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가락동 유적 (서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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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집터와 널무덤 · 돌방무덤 관련 복합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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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울특별시 송파구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집터와 널무덤 · 돌방무덤 관련 복합유적.
내용

가락동·석촌동·방이동 고분군은 토광묘(土壙墓)·옹관묘(甕棺墓)·석실분(石室墳)·적석총(積石塚) 등 백제 초기 고분을 연구하는 데 더 없이 중요한 유적이다.

이 일대에는 서울특별시 광진구 중곡동(中谷洞) 아차산성(峨嵯山城), 송파구 몽촌토성(夢村土城), 풍납리토성,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사지(春宮里寺址) 등의 유적이 산재해 있다. 그리고 강동구 암사동·명일동·고덕동과 송파구 가락동 및 강남구 논현동 등지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인들의 유적지로서 빗살무늬토기와 민무늬토기가 대량으로 출토되고 있다. 따라서 가히 한반도의 선사시대로부터 삼국시대까지의 유적의 보고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역 소재의 백제 초기 고분에 관해서 최초의 학술조사는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한 극히 간략한 보고서가 있을 뿐이다. 그 뒤 1969년 8월고려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가락동 제1·2호분이 조사되었고, 1974년서울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제3호분이, 같은 시기에 이화여자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제4·5호분이, 같은 시기에 단국대학교 발굴조사단에 의해 제6호분 발굴 조사되었다.

[제1호분]

제1호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석촌동 대청황제공덕비(大淸皇帝功德碑, 일명 三田渡碑)의 원위치에서 서쪽으로 약 500m 떨어진 평지의 논 가운데에 있다. 분형(墳形)은 방대형(方臺形)으로 심하게 깎인 기저부(基底部)가 일정치 않으나 긴 변은 약 14m, 높이 약 1.89m이다. 내부구조는 지표면을 얕게 파서 토광을 만들고 그 바닥에 4개의 냇돌[河川石]로 목관의 각 모퉁이를 괸 토광묘이다.

철기류의 부장품이 있었던 듯하나 지하수의 용출(湧出)로 부식이 심해 발굴 당시 그 형태를 볼 수 없었으며 수습도 불가능하였다.

[제2호분]

제2호분은 제1호분의 동남쪽 10m 지점에 있다. 외관상으로는 원형이나 실측결과 방형분(方形墳)으로 판정되었다. 기저부의 각 변은 12m×15m, 높이 약 2.2m이다.

이 제2호분은 4기의 분묘를 인접해서 축조하고 이 4기의 분묘를 다시 하나의 봉토로 덮은 것이 특이하다. 즉, 봉분 중앙부에서 북쪽으로 약 3m, 봉토 표면 아래 약 1m 위치에 단옹관묘(單甕棺墓)가 있고, 그 남쪽에 토광묘(土壙墓), 여기서 동쪽 약 1m 떨어져 또 하나의 토광묘가 있으며, 단옹관묘의 동남쪽에 목관을 안치한 토광묘가 있다.

출토유물로는 단옹관묘에서 완형(完形) 단경광구(短頸壙口) 흑색 토기 1점과 완파된 단경광구 흑색 토기 1점이 수습되어 발굴 후에 완전복원이 되었다. 목관을 안치한 토광묘에서는 회색 경질(硬質) 토기 2점, 꺾쇠 6점이 출토되었으며, 남쪽 2기의 토광묘 중 장방형 토광묘에서는 완형 회색 경질 토기 2점이, 그리고 다른 토광묘에서 소철도(小鐵刀)·교구(鉸具)가 각 1점씩 수습되었다. 이 밖에도 4기를 하나로 덮은 봉토 아래에서 철모(鐵鉾) 1점과 다수의 토기편이 발견되었다.

옹관묘가 한강유역에서 출토된 사실은 한반도 옹관묘의 전래과정(경로)을 밝히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었다. 또 옹관의 크기로 보아 세골장(洗骨葬)인 이중장제(二重葬制)가 백제 초기에도 행해졌음이 밝혀졌다.

목관을 내부주체로 한 토광묘는 옹관묘보다 시대가 앞선다. 즙석(葺石)을 깐 분구(墳丘)는 고구려·백제·가야지역에서도 조사되었으므로, 지배층인 피장자(被葬者)는 북에서 남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며, 청동기시대에서 삼국시대 고분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묘제(墓制)라고 할 수 있다.

