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서윤(庶尹) 홍익한(洪翼漢), 교리 윤집(尹集), 오달제(吳達濟)가 바로 이들이다.
1636년(인조 14)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선을 속국시하는 모욕적인 조건을 제시해오자, 윤집 · 오달제 · 홍익한은 이 사신들을 죽여 모독을 씻자고 주장하였다. 이듬해 인조가 삼전도(三田渡) 굴욕을 겪으면서 화의가 성립되자 청나라의 요구로 이들 세 사람은 봉림대군(鳳林大君)과 함께 청나라로 붙잡혀갔다.
홍익한은 1637년 2월 초 청군이 회군하는 길에 평양에서 잡혀 25일에 심양(瀋陽)에 이르렀다. 그리고 윤집 · 오달제는 청군의 진(陣) 뒤에 있어서 그 해 4월 15일에야 심양에 이르렀다. 19일 용골대(龍骨大)가 왕명으로 이들에게 가족과 함께 청나라에서 살기를 권유하자,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윤집과 오달제는 서문(西門) 밖에서 처형당하였다. 홍익한은 10일에 이미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고, 윤집과 오달제와 함께 처형당했다는 설도 있다. 한편, 이들이 처형을 당하기 전 청 태종이 친히 국문했는데, 여기서 홍익한은 국문에 당당히 맞서 척화의 대의를 밝히고 나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더 이상 못함을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또한, 윤집도 청 태종의 회유에 완강히 거부, 몸바쳐 나라를 구하려 했던 뜻은 죽어도 떳떳하다는 기개를 보였다. 이에 태종도 이들의 기개에 오히려 감탄해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들의 충의와 대절을 기리기 위해 정문(旌門)을 내렸다. 그리고 홍익한에게는 충정(忠正), 윤집에게는 충정(忠貞), 오달제에게는 충렬(忠烈)이라는 시호가 각각 내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