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특별시 (서울)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
남산에서 바라본 서울시
인문지리
지명/행정지명ˑ마을
대한민국의 수도.
이칭
이칭
서벌(徐伐), 서나벌(徐那伐), 서라벌(徐羅伐), 서야벌(徐耶伐), 한성, 한양
정의
대한민국의 수도.
개관

한반도의 거의 중앙에 위치하며, 대한민국의 정치 · 경제 · 문화 · 교통의 중심지이다. 동쪽은 경기도 남양주시 · 구리시 · 하남시,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 · 김포시 · 부천시, 남쪽은 경기도 성남시 · 과천시 · 안양시 · 광명시, 북쪽은 경기도 의정부시 · 양주시에 접해 있다. 위치는 동경 126°45'∼127°11', 북위 37°25'∼37°41'이다. 면적은 605.21㎢이고, 인구는 1002만 2181명(2015년 현재)이다. 행정구역으로는 25개 구, 423개 행정동(467개 법정동)이 있다. 시청은 서울특별시 중구 태평로1가에 있다.

자연환경

우리나라 4대 하천의 하나인 한강 하류에 있는 서울의 기반암은 주로 화강암과 편마암으로, 지형과 토양 등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강북 지역의 서부에는 주로 호상편마암(縞狀片麻岩)이, 동부에는 대보화강암(大寶花崗岩)이 분포한다. 강남 지역의 동부에는 호상편마암이, 서부에는 대보화강암 또는 화강편마암과 편암이 혼재되어 있다.

한강을 중심으로 강북과 강남으로 분리되며, 강북은 한북정맥의 끝자락인 도봉산과 삼각산(북한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줄기와 그 사이의 계곡에 도시가 발달하였으며 북고 남저의 지형으로 청계천과 중랑천, 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강남은 한남정맥의 끝자락인 청량산과 관악산 북쪽 기슭에 주거지가 발달하였으며 남고북저의 지형으로 탄천 · 양재천 · 도림천 · 안양천과 한강이 만나는 지역에 충적평야가 발달하였다.

서울분지는 남쪽과 북쪽의 산으로부터 뻗어 내린 산기슭이 점차 낮아지고, 사이사이의 골짜기로 흘러내리는 작은 하천이 모여 청계천(淸溪川)을 이루어 동류하다가 정릉천과 중랑천을 만나 한강으로 흘러든다. 뻗어 내린 산각(山脚)이 여러 줄기이므로 도성 내에 여러 고개가 있었으며, 그로 인한 지명이 여러 곳에 남아 있다.

북쪽에 삼각산(三角山 또는 北漢山 · 華山, 837m), 서쪽에 효경산(孝敬山, 236m), 남쪽에 관악산(冠岳山, 629m), 동쪽에 용마봉(龍馬峰, 348m) 등의 외사산(外四山)으로 둘러싸여 있다. 한편 1392년 한양천도 당시 서울의 산세는 북쪽에 백악산(白嶽山, 또는 北嶽山, 342m), 남쪽에 목멱산(木覓山 또는 南山, 262m), 동쪽에 낙타산(駱駝山, 또는 駱山, 111m), 서쪽에 인왕산(仁王山, 338m) 등의 내사산(內四山)으로 둘러싸인 분지였으며, 청계천을 내명당수, 한강을 외명당수로 하였다.

삼각산은 도봉산(道峰山, 717m) 지역을 포함하여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백운봉(白雲峰, 837m), 인수봉(仁壽峰, 811m), 만경봉(萬景峰, 799m), 노적봉(露積峰, 716m), 남장대(南將臺, 715m) 등 600m를 넘는 고봉들이 솟아 있으며, 보현봉(普賢峰), 문수봉(文殊峰), 비봉(碑峰)과 형제봉(兄弟峰)으로 이어져 있고 다시 북악산으로 이어진다. 동쪽에는 수락산(水落山, 638m), 불암산(佛巖山, 500m), 아차산(峨嵯山, 287m), 구릉산(九陵山, 178m) 등이 경기도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 산들은 화강암으로 되어 있으며, 오랜 풍화작용을 받아 화강암 특유의 지형을 이루고 있다.

강북 지역에는 청계천 외에 서쪽의 불광천(佛光川), 홍제천(弘濟川, 또는 沙川), 만초천(蔓草川) 등과 동쪽의 중랑천(中浪川), 정릉천(貞陵川), 안암천(安巖川, 또는 城北川) 등이 흘러 넓은 충적지를 이루고 있다. 한강은 양수리(兩水里)에서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며, 팔당(八堂)을 지나면서부터 자유사행(自由蛇行)을 한다.

한강의 공격사면부는 워커힐 · 옥수(玉水) · 노량진(鷺梁津) 등에 절벽을 이루나, 퇴적사면부는 미사(渼沙) · 토평(土坪) · 신사(新沙) · 반포(盤浦) · 행주(幸州) · 신평(新坪) 등에 넓은 범람원을 이루고 뚝섬 · 잠실(蠶室) · 여의도(汝矣島) · 난지도(蘭芝島) 등에 하중도(河中島)를 형성하였다. 이들 지역은 1960년대까지는 모래땅이었으나 1970년대에 대부분 도시화되었다.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강 양안이 깨끗이 정비되고 고수부지는 시민공원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강남 지역의 동남부와 서남부는 충적지나 낮은 구릉지로서 거의 평탄하지만, 청량산과 구룡산 · 대모산의 산릉이 북쪽으로 뻗어있으며, 남쪽에는 비교적 높은 관악산과 청계산(淸溪山, 493m)이 있다. 이들 산지 사이로 흐르는 고덕천(高德川), 탄천(炭川), 양재천(良才川), 반포천(盤浦川), 도림천(道林川), 안양천(安養川) 등은 좁은 충적지를 이루며 한강으로 흘러든다.

기후는 남부지방의 난대성 기후와 북부지방의 한랭한 기후의 중간인 점이적 특색을 나타낸다. 연평균 기온은 12.1℃이며, 1월 평균기온 -2.5℃, 7월 평균기온 25.3℃로 겨울이 춥고 여름이 더운 대륙성 기후를 나타낸다. 연 강수량은 1,358.4㎜이며 대부분이 여름철에 집중된다. 7월은 장마전선의 북상으로 장마철이 되어 많은 비가 내린다. 이때 한강이 범람하면 심한 수해를 입기도 한다.

최근 도시가 성장함에 따라 ‘열섬(heat island)’과 ‘도시풍(都市風)’ 등의 특유한 도시기후가 형성되는데, 서울에서도 고온지역이 도심에 나타나며, 도심과 교외지역 간의 기온차가 관측일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1983년 1월 22일 07시 30분의 관측에서 뚜렷한 열섬현상이 나타났으며, 기온차는 9℃였다.) 일반적인 기류는 도심으로 수렴되며, 산을 우회해 골짜기와 평지로 흐른다.

서울 지방 수평적 삼림대는 온대림에 속하며, 수직적 삼림대는 산지대 또는 구릉지대에 포함된다. 이에 따른 특징 수종으로 때죽나무 · 상수리나무 · 졸참나무 · 신갈나무 · 음나무 · 물푸레나무 · 박달나무류가 있으며, 이곳에 전나무 · 소나무 · 향나무가 나고 있다. 서울 지역은 도시화에 의한 주변의 산지와 창덕궁 후원과 종묘 등 궁궐과 왕릉 지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식생이 파괴되어 임상(林相)이 극히 빈약한 편이다. 일반적으로 산지에 많은 수종은 소나무이며, 상수리나무 · 굴참나무 · 갈참나무 · 개암나무 등도 널리 분포한다.

