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은 고려 태조 이래 개경과 비슷한 비중으로 중시되었는데, 인종 때의 묘청(妙淸)의 난과 무신집권 초기의 조위총(趙位寵)의 난 이후 서경의 위치는 개경에 비하여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 무렵 회음진(懷音謓) 별장(別將)이 서경에 모반자가 있다고 고발하므로 병마사가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고 고해 바친 자를 서울로 압송하였다. 그러나 1228년회음진의 도령(都領) 희간(希幹)이 그 모반자를 잡아 고발하였다.
이 모반사건은 그 기록이 자세하지 않아 그 규모를 알 수 없으나, 그 해 청새진(淸塞鎭 : 熙川郡)의 호장(戶長)이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병마사 채송년(蔡松年)에게 잡혀 죽은 사실 등을 보면, 서경인의 모반도 외적의 침입으로 사회가 혼란한 틈을 타고 일어난 무신정권에 대한 서북인의 불만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서경에 모반자가 있다는 고발이 있자 당시의 집권자 최우(崔瑀)는 서북계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하여 고발자에게 금의(錦衣)ㆍ금대(金帶)ㆍ양마(良馬)와 능라견(綾羅絹) 50필, 명주와 모시 각 10필, 쌀 30석을 상으로 주고, 또 왕에게 아뢰어 구마(廐馬) 1필, 능라견 40필, 명주 100필, 베 200필을 상으로 주고, 희간에게는 채백(綵帛) 40필과 구마 1필을 하사하였는데, 이로 보아 조정에서는 서북인들의 동태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서북인의 반란은 없어졌지만, 결국 1270년 몽고가 서경에 동녕부(東寧府)를 설치한 것도 조정에 대한 서경인의 반발이 이를 가능하게 하였다고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