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대구(大丘). 자는 행옥(行玉). 서홍리(徐弘履)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서문준(徐文濬)이고, 아버지는 한성부서윤 서종적(徐宗積)이다.
1723년(경종 3)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들어가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고, 1730년(영조 6)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에 재직 중 과격한 소를 올렸다가 파직, 1734년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에 다시 등용되었다. 그 해 5월 당론이 다시 고개드는 것을 지적하고, 왕명에 따라 서읍(西邑)을 다녀와 압록강 국경지역을 불법으로 넘나드는 일과 관리들의 치적을 논하고, 황당선(荒唐船) 출몰에 대한 방어와 그들을 물리쳐 없앨 것을 상소하였다.
1737년 사간, 1739년 의주부윤, 1741년 승정원승지를 역임하고, 1745년 대사간을 거쳐, 1747년 나주목사로 나가 장항포(獐項浦)의 착굴(穿掘)에 따르는 폐단을 거론하였다.
1749년 도승지로 있으면서 임인사화 때 죽은 김성행(金省行)·백망(白望)·장세상(張世相)·묵세(墨世) 등의 증관설원(贈官雪寃: 관직의 추증과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을 요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