또한 중요한 초목의 군락으로는 솔새 · 억새 · 우산나물 · 단풍취 · 산새풀 · 둥글래 등이 있다. 산록과 들판에는 제비꽃 · 할미꽃 · 양지꽃 · 민들레 · 구절초 · 질경이 · 강아지풀 등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한편 동물상으로는 북한산국립공원에 소쩍새 · 큰오색딱다구리 · 후투티 등의 새와 개구리 · 도롱뇽 · 살모사 등의 양서류 및 파충류, 너구리 · 족제비 · 다람쥐 · 청설모 등의 포유류가 관찰된다. 그러나 서울 도심의 땅에서는 지렁이와 땅강아지 등을 찾아볼 수 없고, 분해자인 미생물도 그 수가 줄어 낙엽이 잘 분해되지 않는 실상이다. 자연환경의 보호가 인간생활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는 시대를 맞고 있다.

역사

서울이라는 명칭은 『삼국사기』 ·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보이는 서벌(徐伐) · 서나벌(徐那伐) · 서라벌(徐羅伐) · 서야벌(徐耶伐) 등에서 비롯되어 변천된 것으로, 이러한 칭호는 신라 초기 도읍지의 지명인 동시에 국명이기도 하였다.

『삼국지』 등 중국 사서에 보이는 사로(斯盧) · 사라(斯羅) · 신로(新盧) 등의 국명도 ‘서울’과 같은 음훈(音訓)으로, 서벌 · 서라벌 등의 다른 표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백제의 도읍을 소부리(所夫里)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서울’의 본래의 뜻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설(異說)이 있지만, 서(徐) · 서나(徐那) · 서라(徐羅)는 높고[高] 신령(神靈)하다는 우리말 ‘수리’ · ‘솔’ · ‘솟’의 음사(音寫)이고, 벌(伐)은 들판을 의미하는 우리말 ‘벌’의 음사이다. 따라서 ‘서울’, 즉 서벌 · 서나벌 · 서라벌은 상읍(上邑) 또는 수도(首都)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고대

중랑천변의 면목동 유적에 보듯이 서울 지역에는 구석기 시대부터 이미 인류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외 강동구 암사동, 송파구 가락동, 강남구 역삼동과 성동구 응봉 등지에서 구석기 유물이 지표에서 발견되었다. 이어 한강 유역의 신석기 유적은 지금까지 140여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이 가운데 서울지역의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정식 발굴된 암사동 유적은 그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함께 주목을 끈다. 암사동 유적은 한강유역의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것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적이다. 이 유적은 한강변 사질퇴적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20여 채의 움집터와 그 부속시설이 확인되었다. 그 연대는 기원전 3천~4천년으로 지금부터 5천~6천년 전의 유적으로 알려졌다.

신석기문화를 이어 기원전 10세기경 청동기문화가 전개되면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였다. 이 청동기문화는 무문토기(민토기)와 함께 전개되었으며, 이들 무문토기인들은 처음으로 청동기를 사용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직접조상으로 확인되고 있다.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강유역에 청동기문화가 발달한 시기는 확실하지 않지만, 대체로 기원전 7세기 이전에 성립하여 기원전 3세기 말 내지 기원전 2세기 초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강 유역의 무문토기는 3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먼저 한반도 동북지방과 서북지방의 직접적인 무문토기 문화의 유입기와 이들 양 지역 문화의 혼합기, 그리고 자체적인 독특한 문화의 성립기로 구분된다.

이 시기에 해당하는 서울 지방의 청동기유적은 역삼동 움집터(매봉터널위), 가락동 움집터, 가락동 4·5호 움집터, 응봉 유적, 아차산 유적 등이 있다. 그리고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묘제(墓制)로 고인돌[支石墓]과 석관묘(石棺墓)를 들 수 있다. 고인돌은 군장(君長)의 무덤으로 보여지는데, 그 형식으로는 탁자식(卓子式)과 개석식(蓋石式, 碁盤式)이 있으며, 경계 표지나 신앙의 대상이던 입석(立石)과 함께 거석문화(巨石文化)로 알려져 있다. 서울지역에서는 정릉동 · 양재동 · 개포동 · 원지동 · 고척동 등지에 개석식 고인돌이 흩어져 있었으나, 정식 발굴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도시개발에 따라 유적으로 보존되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

한편 한강 유역에서 조사 보고된 집자리는 강안(江岸) 대지(臺地)에 위치한 미사리 · 신매리 움집터 등의 10여개의 유적이 있으나 대부분 구릉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비록 구릉지대나 산의 경사면(傾斜面)에 위치하고 있다 하더라도, 주위의 하천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이 같은 사실은 생활용수와 본격적으로 성행된 잡곡 농경, 벼농사 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나아가 농경의 발전과 금속기(金屬器)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가를 가져 왔고, 잉여생산물의 분배과정에서 원시공산체(原始共産體) 사회의 평등사회는 붕괴되고, 최초의 계급이 발생하였다. 즉 사유재산제에 따른 재산상의 빈부 차이 및 정복전쟁을 통한 지배 피지배계급이 형성되고, 부(富)와 권력을 가진 계층이 등장함으로써 정치조직이 형성되었으며, 이는 군장사회로 발전하기에 이르렀다.

기원전 3세기말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는 한반도에 철기문화가 전래되어 각 지역에서 성읍국가(城邑國家)가 성립되고, 그 중 일부는 연맹왕국(聯盟王國)으로 발전하였다. 즉 북방에서는 고조선 · 부여 · 고구려가 정치조직으로 발전하였고, 한강 유역 이남에서는 진국(辰國)과 마한 · 진한 · 변한의 삼한사회가 성립되었다. 그리고 이들 상호간에는 시간차를 가지면서 정복전쟁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삼국이 형성되었다.

삼국 중 가장 먼저 한강유역을 차지한 것은 백제였다. 백제는 부여족(扶餘族)의 이동과 분파 과정에서 형성된 부여계 유이민(流移民) 집단이 남하(南下)하여 한강 유역에 정착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들 고구려 동명왕의 아들인 온조계(溫祚系)로 대표되는 유이민 집단은 마한 등 인근 정치세력과 서로 싸우면서 연맹체를 형성하고 발전해 나갔다. 이들은 농경정착생활에 적합한 한강의 자연환경을 충분히 활용하여 생산 면에서 풍족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앞선 통치술과 우세한 생산도구를 바탕으로 주위세력을 압도했던 것이다. 이러한 백제의 정착은 한강 유역에 흩어져 있는 백제토성이나 고분(古墳)을 통하여 알 수 있으며, 역시 이 부근에서 발굴된 철기문화의 유물과 농경생활의 흔적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다.

한편 기원전 18년 온조가 도읍(都邑)한 위례성(慰禮城)이나 한성(漢城) 등에 대해서는 서울 · 광주(廣州) · 직산(稷山)에 위치했을 것이라는 각각의 의견들이 있다. 그런데 이 위례성은 기록을 통해 볼 때 하북위례성과 하남위례성으로 구분되는데, 하북위례성은 북한산 동쪽 기슭으로 미아리 · 수유리 일대로 보는 견해와 세검정 · 평창동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고, 하남위례성은 한강 남쪽 지금의 경기도 하남시 춘궁리 일대 속칭 '고골'이나 '교촌(校村)'으로 비정하기도 하며, 서울특별시 송파구 및 강동구 일대를 주목하기도 한다. 근래에 백제시대의 유적 발굴을 통하여 문헌 기록의 신뢰도를 한층 높여 주고 있는데, 송파구 일대의 석촌동 적석총(積石塚) 발굴, 풍납동 토성의 발굴, 그리고 양평군 문호리 · 양수리, 남양주군 금남리 적석총 유적 발굴을 통하여 고구려 유이민 집단이 백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특히 2002년 이후 풍납동 토성의 발굴 성과에 따라 하남위례성의 위치를 이곳에 비정하기도 한다.

