 사옹원(司饔院) 분원자기(分院磁器)이다. 17세기부터 왕실과 관어용 도자기를 만들기 위하여 전국에서 백토와 장작을 공물로서 거두고, 사기장(沙器匠)을 선상받아서 사옹원 관원이 감독하면서 강제적으로 잔공을 많이 들여 백자기를 굽게 하였다.

그러나 많은 사기장이 제대로 삯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분원경영이 한계에 부딪히기 일쑤였다. 1874년(고종 11) 분원자기 공인절목(貢人節目)을 만들고 생산조직을 마치 수철계공인의 경영과 같은 방법으로 정비하였으나, 근대산업으로 승화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라가 일제에 강점됨에 따라 분원은 폐쇄되었다.

이에 반해 17세기 후기부터 일반백성들의 백자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사영사기점 또한 전국 각지에서 번창하기 시작한다. 특히 역사적으로 도자기업과 연고가 깊은 전국의 몇몇 곳에서는 규모를 갖춘 새로운 장내기용 눈배기백자기점이 경영된다.

경기도의 광주·여주·양근·양주, 충청도의 전의·역기·온수·황간·공주·남포·정산·홍산, 경상도의 경주·양산·고령·금산·군위·곤남·합천·삼가, 전라도의 전주·금산·부안·정읍·나주·영암·고항·흥덕·남원·임실·담양·능성·동복, 황해도의 서흥·해주·평산·은율, 강원도의 양구·운산, 평안도의 정주·용천·선천·영변, 함경도의 회령·경원·문천 등 전국 각 고을의 백자기점이 바로 그 예이다. 이들 중 경상도의 합천·고령·밀양과 전라도의 부안(목포)·무안의 경우 더욱 이름 높다.

19세기 후기 경상도 합천현 가야산 기슭에서 전주 민석로(閔錫魯)가 흙을 이기고 물레를 돌리는 일에 물레방아를 동력으로 이용하기도 하며, 세련된 민수용 장내기 사기그릇인 눈배기백자를 대량으로 생산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이 지역의 다른 전주에게 승계되어 근대적 도자기공장으로 승화된 예가 많다. 오늘날의 가야면 도자기공업단지가 그것이다. 도자기부문을 제외한다면 승화된 경우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다. 그 이유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이 땅을 강점하여 민족기업을 말살하였기 때문이다.

운문산 기슭 말음에서 홍주일(洪周一)은 발동기를 도입하여 무쇠부리둑의 송풍장치에다 연결시키는 일에 성공하였고, 납청유기산업은 민족기업가인 이승훈(李昇薰)에 의해서 근대공장제기업으로 승화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한결같이 국권회복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다 기업을 일으키는 일에는 결국 실패하고 만다.

이밖에 농업부문에서도 인삼·담배·목화·양잠·감·배·사과·채소 등을 전업적으로 재배한 초기농업자본가적 경영은 이 시기에 도시근교에서 강력하게 대두되었다. 그러나 국권회복에 뜻을 두었던 이 시기의 기업가 중에서 민족자본으로 성공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근대(1895∼1945)의 산업

국권이 일본제국주의에 의해서 짓밟히게 된 19세기말기부터 산업을 일으키고 있던 민족기업가들은 헤치고 나가기 힘든 거대한 암벽에 부딪힌다. 이에 그들은 한편으로는 노략질을 일삼던 일본인기업과 강력하게 대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국권회복에 나선다.

논자에 따라서는 일본인기업과 친일기업이 우리 나라에 근대산업을 이식시키는 데 기여하였다고도 하지만, 그러한 논리는 받아들일 수 없다. 민족이 말살되고 소멸될 경우 이식된 산업이 비록 이땅에서 뿌리를 박는다 하더라도, 주체인 민족적 양심과 행복 자체가 자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족은 말살되고 산업이 흥륭한 예는 오늘날의 남·북아메리카주와 오스트레일리아주에서 전형적인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그곳 원주민의 주체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고도로 발달한 그 지역의 산업은 그림 속의 떡보다 못할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산업은 민족자본에 국한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 시기의 산업은 출신성분에 따라서 전통지주형 민족자본이 일으킨 산업과, 자수성가형의 산업 등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밖에도 전통적인 지주출신으로서 개화기 이래 외국의 식민지 세력에 의존하지 않고 주체적으로 일으킨 산업이 있다.