[제3호분]

제3호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산 77-1, 해발 39m의 얕은 구릉 경사면에 있다. 채석(採石)·경작(耕作) 등으로 유실이 심하고 주위는 야채의 경작지로 이용되고 있다. 구릉의 경사면을 파고 들어가 구축한 방형(方形)의 석실분으로 석실 남벽에 길이 2.9m, 너비 1.3m의 장방형의 연도(羨道)가 있다. 현실 내에서 시상대(屍床臺) 등의 시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출토유물로는 두 사람 분의 뼈가 부식, 교란된 채로 발견되었다. 또 여러 점의 쇠못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매장 때 목관(木棺)을 사용한 듯하다. 그 밖에 암회색 경질 반구형(半球形)의 완형토기 뚜껑 4점과 암회색 경질 무문(無文)의 몸체에 굽이 있는 완(盌: 주발) 1점, 회색 경질 단경호형(短頸壺形) 토기 1점, 쇠못 여러 점 등이 수습되었다.

[제4호분]

제4호분은 서울특별시 송파구 가락동 산 76-1, 야산 능선 위 남향 경사면 서편에 있다. 도굴로 인해 많이 파괴되었으나 조사 실측한 결과, 봉토 밑지름 약 18m, 높이 3.5m의 원형분으로 밝혀졌다.

출토유물로는 지름 8.5㎝, 두께 3.2㎝, 중앙 구멍 지름 2㎝의 반파된 석제 방추차(紡錘車) 1점과 길이 10㎝, 너비 4㎝, 두께 1.5㎝로 양면에 마연(磨硏)한 흔적이 있는 착형(鑿形) 석기 1점, 무문후육토기편, 회청색 경질토기편, 승석문(繩蓆文) 회황색 연질백제토기편 등이 발견되었으나 모두 복원이 불가능한 것들이다. 이러한 출토 유물들은 제4호분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 고분이 이미 도굴된 것으로 주위에 선사 유적지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제5호분]

제5호분은 제4호분에서 동남쪽으로 22m 떨어진 곳에 있다. 남북 2.8m, 동서 2.25m, 높이 1.7m의 방형석실이 있는 석실분으로, 관대(棺臺)나 시상(屍床)같은 시설은 확인할 수 없었다.

출토유물로는 지름 1.9㎝, 두께 0.5㎝에 약 1㎝의 고리가 붙어 있는 금동환(金銅鐶) 4점이 현실 중앙부 자갈층에서 수습되었다. 현실 동남부 자갈층에서는 길이 13.7㎝, 너비 1.3㎝의 철제칼 1점이 출토되었는데 자루에 목질(木質)이 붙어 있었다. 이 밖에도 기와편과 토기편이 수습되었다.

[제6호분]

제6호분은 제5호분 동북쪽 8m 떨어진 곳에 있다. 완전히 파괴된 고분으로 석실 바닥 부분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실 바닥은 동서 2.23m, 남북 1.9m의 장방형인데 심하게 파괴되어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석실분을 중앙에 두고 반경 5.25m 주위에 원주석렬(圓周石列)이 놓여져 있는데, 이것을 호석(護石)으로 본다면 이 지역에서 유일하게 호석을 두른 석실분이다. 이것은 신라 초기고분 호석과의 관계를 밝혀줄 귀중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 무덤에서는 석착(石鑿)·무문후육토기편·이단유경석촉(二段有莖石鏃)·반월형석도편(半月形石刀片) 등이 발굴조사과정에서 출토되었다. 그러나 부근에 무문토기 시기의 유적지가 많이 있는 점으로 보아 직접 관계가 없는 유물들로 보인다. 그러나 여기서 출토된 타인문(打印紋) 회색토기편들은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여, 고분의 축성시기도 이 시기로 추정할 수 있다.

주거지의 발굴은 1963년 6월 2일부터 9일까지 고려대학교박물관에 의해 행해졌다. 집터는 표고 약 40m의 안산(安山)이라고 불리는 구릉 위에 있다. 본래의 지면은 남쪽이 약간 높고, 북쪽이 낮기 때문에 집터는 남쪽을 지표에서 약 30㎝, 북쪽을 약 10㎝ 가량 파서 바닥을 평평하게 해 집을 지었다.