위례성이라 칭한 도읍지는 하북 · 하남으로 이원화(二元化)되었으며, 이는 시간적으로 선후(先後)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구체적으로 도성의 위치가 정확히 어느 곳인가는 현재까지 명확히 밝혀져 있지 않지만, 오늘날의 서울 인근지방이었던 것이라는 주장에는 이의가 없다. 이러한 도읍지로서의 서울 지역은 삼국의 각축장(角逐場)이 되어 백제가 패배하여 웅주(熊州)로 도읍을 옮김으로써, 점차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다. 즉 396년에 고구려 광개토왕은 백제를 침공하여 한강 이북 58성(城) 700촌(村)을 취하여 백제 아신왕을 굴복시켰으며, 뒤이어 장수왕은 475년에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백제 수도인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전사(戰死)시켰다. 뿐만 아니라 태후 왕자들이 고구려 군사들에게 몰살당하고 포로로 8천여 명이 끌려갔다. 이에 개로왕의 아들 문주왕은 웅진(熊津)으로 도읍을 옮기니 한성의 궁궐 · 왕묘 터 · 주요 사찰 등은 황폐하게 되었으며, 특히 이곳 백제 인민은 포로로 끌려가거나 혹은 남은 왕실과 지배귀족을 따라 남하(南下)하였을 것이니, 이곳은 도읍으로의 면모를 완전히 잃어버렸을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후 동성왕 21년(499) 가뭄에 따른 기근으로 한산(漢山) 백성 2천여 명이 고구려에 망명하니, 이 지역의 공동화(空洞化) 현상이 빚어졌다 하겠다.

그리고 한강 유역 한성을 차지한 고구려는 77년간 이곳을 통치하면서 전방(前方) 전초기지(前哨基地)로서 북한산군(北漢山郡) 소속의 남평양(南平壤)을 설치하였다. 이로써 이곳은 통치주체가 바뀜에 따라 도성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전방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더욱이 나제(羅濟)연합군이 결성되어 한강 유역을 회복하고자 하는 전쟁이 계속되고, 급기야 신라 진흥왕이 백제가 수복한 한강 하류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옛 한성지역은 도읍지로서의 지위를 찾지 못하고 신라의 서북 변방지역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어 신라는 진흥왕에 의해 553년 이곳에 군사적 개척지로 신주(新州)를 설치하고, 557년에는 북한산주(北漢山州)를 설치하였다. 이어 남천주(南川州), 다시 북한산주 등을 설치하였는데, 이들 주(州)의 치소(治所)는 이천(利川) · 광주(廣州) 등으로 백제의 한성보다 남쪽에 위치하였다. 이는 아직 한강을 경계로 고구려와 신라의 전쟁이 계속되었고, 남쪽에서는 백제의 신라 침공이 계속되었기 때문이었다. 즉 7세기 초까지 삼국 간의 전쟁 상황이 계속되면서, 결과적으로는 백제 한성 지역의 도시 기능의 마비를 가져왔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삼국시대에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한 한강 하류유역은 이 지역의 경략(經略) 여부에 따라 각국의 흥망성쇠가 결정되었다는 필연성을 가짐으로써 역사적 중요성을 갖는다. 우선 정치 · 군사적인 면에서 백제 초기의 도읍지였다는 점 이외에 삼국 간의 군사적 쟁패지(爭覇地) 또는 삼국 통일의 완수를 위한 당나라 군사 축출의 최후 거점이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미가 있다.

또한 문화적인 면에서도 남북 문화권의 경계지로서, 그리고 중국 문화와의 접촉지로서 새로운 문화 개발의 전초지(前哨地)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크다. 이러한 삼국의 각축 과정에서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은 백제 도읍지로서의 인물과 시설이 거의 피폐된 듯 하며, 풍납동 토성 · 몽촌토성 · 방이동 고분군 · 석촌동 고분군 · 아차산성 · 사당동 백제요지(百濟窯址) 등의 일부 유적이 남아 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과 관련하여 아차산성의 고구려 보루 구조와 출토된 토기가 남아 있고,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 장의사지 당간지주와 장한성 · 호암산성 등 한강변 산성 체제를 볼 수 있다.

그후 685년 신라 신문왕이 통일된 국가를 9주(州) 5소경(小京)으로 나누어 정하고, 서울 지방을 포함한 주를 한산주(漢山州)라 하고, 그 치소를 광주(廣州)에 둠으로써 민정(民政) 조직을 갖추었는데, 그 이전에는 군사적 성격이 짙은 전략기지로 기능하였던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후 한산주는 757년(경덕왕 7)한주(漢州)로 고쳐지고, 지금의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漢陽郡)을 설치하는 등 군현제(郡縣制)를 실시하였으며, 한양군의 영현(領縣)으로 황양현(荒讓縣, 豊壤)과 우왕현(遇王縣, 幸州)이 있어 이를 관할하였다. 이로써 서울 지방은 도읍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지방 군현의 하나로 지방관이 관할하는 지방 행정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신라 말기에 들어 통치체제가 문란해지고, 지방에서는 각기 유력 세력들이 장군(將軍) · 성주(城主)를 칭하면서 독자세력을 구축하는 시대상황이 전개되자, 이곳 서울 지방도 신라의 직접적인 통치권에서 벗어난 것 같다. 이미 이곳은 822년(헌덕왕 14) 웅천주도독(熊川州都督) 김헌창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의 세력권에 편입되기도 하였으며, 825년에는 김헌창의 아들 범문이 또한 반란을 일으켜 이 지방을 도읍지로 정하고자 하여 북한산주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시대상황 속에서 후삼국시대가 전개되자 신라 통치영역에 있던 서울 지방은 태봉(泰封)의 궁예가 왕건으로 하여금 양주 · 견주(見州) 등을 공략하게 함으로써 이곳은 궁예의 세력권에 편제되었다.

즉 고려시대 이전까지의 서울 지방은 그 지역적 특성으로 백제 때의 위례성 등 도읍지가 되어 고대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역사적 경험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후 2세기가 넘게 전쟁의 중심지가 됨으로써 철저하게 도시 기능이 파괴되어 황폐화의 길을 걸었고, 따라서 이곳에는 그후 호족(豪族) 등 지역 중심세력이 성장하지 못하는 인문지리(人文地理)적 환경으로 전락되어, 그 도읍지로서의 경험이 다음 시대로 잇지 못했던 것이라고 판단되는 것이다.

그 예로 후백제의 견훤이 나주(羅州)를 통하여 왕건에게 귀부(歸附)하자 그를 상부(尙父)로 모시고 양주(楊州)를 식읍(食邑)으로 주고 있는데, 이는 양주가 태조 왕건 정권의 직할지(直轄地)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된다. 그리고 경종 원년에 전시과(田柴科)를 처음 시행할 때 전시과 지급 대상지역에 양주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이때까지 양주 지방에는 기득권을 가진 지방세력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반면에 서울 인근 광주(廣州), 금주(衿州), 파주(坡州), 이천(利川), 공암(孔巖) 등에는 호족의 성격을 띤 지방세력들이 웅거하였다.

고려

고려시대 서울 지방은 국초에는 양주(楊州), 문종 이후 충렬왕 때까지는 남경(南京), 충선왕 이후 고려 말까지는 한양이라 불리었다. 양주지방이 중앙정부에 의해 직접적인 지방통치체제로 편제된 것은 983년(성종 2)으로 전국에 12목(牧)을 설치하고 지방관(地方官)을 파견함에서 비롯되었다. 이미 광종 때 왕권강화책으로 왕실의 안정을 기하고 호족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지방에 대한 직접통치가 가능해졌다. 이어 경종 때 전시과를 실시하면서 양주를 비롯한 전시과 대상지역을 선정함으로써 지방관을 파견할 수 있는 배경을 마련하였다. 그 결과 향리제도(鄕吏制度)를 개정하고 지방관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1067년(문종 21) 양주에 서경(西京)동경(東京)과 더불어 삼경(三京)의 하나인 남경(南京)이 설치되었다. 그 설치 동기는 정치 · 경제 · 군사적인 중요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보다 지리도참사상(地理圖讖思想)에 근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지방행정상 한강의 북부지방은 남경이, 남부지방은 광주목(廣州牧)이 관할하였다. 그러나 도참사상에 따른 길조(吉兆)가 나타나지 않자 남경은 곧 폐지되었다가 숙종 때 다시 재건되고 궁궐이 신축되었다. 1101년(숙종 6) 9월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이 설치되고 남경의 궁궐 후보지를 물색하게 하였는데, 이때 보고된 곳은 지금 서울 동대문 밖의 노원(蘆原), 도봉산 아래의 해촌(海村) 방면, 한강 연안의 용산 방면, 면악(面岳) 남쪽인 지금의 경복궁 부근이었으며, 그 중 면악 남쪽이 우선으로 지목되었다. 이렇게 숙종 때 재건된 남경은 충렬왕 말기까지 약 2세기간 지속되었다. 즉 숙종에 이어 예종 · 인종 · 의종의 계속적인 남경 행차가 있었으며, 고종 때 강도(江都)로 피난 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의(御衣)를 남경 가궐(假闕)에 안치시키기도 하였다.