하지만 이 시기에 민족주체성에 입각하여 산업을 일으켜 끝까지 양심을 굽히지 않은 자본가는 매우 드물다. 1910∼192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러한 민족자본의 수효는 많았으나, 후기에 이를수록 더욱 극심한 박해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지주형 민족산업자본가의 한 본보기로 안희제(安熙濟)를 들 수 있다. 그는 경상도 의령의 전통지주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4년 토지 2,000두락을 매각하여 부산에서 곡물·면포·해산물을 거래하는 백산상회(白山商會)를 창설, 경영하였다. 1917년 자본금 13만 원(圓)으로 합자회사를, 1919년 5월 백산무역상회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1898년에 부산에서 철도산업을 일으킨 박기종(朴琪淙), 함흥에서 은행을 세운 김승환(金昇煥), 평양과 정주에서 각기 도자기공장과 유기공장을 세운 이승훈, 영남과 관동지방에서 광산업을 대대적으로 개발한 김윤상 등은 자수성가형 민족산업자본가들이다. 주체의식이 투철한 탓으로 전시통제경제를 실시하기 이전에 강제적으로 업체가 폐쇄되고 만다.

이처럼 오랜 기간을 통하여 상업·수공업·광업·농업·수산업 등 경제적 기초구조 내부에서는 근대적인 요소가 서서히 싹터서 힘차게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상부구조에는 중앙집권적인 봉건체제가 온존하고 있었다. 19세기 초두, 안동 김씨(安東金氏)를 주축으로 하는 봉건적 반동세력이 강력하게 대두된다. 이에 1811년(순조 11) 관서지방에서, 1860년대에는 삼남지방에서 광범위하게 농민전쟁이 벌어진다.

그리고 1876년(고종 13)에는 식민지적 반동세력이 개입하기 시작한다. 이에 저항하여 1894년(고종 31) 전국적인 규모의 동학농민전쟁이 벌어진다. 주체세력은 일단 봉건적 반동세력을 제압하는 데 성공하지만, 개입한 일본군국주의를 몰아내는 일에 실패하고 만다. 이후, 일제식민세력은 봉건적 반동세력과 서로 보완적으로 협동하면서 이 땅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린다.

광복 후의 현대산업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았으나 조국강산은 이미 일제식민지정책에 가혹하게 짓밟힌 나머지 폐허의 잿더미로 남아 있었다. 더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남북으로 분단되자 모든 생산요소도 흐트러져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두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 하나는 연면하게 승계해 온 산업문화의 민족주체성이고, 다른 하나는 비록 둘로 갈라졌지만 조상 전래로 지켜온 땅덩어리, 한반도이다.

광복 후의 우리의 산업이 어떻게 전개되어 오늘의 우리 산업으로 승화되었으며, 현재의 상태는 어떠한지를 3단계로 나누어 간추린다.

산업기반조성기(1945∼1953)

이 시기는 식민지하의 전시통제경제의 잔재를 불식하고 6·25전쟁을 극복하며, 나아가 민족주체적인 국민산업의 기반을 다지는 기간이다.

광복 직후 전국민의 80%를 차지하는 농어민이 아주 전통적인 방법으로 생산업에 종사함으로써 민족은 간신히 생명을 부지한다. 산업사적으로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이어받고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을 발휘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료에 따르면, 1차산업을 제외한 우리의 제조업이나 광업 등은 위축되어 있었다. 당시 5명 이상이 취업한 우리 나라(남한)의 제조업체 수는 겨우 5,249개이고, 거기에 취업한 근로자수는 12만여 명에 불과하다.

국권은 회복되었다고 하지만 민족자본은 말살되어 생산의 거의 모든 요소가 무너진 것이다. 이때를 산업기반조성기라고 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 기간 동안에 역사상 획기적인 농지개혁이 실시되었기 때문이다.

농지개혁은 유구한 우리 민족산업사상 처음으로 겪는 혁명적인 변화였다. 고대국가가 성립된 이래 2,000여 년 동안 소수의 지배계급은 사실상 그들 소유의 유일한 원천인 토지를 매체로 하여 일반백성들을 노예적 또는 반인격체적으로 속박해 왔었다.

