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산교단의 한 분파인 용화교(龍華敎)의 창시자. 전라남도 구례 출생. 11세 때 출가하여 15년간 수도생활을 하면서 전국의 사찰을 두루 돌아다녔다.
1931년구례군 간문면 구고미에서 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라는 간판을 걸고 미륵불교를 포교하였다. 이어 1933년에는 구례군에 구성사(九聖寺)를 짓고 각지에 포교소를 설치하였으며, 1947년에는 지리산에 상불사(上佛寺)를 짓고 용화교를 창립했다.
1950년에는 전주시 완산동에 원각사(圓覺寺)를 세우고 완주군 우전면에는 남일사(南一寺)를 세웠다. 특히 김제군 금산면 청도리에 용화사(龍華寺)를 건립하고 전국의 신도들에게 후천개벽시에 살아 남을 곳이 이곳을 중심으로 한 30리 안이라고 설교하여, 경상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수백 세대의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는 미륵불로 태어난 강증산(姜甑山)이 신비한 죽음을 가장했지만 실제로는 살아 있어서 지리산 등지에서 자신에게 도통을 전수하였으며, 곧 다시 출세한다고 주장하는 한편, 자신을 신격화해서 장차 용화세계를 주도할 인물이라고 선전하였다.
또 그는 용화세상이 오기 전에 인류는 괴병과 병겁 때문에 커다란 시련을 겪게 될 것인데, 갑진(1964)년에서 무신(1968)년 사이에 발생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당시 교세가 급성장하자 금품 사취와 부녀자 농락 등의 소문이 끊이지 않았고 1961년에는 여신도들의 고발로, 보호자 간음죄로 1년 6개월의 선고를 받고 복역하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결국 그는 소윤하(蘇潤夏)라는 젊은 신도의 칼에 맞아 1966년 3월에 사망했다. 교주가 죽자 대부분의 신도들은 흩어진 것으로 보이며, 용화세계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려는 나머지 신도들이 교명을 대한불교용화종으로 바꾸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