1308년(충렬왕 34) 즉위한 충선왕은 중앙과 지방의 관계를 개편하였는데, 이때 남경을 한양부(漢陽府)로 개편하면서 삼경제는 폐지되었다. 이때 한양부는 고양(高陽) · 양주 · 포천(抱川) 등 현재의 한강 이북 서울 지방과 그 주변 일대만 관할하였으며, 왕의 순주(巡駐)와 어의 안치 등은 사라지고 개경(開京)과 가깝기 때문에 국왕의 유행(遊幸)과 사냥터가 되었다. 그 예로 충숙왕은 1317년(충숙왕 4)에 한양에 가서 사냥하고, 1325년(충숙왕 12)에는 조국공주(曹國公主)와 더불어 유행하여 용산행궁(龍山行宮)에서 용산원자(龍山元子)를 낳았다. 이렇듯 한양부는 남경 때의 국가 기업(基業) 융성을 위한 순행처(巡幸處)가 아니라 단순 휴양지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 원(元)의 간섭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이 대두되면서 한양부는 다시 주목받게 되었다. 이는 공민왕의 배원(排元)정책에 따른 관제(官制)의 환원으로서의 남경의 부활과 남경 천도(遷都)계획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남경으로 환원은 치폐(置廢)를 거듭하고, 남경 천도는 당시 실천에 옮기지 못하였지만, 한강 유역의 서울 지방의 중요성이 다시 확인된 것이라 하겠다. 나아가 우왕 9년의 한양 천도 5개월, 1390년(공양왕 2)의 한양천도 5개월 등 실질적인 한양 천도는 조선왕조와 연계시켜 볼 때, 이미 풍수지리적으로나 군사 사회경제적으로 그 중요성이 더욱 두드러지는 점이라 하겠다.

오늘날 살펴볼 수 있는 고려시대의 문화유적으로는 북한산 승가사의 마애불과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좌상, 문수사,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 진관사(신혈사 유적), 중흥사지, 태고사 원증국사탑과 탑비 등을 볼 수 있다. 또 유지(遺址)로 고려 남경 궁궐지, 한양부 향교(鄕校)와 성황당 터 등이 있다. 교통시설로 영서역 · 노원역 · 청파역의 역참(驛站)과 사평나루가 있으며, 정자로는 용산호(龍山湖)의 추흥정과 반송정이 있었으며, 강감찬의 낙성대가 복원되어 있고, 그 삼층석탑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한종유의 저자도(楮子島) 풍류(風流)가 전한다.

조선

1394년 태조 이성계는 한양으로 천도하여 한양은 500년간 조선왕조의 도읍지가 되었다. 이듬해 한양부를 한성부(漢城府)로 개칭하고, 한성부를 5부 52방으로 구획하였으며 점차 도시시설을 마련하여 수도의 면모를 갖추어나갔다. 한양 천도의 배경으로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의 영향과 신왕조 창건 과정에서의 고려 왕실과 구 귀족세력의 저항으로부터의 탈피를 들고 있으며, 나아가 한강을 끼고 있는 한양의 인문지리적 위치와 풍수지리적 위치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서울 지역은 산과 하천의 배치가 풍수지리적으로 길지(吉地)에 해당하며 우리나라 전체로 볼 때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또 수륙교통이 편리하며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하여 조선시대 서울로 정해진 이래 일국의 수도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즉 서울의 산수를 보면 진산(鎭山, 祖山)인 북한산에서 주산(主山)인 북악산(백악)에 연결되며, 응봉과 낙산이 좌청룡(左靑龍)을 이루고, 인왕산이 우백호(右白虎)가 되며, 목멱산은 안산(案山)에 해당된다. 그리고 그 중앙에 내수(內水)인 청계천이 흘러 한천(漢川: 중랑천)과 합류되어 외수(外水)인 한강에 유입된다. 이렇게 하천이 분지를 빠져 나가는 수가(水口)가 산에 둘러싸여 밖에서 볼 수 없는 형국을 풍수에서 이상적인 산수의 배치로 보고 있다.

이러한 명당자리에 조선왕조의 궁궐 · 종묘 · 사직단 · 관아 · 문묘 등 국가를 상징하는 주요 건물들이 건설되었던 것이다. 특히 세종 때는 한성의 주산이 창덕궁의 뒷산인 북산 즉 응봉이어야 하며, 따라서 정궁의 명당자리는 창덕궁 자리보다 약간 서쪽인 향교동(鄕校洞)으로 뻗은 산줄기에 딸린 승문원 자리라는 풍수지리설이 대두되어, 향교동 일대가 주목되기도 하였다. 아울러 조선시대 서울은 조운(漕運)이 통하고 도로가 균등하며, 배와 수레교통이 좋아 주민들의 생활이 편하여 도읍으로서의 좋은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사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동남쪽을 제외하면 모두 좁은 고개를 통해야만 들어올 수 있어 군사적 방어에도 유리한 곳이었다.

한양 정도(定都) 당시 수도의 도시 구상은 자연지리 및 풍수지리 조건에 따른 성터[城基]와 성문(城門)의 결정, 그리고 궁궐 · 종묘 · 사직단 · 문묘 · 관아 · 시전 등 주요 시설의 입지와 수계(水系)를 이용한 도로망의 결정으로 규정되었다. 성곽(城郭)의 위치는 도읍지 선정 때부터 고려된 것으로 풍수지리상의 주산인 백악을 현무(玄武)로, 안산인 목멱산을 주작(朱雀)으로, 서산인 인왕산을 백호(白虎)로, 동산인 낙타산을 청룡(靑龍)으로 한 내사산을 연결하는 약 18㎞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성문의 위치는 방위와 자연지세 풍수지리 도로와의 연결을 고려하여 8방위 원칙에 따랐다.

그리고 궁궐 · 종묘 · 사직 · 문묘 · 시전 등 중요 시설의 입지는 풍수지리설에 의한 명당혈처(明堂穴處)와 『주례(周禮)』 동관(冬官) 고공기(考工記)의 관례인 ‘전조후시(前朝後市)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랐다. 주산인 백악을 배산(背山)으로 주 궁궐인 경복궁을 북쪽에 입지시키고, 좌묘우사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좌측의 부주산(副主山)인 응봉을 배경으로 한 산줄기 흐름의 남단에 종묘 터를 잡고, 우측의 인왕산 동남쪽 산줄기 끝에 동쪽에 사단(社壇), 서쪽에 직단(稷壇)의 사직단을 건립하였다. 또 응봉 동쪽 기슭에 문묘와 성균관의 터를 잡았다.

전조후시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 광화문 앞 도로 양측에 의정부 · 육조 · 한성부 · 기로소 · 사헌부 등 정부 관아를 배치하였고, 정도 후 경복궁 후문인 신무문(神武門) 밖에 일시 장시(場市)를 개설하여 왕실과 관아 및 도성 주민에게 일용품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신무문 밖의 장시는 신도 초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태종 때에 이르러 종로 간선도로에 시전(市廛) 터를 잡아서 도시의 활동 축을 삼았다. 그리고 경복궁의 좌우와 종로 남쪽에 주민들의 주거지를 마련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한양도성 내의 물줄기는 도시의 골격 형성, 즉 도로망 구성과 중요 시설의 입지 선정에 중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동시에 5부제(五部制) 행정구역과도 관련된다. 즉 경복궁과 중앙관아의 연결을 위한 상징가로축으로 황토현(黃土峴, 광화문사거리)에서 광화문까지의 대로(大路)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청계천이 동서로 흐르기 때문에 청계천 북쪽으로 이와 나란히 황토현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흥인문(興仁門)까지, 서쪽으로 돈의문(敦義門)까지 연결하는 동서관통로(종로)를 설정하였다.