그러던 차에 비록 남북이 서로 다른 체제로 분단된 관계로 실시의 철저성에 있어서는 격차가 있을지라도, 다 같이 농지개혁을 단행하여 농민을 해방시킨 것이다.

남한에서는 1953년까지 개혁이 완만하게 추진되었지만, 이 개혁을 통하여 연평균 쌀 800만 석에 해당하던 소작료가 종래의 소작인들의 소득으로 귀착되기에 이른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지난날의 소작인을 포함한 많은 농·어민의 자녀에게도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1948년 헌법이 제정되어 법적으로는 “모든 국민은 법률 앞에서 평등한 주권자”가 된다. 이에 따라서 지난날과는 달리 민족의 2세들이 국민기본교육을 받은 다음, 저마다 타고난 자질과 형편에 따라 중등 이상의 학교에서 학문과 기술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 그후, 각급학교에서 교육을 마친 많은 젊은이들은 우리 산업의 역군이 되어 산업사회로 진입할 기반을 다져나간다.

산업사회진입기(1954∼1961)

이 기간은 식민지 잔재를 말끔히 씻어내고 전쟁으로 인해 위축되었던 모든 산업을 부흥시키는 한편, 새로운 산업을 일으켜 산업사회로 숨가쁘게 진입하는 시기이다.

국토가 좁고 자연자원이 부족한 나라에서 산업을 일으킬 수 있는 요소는 인적 자원밖에 없었다. 그러한 기능 및 관리인력의 역할을 농지개혁 이래 전국에서 균등한 기회를 얻고 학교교육을 받아 양성된 젊은 인재들이 떠맡게 된다.

1947년 말 초등학교 졸업생 193만2481명, 중등학교 47만4297명 및 전문학교 이상 졸업생 6만2426명이던 것이, 1962년에는 각각 609만7121명, 187만6821명, 28만5417명 도합 1058만5059명으로 급증하였다.

이들 중 고학력자는 주로 관리직을 맡고, 일부는 경제개발5개년계획 수립에 참가하였으며, 나머지 대부분은 제조업·농업·서비스업에 종사하게 된다. 1962년 말 현재 이러한 각종산업에 종사한 총원은 1152만3452명에 달한다. 그리하여 우리도 비로소 산업사회로 진입한 것이다.

1958∼1962년 사이의 주요산업 생산지수는 다음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급성장하고 있다. [그림]에 따르면 1960년을 기준으로 한 총지수도 성장하였지만, 광업·제조업·전기산업 등이 두드러지게 성장하였다.

그리고 국민총생산은 1955년의 불변가격으로 1953년 8850억원(100.0)이던 것이 8년이 지난 1961년에는 12조3040억 원(141.7)으로 늘어났다.

이들 중 1953년 광업·제조업·전기수도업·운수통신업은 각각 760억 원·7090억 원·540억 원·1890억 원이던 것이 1961년에는 2580억 원·1조7200억 원·990억 원·4980억 원으로 급성장하였다. 이러한 자료는 우리 사회경제도 산업사회로 돌입하였음을 뜻하는 것이다.

산업고도성장기(1962∼)

이 기간은 모든 산업이 고도로 성장하고 있는 시기이다. 1962년부터 실시된 제5차까지의 경제(사회)개발5개년계획에 대한 성과는 여러 가지 관점에서 나름대로 평가받고 있다. 1963년 이후 1987년까지 산업별 국민총생산의 변화추이는 1차산업의 비중이 점차 줄어드는 대신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2차산업의 비중이 높아졌다.

그리고 3차산업의 비중도 완만하게 증가하여, 산업구조가 고도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1963년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의 비중이 43.1%·16.2%·40.6%인데 1995년에는 각각 7.3%·39.4%·53.3%로 산업구조가 크게 변화하였다.

즉, 1963년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의 비율이 61.3%·8.7%·28.2%인데 1997년에는 각각 11.0%·21.4%·67.6%로 크게 변화하였다. 특히 경제활동인구가 증가함에도 불구하고 대체로 1차산업부문에 종사하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편, 산업생산지수는 제조업의 지속적인 생산성향상에 의하여 계속 높아지고 있다.

