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7월 서이균(徐利均) 등이 결성한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上海韓人獨立運動靑年同盟)을 1932년 1월 발전적으로 해체해 결성하였다. 그리고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여당으로서 송병조(宋秉祚)가 이사장으로 있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의 청년당 성격을 띠고 있었다.
본부는 상해 프랑스 조계(租界) 안에 있었고, 결성 목적은 조국의 완전독립을 위해 한국청년의 단체적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혁명역량을 총집결하는 데 있었다.
임시 이사장에는 한영려(韓英麗)가 선임되었고, 이사에는 이규서(李圭瑞)·연충렬(延忠烈)·서재현·김석 등이 선출되었다. 1932년 4월 이사진이 개편되어 김석이 이사장에 선임되었으며, 이사에는 송진균(宋鎭均)·김덕근(金德根)·왕철부(王鐵夫) 등이 선출되었다.
유상근(柳相根)·최흥식(崔興植) 등 당원 4명은 1932년 4월 일제의 주요기관 파괴와 밀정·주구 숙청을 단행하기 위해 국내와 만주국에 잠입했다가 붙잡혔다.
같은 달 29일 상해 훙커우공원(虹口公園)에서 윤봉길(尹奉吉)의 투탄의거(投彈義擧)가 일어나, 본부는 상해를 떠나 피신해야 하였다. 이 때 이사장 김석은 항저우(杭州)로 피신하였다.
한편, 1933년 1월 이 당의 간부였던 이규서·연충렬이 일본관헌의 밀정이라는 혐의를 받고 김구파(金九派)에 의해 난징(南京) 부근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다.
다른 당원들도 이즈음 모두 흩어지거나 붙잡혀 당의 활동이 부진하던 중 김석은 다시 상해로 돌아와 당을 다시 복구하려고 활동하다가, 1933년 11월 일본총영사관 경찰에 붙잡혀 당의 조직은 사실상 와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