이는 도성의 반을 가르는 횡선이 되었고, 시전을 중심으로 한 도시의 활동축을 동서로 설정하였다. 그리고 도성의 정문인 숭례문(崇禮門)에서 대광통교(大廣通橋: 雲從街)까지 대로를 연결하여 주 진입로를 설정하였다. 이상의 네 축을 골격으로 나머지 성문과 주요 도시시설과의 연결 및 5부제의 행정구역 경계를 따라 중로(中路)와 소로(小路)를 설정하였다. 한 예로 중부의 구역은 육조거리와 청계천, 그리고 이현(梨峴)을 거쳐 창덕궁 돈화문으로 빠지는 거리와 경복궁에서 종묘까지의 거리 안으로 하였다.

이러한 도시시설이 갖추어지기 전 천도 당시 한양에는 옛 남경의 시설이 거의 없었다. 왕실과 정부 일행이 1394년 10월 28일한양에 도착하여서는 고려시대 한양부의 객사(客舍)에 임시 왕궁을 정하고, 관아(官衙)와 관리 역시 민호(民戶)를 점유하여 임시 거처하는 형편이었다. 이렇게 볼 때 한양 천도 당시에는 이미 고려 숙종 9년(1104)에 개창된 남경 이궁(離宮)의 연흥전(延興殿)이나 한양부 관아 등의 건물은 이미 붕괴되었거나 쇠락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새 도읍의 새 궁궐지는 고려 숙종 때 남경 이궁인 연흥전 등 옛 궁전이 있던 곳을 피하여, 그 바로 남쪽에 해산(亥山, 서북악인 白嶽)을 주산으로 하여 임좌병향(壬坐丙向: 북좌남향)으로 정하니, '국면이 평탄하고 넓으며 전방의 산이 모두 앞에서 조회(朝會)하여 읍(揖)하는 것과 같았다'는 기록을 볼 때, 새 도읍지의 궁궐은 고려시대의 남경 궁궐터와 관련하여 조금 넓은 곳을 찾아 앞으로 나와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한성부의 청사는 한양 천도 후 경복궁과 각 관아와 함께 육조거리에 건축되었는데, 그 위치는 의정부(議政府)와 이조(吏曹)의 남쪽이며, 호조(戶曹)의 북쪽인 중부(中部) 징청방(澄淸坊)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고려 후기 한양부의 성황당이 있었던 곳으로, 처음 건축할 때 성황당을 다른 곳으로 옮겼는데, 태종 6년(1406) 6월에 예조(禮曹)의 계청으로 전에 있던 부근에 다시 성황당을 봉사(奉祠)하였다. 여기서 성황당은 해당 고을과 관아의 수호신으로 관아 안에 혹은 산성 가까이에 위치하여 봉사하는 곳이었으므로, 조선왕조의 수부(首府)인 한성부도 고려의 한양부가 있던 자리에 위치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고려 한양부의 지방교육기관이었던 향교가 한성부 중부 경행방(慶幸坊)의 교동(校洞, 향교동) 즉 오늘날의 종로구 경운동 일대에 위치하였었는데, 그 동쪽에 창덕궁과 종묘가 자리 잡고, 그 외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과 대학인 성균관(成均館) 및 문묘(文廟) 등 문한(文翰)과 교육기관이 위치하게 된다. 따라서 조선왕조의 한양 천도는 바로 궁궐 지방관아 교육기관 등에 있어서 고려 중기 남경의 전통과 후기의 한양부 전통을 이어서 확장한 규모의 도읍으로 건설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서울에 전하는 조선시대의 문화유적은 위에서 열거한 한성부의 도시 시설이 대부분을 이룬다. 이는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대외관계의 중심시설로서 도성 내외에 기능별로 분포되어 있다. 즉 도성과 성곽 내의 5대 궁궐 및 종묘 · 사직단 · 문묘 · 육조거리의 관아 시설과 목멱신사 · 백악신사 · 원구단 등의 구성은 조선의 통치이념과 정치행위 및 시행기관으로 기능하였다. 또 시전(市廛)을 형성하여 경제 유통을 관장하게 하고, 도성의 관방과 치안을 위한 군영(軍營)이 설치되었고, 외교관계 시설인 태평관 · 북평관 · 동평관 등이 자리 잡았다. 그리고 팔도로 뻗어나가는 교통 · 통신시설 및 군량미와 관리들의 녹봉(祿俸)을 지급하던 각종 창고, 왕족의 원찰(願刹), 사대부들의 거주공간과 사당 및 정자 등 풍류생활 터 등이 마련되었다.

그리고 15세기 초 1428년(세종 10)의 한성부 도성 안의 인구는 10만 3328명이었다. 이들의 대부분은 왕실 및 양반관료와 그 가족들, 군역에 복무하는 군인들, 각종 관청에 사역되는 관노비와 사노비, 공장 · 상인들이었다. 그리고 성저십리 지역은 대부분 농경지역이였다. 따라서 당시 한성부는 정치 · 행정중심의 소비도시로서의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건국 이후 2세기 동안 조선왕조는 태평성대의 영화를 누리다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그리고 뒤이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으로 전국이 심한 병화의 재난을 입게 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수도 한성부의 피해가 막대해 경복궁 · 창덕궁 · 창경궁 · 종묘 · 문묘 등 개국 이후 건설된 수도의 모든 시설이 거의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이후 광해군 연간의 대규모 중건공사로 도읍지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그러나 1624년(인조 2)이괄(李适)의 난과 정묘 · 병자호란으로 한성부는 청군(淸軍)의 약탈 · 방화 등으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상황을 겪어야만 했다.

조선왕조는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조선왕조는 외침의 시련을 극복하고 새로운 도약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대동법 실시, 균역법 시행(1750), 공장안(工匠案)의 폐지 등 일련의 사회 · 경제 개혁을 통하여 정치 · 행정도시에서 상공업도시로 발전을 꾀하였다. 성안에는 종루(鐘樓) · 이현(梨峴) · 칠패(七牌)의 3대 시전을 중심으로 상품 교역이 활발해졌다. 또한 경강상인(京江商人)의 활약은 상업자본의 형성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양상을 나타내었다. 즉 경강상인은 운수업과 상업활동을 활발하게 벌였으며, 그들은 자본의 축적을 통하여 18·19세기 자본주의 맹아(萌芽)를 잉태시킨 시대변혁의 주인공으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주로 용산 · 마포 · 서강 · 동작 · 두모포 · 송파 등지를 중심무대로 활동하였다. 이들은 국가의 보호를 받으며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행사하던 운종가(雲從街) 일대의 육의전(六矣廛)을 비롯한 시전(市廛) 어용상인들과 대항하였으며, 1791년 신해통공(辛亥通共) 이후에 시전상인을 능가하여 서울의 상권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이러한 한성부의 도시적 성격 및 양상은 19세기 중엽 한성부의 인구 증가로 나타났으며, 대체로 조선 초기의 2배에 이르는 20만 3901명(1835)으로 늘어난 것으로 기록에 보인다. 한편 19세기 초 외척정치가 진행되면서 그들의 본거지인 인왕산 아래 청운동 일대는 우대라 불리면서 권문세가들의 주거공간이 형성되기도 하였다.

근대

19세기 후기에 들어 서울은 흥선대원군의 등장과 더불어 내정개혁을 통한 왕권강화정책이 시행되어 경복궁이 복원되고, 운현궁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아울러 대외적으로는 서구열강의 제국주의 세력과 대응하며 국제질서에 편입되는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고종 초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楊花津)까지 올라왔고, 급기야 병인양요(丙寅洋擾)를 일으켰다. 1871년에는 통상을 요구하는 미국에 의해 신미양요(辛未洋擾)가 일어났고, 1875년 운양호사건을 계기로 이듬해 강화도조약이 체결되어 한강을 통해 제국주의 세력이 한양에 침투하기 시작하였다.