이처럼 오늘날의 산업구조가 고도화될 수 있었던 요인은 멀리 전산업사회로부터 이행기를 거치는 동안에 쌓은 연면하고 끈질긴 전통과 민족주체성에 있다 하겠다. 한편, 고도산업사회가 성숙해감에 따라서 이제 새로운 사회문제·노사관계·자원문제·공해문제·국제관계 등 많은 과제들이 등장하고 있다.

산업구조

각 산업부문이 경제활동의 생산물이나 자원 중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체계적으로 파악한 것이 산업구조이다. 즉, 생산구조를 각 생산물의 물리적 성격이나 기술적 인자(因子)에 따라 수평적으로 몇 개의 산업부문으로 나누는 것이다. 산업분류의 방법을 보면, 2분류법·3분류법·4분류법 등이 있다. 2분류법에 의하면, 소비재산업과 투자재산업으로 나눌 수 있다.

산업이 발전함에 따라 투자재산업에 대한 소비재산업의 비율인 호프만비율이 저하되는 경향이 있다. 3분류법에 의하면, 제1차산업·제2차산업·제3차산업으로 나누거나 농업·광공업·서비스업의 3부문으로 나누기도 한다. 우리 나라의 경제개발5개년계획에서는 제1차산업·제2차산업·사회간접자본 및 서비스업의 4분류법을 택하고 있다.

이와 같은 산업분류는 산업구조의 변화형태를 정리한 것이지만, 현대의 다양한 각종 산업을 분류하고 이해하는 데는 미흡하다. 이들의 결함을 보완한 것이 국제연합에서 제정한 국제표준산업분류방식(International Standard Industrial Classification, ISIC)이다. 현재 우리 나라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는 이러한 분류방법을 원칙적으로 채택하고 있다.

국제표준산업분류방식을 우리의 실정에 맞게 수정·보완하여 한국표준산업분류방식(Korean Standard Industrial Classification, KSIC)을 제정하였으며, 경제기획원에서나 한국은행에서는 이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1984년 경제기획원에서 나온 ≪한국표준산업분류≫에 따르면 대분류는 9개 부문, 중분류는 36개 부문, 소분류는 90개 부문, 세분류는 294개 부문으로 나누어져 있다.

우리 나라에서 많이 사용되고 있는 또다른 산업분류방법은 산업연관표(産業聯關表)의 분류방식이다. 한국은행에서는 매 2년 내지 3년마다 산업연관표를 작성하고 있는데, 새로 작성할 때마다 산업의 성장패턴이나 구조상의 변화를 감안하여 새로이 분류하고 있다.

전통적인 농경사회의 경우 농업·수산업·임업 등 1차산업의 비중이 높고 2차산업과 3차산업의 비중은 극히 미약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회가 점차 발전함에 따라 2차산업과 3차산업의 비중도 차차 증가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자료의 미비 등으로 그 실태를 추정하기가 어렵다.

일제강점기의 산업구조도 통계자료의 미비로 인하여 그 추계가 어렵기 때문에, 각종산업별 생산고에 의하여 개관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실정에 있다.

일제강점기 제1차산업에 해당하는 농산물·축산물·임산물·수산물의 생산고는 1913년의 94.9%에서 1940년에는 51.5%로 감소하고 있으며, 제2차산업에 해당하는 광산물·공산물은 같은 기간에 5.1%에서 48.5%로 증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통계상으로 보면 일제 말기에는 우리 나라의 산업구조가 상당히 고도화되어 공업이 크게 발전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당시의 공업(회사)의 대부분은 일본인 소유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나라의 민족자본에 의한 공업은 미약하였던 것이다. 1933년 전 회사(全會社) 자본금 중 우리 나라 사람의 소유회사는 6.5%에 지나지 않았다. 우리 나라는 제1차산업의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은 농업국가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일제의 심한 억압을 받으면서도 민족기업은 꾸준히 발달해왔다. 민족회사는 1920년말의 99개 회사(자본금 1920만3000원)에서 1938년에는 2,278개 회사(자본금 1억2266만 원)로까지 증가하였다.

