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5년(성종 14) 이전의 어사도성(御史都省)이 개칭된 것이다. 어사도성의 전신에 대해서는 『삼국사기』가 고려 초의 내봉성(內奉省)으로, 『고려사』·『고려사절요』가 광평성(廣評省)으로 각각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학계에서는 대체로 『삼국사기』의 기록을 따르고 있다.
관원으로는 상서령(尙書令, 종1품) 1인, 좌우복야(左右僕射, 정2품) 각 1인, 지성사(知省事, 종2품) 1인, 좌우승(左右丞, 종3품) 각 1인, 좌우사낭중(左右司郎中, 정5품) 각 1인, 좌우사원외랑(左右司員外郎, 정6품) 각 1인, 도사(都事, 종7품) 2인이 있었다.
그리고 주사(主事) 4인, 영사(令史) 6인, 서령사(書令史) 6인, 기관(記官) 20인, 산사(算士) 1인, 직성(直省) 2인 등 이속(吏屬)이 있었다.
이 가운데 상서령은 종친에게 제수하는 허직(虛職)이었으므로, 좌우복야가 실질적인 장관의 역할을 하였다. 그 아래로 승·낭중·원외랑 등이 좌우로 나누어져 기구 전체가 좌사(左司)와 우사(右司)의 이원적인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한편, 고려의 상서성제도가 표본으로 하고 있는 당제(唐制)의 경우에도 상서성의 상층관서로서 도당(都堂)이 두어지고 그 아래 좌우사의 구분이 있었다. 그러나 이부·호부·예부를 좌사에, 병부·형부·공부를 우사에 소속시켜 도당이 상서6부를 직접 관할하는 행정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에서는 좌우복야와 지성사가 품질(品秩)로는 재추의 반열에 있지만, 실제로는 허직 또는 한직(閑職)으로 운영되어 재추에 포함되지 못하였다. 더욱이 중서문하성의 재신(宰臣)과 추밀원의 추신(樞臣)이 재추로서 상서6부의 판사와 상서를 각각 겸임하였다. 이 때문에 상서6부의 독립성이 강화됨으로써 도성이 상서6부를 직접 관할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 기능은 상서6부와 지방 주현 사이의 공첩(公牒)을 중계하거나, 의형(議刑)·영조(迎詔)·재계(齋戒)·기우(祈雨)·과거 등 국가행사를 주관하는 사무기관에 그치게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원나라의 압력으로 고려 관제가 격하될 때 첨의부(僉議府)에 병합되면서 폐지되었다.
그리고 1298년(충렬왕 24) 충선왕에 의해 도첨의부(都僉議府)의 별청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곧 폐지되었다. 그 뒤 1356년(공민왕 5) 관제가 문종관제로 환원될 때 다시 설치되었다가 1362년에 폐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