1890년경부터 용산 일대는 일본제국주의 세력이, 마포구 당인동 일대에 중국 세력이 진출하면서 처음에는 개시장(開市場)을 통한 경제침투가 시작되더니, 급기야 제국주의 침략이 시작되었다. 이 지역에는 개시장이 설치되고, 사람의 통행을 위해 1888년한강에 증기선이 취항하였으며, 1900년대에는 전차와 철도가 놓이고, 한강에 철교가 설치되기에 이르렀다.

한편 고종의 친정에 따라 개화정책이 추진되었으며 이후 임오군란, 갑신정변을 겪으면서 정치집단의 갈등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모색하였다. 이후 일제와 청나라의 간섭과 침탈과정에서 갑오개혁, 갑오농민운동, 을미사변, 아관파천을 겪고, 1897년 대한제국 선포와 경운궁 중건을 시작으로 광무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꾀하였다. 그러나 일제를 선봉으로 제국주의 열강세력의 침탈과 이들에 의해 강요된 파행적인 교역 · 교통 · 산업 등의 변화는 결국 조선을 식민지로 전락하게 하였다. 이러한 형세와 병행해 새로운 근대적 시설인 철도 · 전차 · 전신 · 전화 등의 설비가 시작되고, 서양식 학교 · 병원이 설치되었으며, 수도(水道)의 급수가 개시되었다.

1906년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군대해산에 이르자 이에 저항하여 의병전쟁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에 이르렀다. 1910년 일제 강점에 따라 조선총독부가 설치되어 한성부는 경성부(京城府)로 개칭되어 경기도 예하의 지방행정단위로 전락하였다. 경성부에는 총독부 이외에 조선군사령부(朝鮮軍司令部) · 조선은행 ·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이 식민지 침탈기관이 설치되었고, 경인선(京仁線) · 경부선(京釜線) · 경의선(京義線) · 경원선(京元線) 등의 철도망을 통하여 경제적 침탈과 군수품의 수송을 꾀하였다. 아울러 일제에 의해 영등포 지역이 공업화되면서 병참기지화(兵站基地化)되었고, 점차 노량진 일대가 서울권에 편입되어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 지역이 새로운 도심권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편 내선일체를 내세운 동화정책(同化政策)의 일환으로 경성제국대학을 비롯해 의학 · 상업 · 공업 · 광업 등의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었다. 태평양전쟁을 전후해서는 남산 중턱에 있는 조선신궁(朝鮮神宮) 등이 설치되어 신사참배를 강요하였고, 창씨개명과 한글 사용 금지 등으로 민족문화를 말살하고자 하였다. 이때 한국인들은 주로 청계천 북쪽의 종로를 중심으로 한 북촌에 주로 살았고 일본인들은 대부분이 남산 북쪽 사면의 남촌과 용산에 주로 거주하였다. 특히 용산 지역은 조선군사령부 등 군사시설이 집결되어 있었다.

현대

1945년 광복 후 서울에는 미군이 진주하여 군정을 시행하였다. 서울은 1946년 9월 28일 경기도의 관할에서 벗어나 도와 같은 수준의 서울시로 승격되고, 8개구를 관할하였으며, 과거의 일본식 지명과 행정구역을 한국식 이름으로 바꾸었다. 1948년 대한민국정부에 따라 수도의 지위를 재확인하였으며, 1949년 8월 15일 서울특별시로 승격되었으며 당시 서울 인구는 140만 명이었다. 서울은 1950년 6월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폐허화되었으나 1953년 휴전협정의 체결과 함께 수도로서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그리고 1949년 성북구의 설치와 1963년의 서울 시역(市域) 확대로 인하여 서울특별시는 명실공히 한강을 중심으로 한 강남 · 강북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1962년 「서울특별시 행정에 관한 특별조치법」의 제정으로 서울특별시는 국무총리의 직속기구가 되었으며, 점차 중앙정부의 감독에서 벗어나 자치적인 도시정부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1991년 자치정부가 성립되었으며 아울러 1995년에는 25개 구청의 기초자치단체를 거느리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한강개발이 추진되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서울의 시세(市勢)를 한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균형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즉 1970년대 들어 급증하는 도시 행정의 수요를 타개하기 위해 한강이남 지역을 집중적으로 개발하였다. 이어 1986년에 아시아경기대회가 개최되고, 1988년에는 한강변 잠실 지역에서 인류의 최대 축제인 올림픽이 개최되었고, 새로운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2002년에는 월드컵 축구경기대회를 열게 되어 세계인의 정치 · 경제 · 문화의 중심지로 부각되고 있다. 한민족의 웅비하는 모습을 ‘한강의 기적’으로 표현하는 것처럼 한강을 끼고 있는 서울의 역사 · 지리적인 가치는 한민족의 역사 중심이자 상징인 것이다.

유물 · 유적

서울은 구석기와 신석기시대 이래로 백제 초기의 도읍지인 위례성, 고구려의 남평양, 신라의 한산주, 고려의 남경, 조선의 수도인 한성 등 2,000여 년의 긴 도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읍지로서 각지에 많은 유적과 유물이 분포되어 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면목동 유적과 지표유적 등이 분포되어 있으며, 신석기 시대의 유적으로 암사동 유적이 있어 인근의 미사리 유적과 더불어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유적으로 당시의 사회상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는 역삼동 주거지가 발굴 조사되었으며 주거공간과 도구창고의 연립형 형태임이 확인되었다. 그 외 명일 · 가락동 유적에서도 가락식 토기 등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었고, 원지 · 우면동에서는 고인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백제 · 고구려 · 신라가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석촌동 고분군, 방이동 고분군과 성곽 등 다양한 흔적을 남겨놓았으며, 고려시대의 불교유적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궁궐 · 도성 · 종묘 · 사직 · 왕릉 등 국가상징의 유적 유물이 다양하게 남아 있으며, 대한제국 이후 건립된 근대건축 유물도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이러한 유적 · 유물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건조물로서 궁궐 · 관아 유적으로 경복궁, 경복궁 근정전 · 경회루 · 인정전 · 자경전 · 자경전 십장생 굴뚝 · 아미산 굴뚝 · 근정문 및 행각 · 동십자각, 창덕궁(후원 포함), 창덕궁 인정전 · 돈화문 · 인정문 · 선정전 · 희정당 · 대조전 · 구 선원전, 창경궁, 창경궁 명정전 · 홍화문 · 명정전 동회랑 및 명정문 · 옥천교 · 통명전, 덕수궁(경운궁), 덕수궁 중화전 및 중화문 · 함녕전, 경희궁지, 흥화문 · 숭정전, 우정총국, 종친부, 삼군부 청헌당 · 총무당, 미국공사관, 양천향교 등이 있다. 그리고 단 · 묘 · 사 유적으로 종묘와 종묘 정전 · 영녕전, 서울 문묘, 서울 동묘, 서울 사직단 정문, 선잠단지, 서울 사직단, 서울 문묘 일원, 육상궁, 원구단, 선농단, 지덕사 부묘소, 청권사 부묘소, 선희궁지 등이 있다.

성곽 유적으로 서울 한양도성, 서울 숭례문, 서울 흥인지문, 풍납동 토성, 북한산성, 아차산성, 몽촌토성,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 양천고성지, 홍지문과 탕춘대성 등이 있다. 주거 · 누정으로 운현궁 · 용양봉저정 · 봉황각 · 석파정 · 이화장 · 침류각 · 세검정 · 안국동윤보선가 등이 있다.