민족기업은 대부분 기업규모의 영세성을 면하지 못하였으나, 우리는 민족의 꾸준한 노력과 근면성에 의해 성장해온 것이다. 따라서 일제시대 제2차산업의 비중이 다소 높아진 것에는 민족기업의 성장이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1953년 이후 산업구조의 변화추이는 1953년 1차산업·2차산업·3차산업의 비율은 각각 42.3%·9.1%·48.6%이고, 1963년에는 43.1%·16.2%·40.6%로 2차산업 비중이 약간 증가한 반면 3차산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었다.

그 뒤 1995년에는 각각 7.3%·39.4%·53.3%로 산업구조가 크게 변화하였다. 각 산업에 종사하는 취업인구의 비율도 1963년 61.3%·8.7%·28.2%이던 것이 1997년에는 11.0%·21.4%·67.6%로 크게 변화하였다.

즉, 농림수산업의 비중이 급격하게 줄어든 반면,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2차산업의 비중이 약간 증가하고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한 3차산업의 비중이 급증하여 산업구조가 크게 변모하였다.

산업정책

산업정책이란 국민경제의 전반적인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산업간의 자원배분과 산업활동 수준을 적절히 조정하는 정책을 의미한다. 산업정책은 대체로 다음의 세가지로 구성된다.

첫째는 산업기반정책으로서 기업이 원활한 산업활동을 할 수 있도록 공업단지를 조성하고 도로·항만을 건설하며 기술인력을 공급하는 등, 각종 산업기반을 제공하는 데 관련된 정책이다. 산업기반정책 중 국제경쟁력 향상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산업기술정책이다.

둘째는 산업구조정책으로서 각계각층의 의견이 수렴된 산업구조의 향후 방향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그 상태를 실현하기 위하여 특정의 투자기준 내지 지원기준을 설정하며, 그 기준에 합치하는 산업의 육성 혹은 합리화를 도모하는 정책이다. 산업구조정책은 바람직한 산업구조의 실현을 위하여 조세·금융·인력 등의 지원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는 산업조직정책으로서 독과점과 부당한 거래를 규제하고 과도한 경제력 집중을 방지할 뿐 아니라, 중소기업을 적극 육성하여 경쟁을 촉진하는 시장구조 및 행동을 유도하는 정책이다.

산업정책의 대상이 되는 산업의 범위는 넓게는 농업·수산업 등의 1차산업에서부터 유통업·금융업 등의 3차산업까지 포함되지만, 일반적으로 제조업 중심의 2차산업이 주요대상이 되고 있다. 광복 이후 산업정책의 변천과정은 다음과 같다.

경공업부문의 수입대체기(1953∼1961)

이 시기의 산업정책은 외국원조를 활용하여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경제의 안정기반을 확립하기 위하여 산업을 재건하는 데 그 초점이 맞추어졌다. 우선, 기간산업인 시멘트·유리·비료·전력 등의 부문에 투자를 집중시키는 산업정책이 시행되었다.

한편, 민간생활필수품의 공급확대를 위하여 외국원조를 소비재도입에 활용하였으며, 점차 소비재를 수입대체하는 방향으로 공업화정책을 추진하였다. 소비재공업 중 제분·제당·면방 등 식료품 및 섬유공업부문이 성장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소비재공업부문에 중소기업이 난립하여 과당경쟁을 빚자 시설조정과 기업경영합리화를 위한 <자산재평가법>을 시행하였으며, 아울러 중소기업육성과 국영기업의 민영화를 위한 다각적인 조처를 취하였다.

정부의 소비재공업 육성정책에 따라 생산재공업부문은 상대적으로 등한시되어 왔다. 기간산업 건설과정에서 비료·시멘트 등 일부 대규모공장이 설립되기는 하였다.

그러나 제조업 전체에서 차지하는 생산재공업의 비중은 1961년에 이르러서도 16.8%에 그쳤으며, 기초화학제품을 비롯한 석유·기계 공업 등 공업발전의 선도적인 기능을 담당하는 중화학공업의 발흥을 위한 산업정책이 경제력 부족으로 인해 제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이 기간의 산업정책의 특징은 투자규모가 작고 투자대상이 명료하여 지원과 통제가 구체적인 기업단위로 실시된 점이다.