(1) 구조

집자리의 규모는 동서 길이 10m, 남북 너비 7m의 장방형을 이루었다. 집을 지을 때의 기둥 구멍은 발견되지 않아 집 구조는 분명히 알 수 없으나, 이와 같은 규모는 당시의 집터로서는 비교적 큰 것임을 알 수 있다.

(2) 유물

이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은 석기로는 낫[鎌]·화살촉·첨두기(尖頭器)·방추차(紡錘車)·숫돌 등이 있고, 토기에는 파편을 복원해 형태를 알 수 있는 것은 단지모양[壺形] 토기 2점, 화분모양 토기 3점, 접시 1점, 기타 파편 등이 있다.

낫은 길이 12.6㎝, 너비는 가장 넓은 곳이 3.9㎝이며, 점판암(粘板岩)을 갈아서 만든 농구로 농경생활을 증명하는 중요한 도구이다. 화살촉은 밑이 안쪽으로 굽었고, 몸의 단면이 편평(扁平) 6각형의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청동 화살촉을 본뜬 것으로 그 연대를 짐작하게하는 것이다. 길이 3㎝, 두께 0.2∼0.3㎝이다. 이러한 형식의 화살촉은 인접한 명일동 주거지에서도 4점이 출토되었다. 푸른 빛의 퇴적암(堆積岩)을 갈아서 정교하게 만든 것이다.

첨두기는 역시 퇴적암을 갈아서 만든 것으로 6모를 이루었다. 길이 5㎝로 양쪽 끝이 부러졌으며, 송곳과 같은 용도에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방추차 2점은 모두 푸른 빛을 띤 반암(斑岩)을 갈아서 만든 것인데, 하나는 완형이고, 다른 하나는 반편뿐이다. 완형의 것은 지름이 5.4㎝이고, 반편의 것은 5.5㎝이다.

숫돌은 현재 양쪽 끝이 부러졌는데, 제일 긴 부분이 5.2㎝로서 비교적 작은 것이다. 석영질(石英質) 돌로 만든 것으로 석질이 대단히 단단하다. 이 밖에 유적의 부근에서 채집한 것으로 단면이 6각형이며 붉은 빛을 띤 규장암(硅長岩)으로 만든 한 면에 간 자국이 있는 완형도 있다.

토기는 상기한 바와 같이, 크게 단지형 토기와 화분형 토기의 두 형태로 구분된다. 단지형 토기는 곧은 짧은 목을 가지고, 어깨 또는 배 부분이 구형(球形)을 이룬 것이며, 화분형 토기는 동체(胴體)가 위로 벌어져 아가리 지름이 동체의 지름보다 큰 것을 말한다. 화분형 토기는 큰 것은 독모양[甕形] 토기, 또는 심발형(深鉢形) 토기라고도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형태의 토기는 무문토기문화에 있어서 반드시 수반되는 것이 특색이다. 그리고 바닥이 반드시 평저인데, 상체에 비해 대단히 작아서 불안정한 형태인 것이 또한 특색이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바닥의 너비가 넓어진다.

가락동 유적의 토기 중 화분형 토기는 입술부분[口緣部]을 두 겹으로 하고, 그 두 겹의 아래 끝부분을 손가락으로 눌러 붙이거나, 주걱같은 것으로 사선(斜線)을 그어 장식화한 것이 특징이다.

(3) 토기의 계통 및 연대

이와 같은 가락동 유적의 토기는 한반도 서북지방의 팽이형 토기문화의 전통을 받은 것이며, 토기의 형태로 보아 팽이형 토기문화가 중부지방에서 변화한 형태이다. 이것을 가락식 토기라고도 한다. 이 유적에서는 청동기는 발견되지 않았으나, 토기와 석기의 형태로 보아, 연대는 청동기시대의 것이며, 무문토기 문화의 전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보고』(잠실지구유적발굴조사단, 1975·1976)
「가악리백제고분(可樂里百濟古墳) 제1·2호발굴조사보고」(윤세영, 『고고학』3, 1974)
「광주가악리주거지발굴보고」(김정학, 『고문화』2, 1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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