그리고 기타 유적지 · 명승으로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 함춘원지, 사당동 백제요지, 구 서울구치소, 효창공원, 탑골공원, 성락원, 양화나루 · 잠두봉 유적, 낙성대, 정업원구기, 어정, 낙성대유지, 무악동 봉수대지, 남산 봉수대지, 아차산 봉수대지, 수표, 독립문, 영은문 주초, 살곶이 다리, 수표교 등이 있다. 근대건축으로는 구 대한의원 본관, 약현성당, 구 러시아 공사관, 구 벨기에 영사관, 용산신학교와 원효로성당, 정동교회, 명동성당, 연세대학교 스팀슨관 · 언더우드관 · 아펜젤러관, 구 서울대학교 본관, 구 공업전습소 본관, 한국은행 본관, 중앙고등학교 본관 · 서관 · 동관, 서울역사, 고려대학교 본관 · 중앙도서관, 서울 성공회성당, 천도교 중앙대교당, 번사창, 중명전, 구 제일은행 본점, 뚝도수원지 제1정수장, 경교장, 승동교회, 동아일보 사옥, 배재학당 동관 등이 있다. 이 중 창덕궁과 종묘 일원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전적으로는 훈민정음,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등 세계기록문화유산을 비롯하여 동국정운, 고려말 화령부 호적관련고문서, 비변사등록, 월인천강지곡, 월인석보, 제왕운기, 대동여지도, 수선전도 목판, 근사록, 백범일지 등 다양한 문화재가 있다. 회화작품으로는 독서당계회도, 이길룡필 남지기로회도, 호조랑관계회도, 정선필 육상묘도, 이색초상, 목장지도, 흥선대원군 초상 등이 있으며, 서예작품으로도 안중근의사 유묵 일체와 김정희유묵 예서대련, 봉은사 김정희서 판전현판 등 많은 작품이 있다. 그리고 청자 사자형뚜껑 향로, 백자 철화포도문 항아리, 분청사기 인화국화문 태항아리, 청화백자 매조죽문 항아리, 청자 투각고리문 의자 등 각종 청자와 백제 및 여러 형태와 기능을 가진 다양한 도가기가 주로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한 각종 사설박물관과 개인소장으로 되어 있다. 그 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와 삼전도비,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 고종 어극 40년 칭경기념비 등 각종 기념비와 신도비 및 암각글씨 등이 산포되어 있다.

불교문화재로는 봉은사 선불당 등 사찰건물과 승가사 석조승가대사상 등 불상, 조계사 대웅전후불탱화 등 불화, 원각사지 십층석탑 등 불탑,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 대원각사비 등 탑비,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 등 석등, 장의사지 당간지주 등이 있으며, 그 외 동종 · 사리유물 · 금고 · 향로 · 목각탱 등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아울러 상지은니묘법연화경 등 150여 종의 불경이 여러 소장자들에 의해 보존되어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서울 재동의 백송, 서울 수송동의 백송, 서울 문묘의 은행나무, 한강의 황쏘가리, 창덕궁의 향나무, 서울 용두동 선농단의 향나무, 창덕궁의 다래나무, 삼청동의 등나무, 삼청동의 측백나무, 서울 신림동의 굴참나무 등이 있으며, 잠실 뽕나무 · 화양동 느티나무 · 손기정 월계관기념수 등은 서울특별시 기념물로로 지정된 서울특별시지정보호수이다.

그리고 과학기기로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창경궁 자격루, 혼천시계, 금영 측우기 · 복각천상열차분야지도 각석 · 신법 지평일구 · 간평일구 · 혼개일구 · 대구 선화당 측우대 · 창덕궁 측우대 · 앙부일구 · 창덕궁 풍기대 · 경복궁 풍기대 · 창경궁 관천대 · 관상감 관천대 등이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다.

교육 · 문화

서울은 한국교육 발전의 중심지로서 한국교육의 참모습을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다. 서울의 교육 · 문화 발전은 정치 · 경제 · 사회 분야의 발전과 마찬가지로, 서울이 민족문화사의 중심이 되었던 조선시대 이후 가속화되었다.

조선시대 서울의 교육기관으로는 성균관(成均館) ·4부학당(四部學堂) · 잡학(雜學)이 있었다. 성균관은 고구려의 태학(太學), 통일신라시대의 국학(國學)의 전통을 이어 고려시대에 국자감(國子監) · 성균감(成均監) 등으로 불리다가 고려 말 성균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는데 조선왕조가 이를 계승하였다.

1394년(태조 3) 10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성 자하동에 있던 성균관을 한양숭교방(崇敎坊: 지금의 성균관대학교 구내)으로 옮겼다. 성균관에는 유학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를 모신 문묘(文廟), 유생들이 거처하는 동재(東齋) · 서재(西齋), 도서관인 존경각(尊經閣) 등이 있었다.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상당한 정도의 자유가 보장되었는데, 이를테면 국가정책에 실정이 있거나 명륜풍교(明倫風敎)에 해가 될 만한 일이 있다고 생각될 때는 유소(儒疏)로써 탄핵도 하였다. 만일 이 유소에 대해 국가가 보복을 하면 학교 식당에 들어가지 않는 권당(捲堂), 기숙사에서 모두 나가는 공재(空齋), 성균관을 나와버리는 공관(空館) 등을 단행해 대항했는데, 이는 현대의 동맹휴학과도 같은 것이다.

성균관은 서울에만 있는 유일한 중앙국립대학으로서, 유교이념에 입각한 학술 연마에 의한 지도적 인재를 배출해 한국문예의 총본산으로서 사명을 다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경학원(經學院)이라 불렀고, 명륜당과 부속건물에 명륜전문학교를 세웠는데 광복 후 이것이 성균관대학교로 발전하였다.

4부학당 역시 고려시대의 교육제도를 답습한 것으로, 중학(中學) · 동학(東學) · 서학(西學) · 남학(南學)을 말한다. 중학은 중학동 한국일보 자리에, 동학은 종로6가 이화여자대학교부속병원 자리에, 서학은 태평로1가 조선일보사 뒤쪽에, 남학은 필동 극동빌딩 자리에 있었다. 4부학당에는 문묘가 설치되지 않았으며, 문묘에 대한 행사는 성균관의 문묘를 이용하였다. 4부학당의 학생 정원은 각 학당에 100명씩 총 400명이었는데, 이는 당시 서울 전체의 학령인구를 고려할 때 교육기회가 극히 적었음을 의미한다. 더구나 학생들이 입학해 공부하는 숫자가 정원보다 적었다는 기록이 자주 보이는 것은 4부학당 교육의 부진성을 말해 준다.

4부학당은 독립된 교육기관이라기보다는 성균관에 예속된 부속학교의 성격을 띤 것으로 성균관 관원이 교관으로 파견되었고, 학당의 잡무를 처리하는 서리는 물론 노비까지도 모두 성균관의 서리와 노비로 충당되었다.

4부학당에도 기숙사인 재사(齋舍)가 마련되었고, 학비는 모두 관급(官給)으로 면학 분위기가 갖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 그 뒤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학생수가 격감해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그러다가 조선 말에 외국인 선교사들이 사학(私學)을 세울 때 배재학당(培材學堂) · 이화학당(梨花學堂) 등 그 이름을 따서 붙였다.

조선왕조의 교육이념과 목적은 유교사상에 따라 과거교육과 군자(君子)의 학에 두었기 때문에 과학 · 기술 교육이 경시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잡학은 지금의 실업교육기관으로, 기술교육은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인원을 뽑아 중앙의 소관 아문(衙門)에서 전문적으로 교육시켰다.

또 의학은 전의감(典醫監) · 혜민서(惠民署)에서, 천문학 · 풍수지리 · 명과학(命課學)은 관상감(觀象監)에서, 산학(算學)은 호조에서, 율학(律學)은 형조에서, 화학(畵學)은 도화서(圖怜署)에서, 도학(道學)은 소격서(昭格署)에서 교육하였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교육은 한국사회에 유교주의적 세계관과 가치관의 전통을 남겼지만, 시대의 변화에 맞게 적응시킬 수 있는 보다 근원적인 바탕을 마련하지는 못하였다. 이런 역할을 담당하면서 등장한 것이 근대교육기관이다. 근대교육기관이란 흔히 말하는 개화교육의 기관으로서 서구의 신문화를 받아들이는 교육이 이루어지는 곳이다.