경공업부문의 수출증진기(1962∼1971)

정부는 이 기간 동안 경공업제품의 수출촉진과 공업의 자립기반을 확립하기 위한 산업·무역지원시책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집약적 경공업부문인 섬유·의류·합판 등을 중심으로 수출산업화정책을 추구하였다.

2차산업부문이 전산업의 성장을 주도하도록 산업정책을 전개하였다. 특히 수입대체산업인 시멘트·비료·조선·정유 등 기간산업의 육성과 전력·운수·통신 등 사회간접자본의 건설에 집중적으로 자원을 배분하였다.

제2차경제개발계획부터는 본격적인 공업발전전략이 전개되었으며, 1960년대 후반 이후 기계·조선·전자·석유화학·철강·비철금속·섬유 등 분야의 개별공업육성법이 제정되어, 산업구조 고도화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중소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여 수출산업으로 전환시키며 전문화·계열화를 유도하기 위한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산업정책을 지원하기 위하여 정부는 재정투·융자와 정책금융이라는 정책수단을 사용하였는데, 전자는 제1차경제개발계획에서, 후자는 수출지원금융·기계공업 육성자금·중소기업 진흥자금 등의 형태로 제2차경제개발계획에서 주로 실시되었다.

한편, 이 기간에 집중육성된 기간산업들은 높은 수준의 과학기술 기반이 요구되는 분야들이었으므로, 이를 지원하기 위하여 제1·2차과학기술5개년계획이 수립되어 과학기술을 산업발전에 직결시켜 기업의 생산성 향상 및 시설의 근대화를 도모하는 정책이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중화학공업 육성기(1972∼1979)

1970년대 들어 자원민족주의의 대두와 함께 산유국들이 석유를 무기화하기 시작하였으며, 국제통화기금(IMF),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 체제를 바탕으로 한 자유무역주의가 보호무역주의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대외지향적인 경제전략을 추구해온 우리 나라의 경우, 보호무역 장벽을 극복하고 외화가득률을 높이는 동시에 원자재의 가격상승과 공급불안에 대처할 수 있는 경제정책이 요구되었다.

이러한 경제환경하에 산업정책은 국민경제 자립기반의 확립과 국제경쟁력의 지속적인 강화를 위하여, 경공업중심의 산업구조와 수출상품구조에서 벗어나,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산업구조를 고도화하는 산업구조정책이 중점적으로 시행되었다.

중화학공업화를 통한 산업구조 고도화정책은 대규모 시설투자를 위해 고도의 기술축적과 국내자본축적이 선행되어야 하나, 이러한 선행조건이 미비된 상태에서 추진되었기 때문에 부족한 재원의 조달은 해외에 의존하였으며,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하여 1960년대 이래 계속되어온 정부주도적인 산업정책이 실시되었다.

중화학공업화에 필요한 재원조달과 외자유치를 위하여 <외자도입법>·<공공차관도입 및 관리에 관한 법률>·<수출자유지역 설치법> 등이 정비되었다.

또한 철강·조선·전자·기계·비철금속·석유화학 등 전략산업의 중점적인 육성을 위하여 조세감면과 보호관세정책이 실시되었으며, 수출구조를 중화학공업제품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하여 수출지원금융·수출산업 설비자금 등의 정책금융이 위의 산업부문에 집중 배분되었다.

1970년대의 산업정책은 정부가 시장가격기구의 기능을 보완하기 위하여 산업간 자원배분에 적극 개입하는 방식을 취하였으며,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전환하기 위한 산업구조 조정정책이 핵심을 이루었다.

아울러 중소기업 육성을 위한 자금지원, 수출산업화를 위한 각종 지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협력체제 유도 등 다각적인 중소기업 지원정책이 시행되었으며, 선진국과의 기술격차를 줄여 중화학공업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할 수 있도록 기술도입의 원활화, 자체기술개발 등에 대한 지원정책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민간자율화와 산업정책의 전환(1980∼)

우리 경제는 1960년대에 시작된 경제개발정책에 힘입어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규모가 크게 팽창하였으며, 경제활동의 복잡화·국제화로 정부의 경제활동에 대한 개입축소와 민간자율화가 바람직스러운 상태에 이르렀다.

따라서, 산업정책은 시장기구의 활성화를 통한 민간주도 경제운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추진되었다. 산업에 대한 정부의 보호지원과 규제조치를 민간의 자율화 내지 자유화로 전환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경쟁의 원리를 도입하여 경제활동의 효율성을 높여나갔다.

또한 대내경쟁의 촉진을 위하여 1980년 <독점규제 및 공공거래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여 공정거래의 기반을 구축하고 부당거래를 규제하여 나갔다. 또한 낙후된 금융부문을 발전시키고 민간 위주의 경제운용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도록 금융자율화를 추진하여 시중은행의 민영화를 이룩하였다.

아울러, 은행·단자회사 등 금융기관의 신규설립을 허용하고 정책금융 축소와 금리의 획기적인 인하를 단행하여 금융활동의 자율성을 높여나갔다.

해외경쟁 도입을 확대하기 위하여 수입자유화율을 1980년의 68.6%에서 점진적으로 높여 1986년에는 91.6%, 1989년 7월의 경우 95.5%로 끌어올렸으며 관세율을 점차 인하하였다. 외국인투자 및 기술도입의 자유화를 확대하기 위하여 외국인투자 허용업종과 투자허용비율을 확대하고 기술도입계약을 인가제에서 신고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대기업 중심의 경제력 집중을 완화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시책들이 추진되었다. 수입유발적 산업구조 개선방안의 하나로 부품생산 중소기업을 중점 지원하고, 중소기업 시장에 대한 대기업의 침투를 방지하기 위해 중소기업 고유업종을 확대·지정하는 등 중소기업 육성시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였다.

이상과 같은 산업조직정책의 강화가 1980년대 산업정책의 두드러진 특징이지만, 중화학투자조정으로 일컬어지는 산업구조 조정정책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였다.

1970년대 들어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부 분야에서 중복·과잉투자가 야기되었으며, 1979년의 2차석유파동으로 가동률이 저하되고 기업의 부실화가 심화되어 정부는 투자조정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80년 발전설비 및 건설중장비·자동차·중전기기·전자교환기·디젤엔진·동제련 등 분야의 투자조정조처가 발효되었으며, 일부품목의 조정내용은 그뒤 다소 변경되기도 하였다.

한편, 세계적인 경기불황과 산유국의 경기침체로 종합무역·조선·해외건설 분야의 경쟁력이 취약하게 되어 동 분야에서도 산업합리화계획이 추진되었다.

민간자율의 증대와 경제개방화를 통하여 우리 기업의 국제경쟁력을 향상시킬 수 있도록 1986년 <공업발전법>이 제정, 공포되었고, 1995년에는 이 법을 수정·보완하였으며 앞으로 산업정책은 동법을 근간으로 추진될 전망이다.

우리 나라는 1960년대에 대외지향적 공업화전략을 추진하여 고도의 경제성장을 달성하였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 산업구조 고도화를 위한 중화학공업의 육성을 정책기조로 삼고 중요산업에 대한 정부조정기능과 조세·금융상의 지원을 강화하였다.

중화학공업화를 목표로 한 산업정책은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기계·자동차·조선·전자·철강 등 분야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룩하였다.

한편, 정부주도의 산업정책, 중복투자 및 일부산업에 대한 편중지원 등 국내문제와 석유파동과 보호무역주의의 대두에 따른 세계경기의 침체로 일부산업과 기업의 경쟁력이 약화되는 결과가 초래되어 중화학투자조정조처가 취하여졌다. 동 조처는 정부 주도에 의한 강력한 산업구조 조정정책으로서 부실기업의 정리와 기업재무구조 개선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제5차5개년계획(1982∼1986)을 추진하면서 정부는 민간의 자율과 경쟁을 더욱 촉진하는 방향으로 산업정책을 전개하였다. 특히 정부의 각종 규제와 인·허가 사항을 담고 있는 개별 공업육성법을 <공업발전법>으로 바꾸고, 조세·금융지원을 산업별에서 기능별로 전환한 것은 경제개방화와 민간자율화에 걸맞는 바람직스러운 산업정책 전환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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