19세기 중엽을 지나면서 개신교 종파가 서서히 서울에 들어오면서, 선교사들이 선교사업과 아울러 교육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결과 1885년(고종 22)에 한국 근대학교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광혜원(廣惠院: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과 배재학당이, 1886년에 이화학당 등이 선교사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들 학교는 모두 우리나라 신문화 수입의 주요 교육기관으로서 기여한 바가 크다.

한편, 정부에서도 근대적인 관학으로 1883년에 동문학(同文學), 1886년에 육영공원(育英公院)을 설립하였다. 그러다가 1895년 3월에 내린 교육입국조서(敎育立國詔書)의 기본정신에 따라, 1895년 한성사범학교 · 외국어학교 · 법관양성소, 1899년 경성의학교, 1900년 한성중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 1904년 농상공학교(農商工學校) 등을 세웠다.

또한 당시 사회의 요청에 따라 민간인에 의해 사립학교가 세워졌는데, 1895년 민영환(閔泳煥)이 흥화학교(興化學校)를, 사회 유지들이 한성의숙(漢城義塾)을 세우고, 1896년 민영기(閔泳綺)가 중교의숙(中橋義塾) 등을 세웠다. 당시의 민간 사학도 미션 학교나 관학에 결코 뒤지지 않는 교육적 영향력을 발휘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사학의 설립이 곧 교육구국운동이라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1910년 일본에 주권을 강탈당하면서부터 우리의 민족의식은 교육 · 문화 방면에서 더욱 표면화되었다. 1923년 3월 29일 서울 기독교중앙청년회(YMCA) 회관에서 조선민립대학기성회발기총회가 열렸지만 민립대학의 설치는 일제에 의해 무산되고, 1924년 5월 국립대학으로서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었다. 경성제국대학은 광복 후 서울대학교로 발전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학교교육과 근대학교교육의 전통과 정신을 이어받은 서울의 교육은 광복 이후 교육이 처한 정초기(定礎期)와 혼란기 속에서도 터전을 구축했고, 양적 팽창기를 거쳐 더 많은 학교와 교원을 필요로 하는 가운데 교육의 내실을 기해야 할 질적 발전기에 접어들었다.

서울의 인구증가와 더불어 교육기관의 수가 급증했고, 특히 고등교육기관인 대학은 서울에 집중, 분포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2015년 현재 초등학교 599개교, 중학교 384개교, 고등학교 318개교, 특수학교 29개교, 대학교 39개교가 있다. 또한 임업연구원 · 한국과학기술원 · 산업연구원 등 각종 연구기관 및 단체들이 집중해 있다.

도서관은 국립중앙도서관을 비롯한 공공도서관이 있어 많은 시민들이 이용한다. 박물관은 국립중앙박물관 · 국립민속박물관 · 간송미술관 · 호림박물관을 비롯한 사립박물관과 각 대학박물관 등이 있고, 국보 · 보물을 비롯한 많은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 밖에도 국립극장 · 세종문화회관 · 문예회관 · 예술의 전당 등을 비롯한 각 공연장은 국민문화 향유의 폭을 넓히는 중심지가 되고 있다. 스포츠 시설로는 서울올림픽대회를 치르면서 각종 경기장이 설립 정비되었고, 월드컵경기장 · 잠실종합운동장 · 장충체육관 · 효창운동장 · 태릉경기장 등이 있다.

또 서울은 한국 종교문화의 중심지로서 불교 · 천도교 · 천주교 · 개신교 · 유도회(儒道會) 등의 종단이 모여 있다. 1986년 서울에서 아시아종교자평화회의(ACRF)가 열려 국내에서도 각 종교단체가 참여하였다. 서울은 우리나라의 주요 교육기관 · 연구기관 · 문화시설 · 언론기관 · 종교기관 등이 집중되어 있어 명실상부한 한국의 문화중심지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민속
민속놀이

대표적인 민속놀이로는 송파 산대(松坡山臺)놀이 · 다리밟기 놀이 · 연등놀이 등을 들 수 있다. 송파 산대놀이는 조선 후기 송파진(松坡津: 지금의 잠실 석촌호수)에서 발생한 탈놀음으로 정월 대보름 · 단오 · 칠월백중 · 추석 등의 명절에 거행되었다. 송파진은 당시 많은 객주(客主)가 자리 잡고 있어 상인들의 내왕이 빈번했던 한강 주변의 이름 높은 향시가 발달했던 곳으로, 풍성하고 다양한 교역에 따른 사회적 · 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이러한 놀이가 성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송파 산대놀이는 개화기 무렵 한때 퇴조되기도 했지만, 1900년 초 구파발본산대의 연희자 윤희중(尹熙重)에 의해 재연되었고, 그 뒤 연중행사로 정월 보름 · 단오 · 추석에 연희를 했으며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이 놀이는 탈춤 열두 마당이 그대로 전승되고 있고, 가면수도 32개로 산대도감탈들이 거의 보존되어 있으며, 춤사위도 40여 종으로 세분화되어 있어 매우 중요한 탈춤 자료가 된다. 내용에서는 거만하게 거드름을 피우며 추는 거드름춤을 비롯해 앉았다 뛰어오르는 깨끼춤 등 일반 무용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을 가지고 있으며, 춤의 내용이나 대화의 내용에서는 한 시대의 사회상을 풍자적이고 해학적으로 엮어가고 있다. 1973년에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다리밟기는 매년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거리에 나가서 다리를 밟는 놀이로, ‘댁깨’ 또는 ‘답교놀이’라고도 한다. 12개의 다리를 밟으면 일 년 동안 다리에 병이 나지 않고 재앙도 막는다 해 고려 때부터 남녀노소 누구나 전국적으로 이루어졌던 세시풍속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에 와서는 서울 근교에서 남자들이 농악에 맞추어 무동(舞童)을 세우고 여러 배역으로 분장해 다리 위나 마을에서 한바탕 놀이를 벌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볼 수 있는 오락적인 민속놀이로서의 다리밟기이다.

놀이패들은 도포 · 정자관 · 전립 · 협수 · 전복 · 머릿수건 · 행전 · 홍색치마 · 댕기리 등 상민에서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각자 주어진 배역에 따라 의상을 입고 나쟁이 · 별감 · 집사 · 양반 · 왜장 · 상좌 · 소무 · 무동 · 윗동무 · 밑동무 등으로 분장한 다음, 용두기(龍頭旗)와 영기(令旗)를 앞세워 정초부터 대보름 후까지 하루에 두세 집씩 마을을 돌면서 놀이판을 벌였는데, 집터를 울려 벽사진경(陽邪進慶)함으로써 음주대접을 받았다. 이 때 사용되는 악기는 장구 · 호적 · 제금 · 소고 등이며, 굿거리와 타령장단에 맞추어 춤판과 놀량 · 앞산타령 · 뒷산타령 · 능개타령 · 선소리판 등이 펼쳐진다.

놀이지역으로는 마포 · 아현 · 노들(노량진) · 광화문 밖 · 살곶이 다리 · 장안리(長安里) · 뚝섬 자마장(자양동) 등을 들 수 있는데 그 중 자마장 다리밟기 놀이가 유명했다 하며, 바람들이[風納洞] · 몽촌 · 송파 · 돌마리(석촌동) 등의 마을에서는 마을마다 놀이패가 조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6년 이후로는 모두 없어져, 생존한 기능보유자를 통해 송파 다리밟기와 몽촌 다리밟기만을 재연할 수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도 이 중 송파 다리밟기는 1985년 3월 6일 서울 석촌동 놀이마당에서 송파민속보존회 주최로 이충선 · 한유성 · 문육지 등의 기능보유자들을 통해 복원되어 60년 만에 대보름축제를 벌임으로써 매년 축제공연을 가지게 되었다.

연등놀이는 신라 때의 팔관회에서 시작된 유서 깊은 놀이로, 고려 이후 정월 보름이나 이월 보름경에 즐기다가 현재는 사월 초파일에 거행되고 있다. 연등에는 연화(蓮花)나 어류 · 과실 등 여러 가지 모양이 있으며, 등 옆면에는 수복(壽福) · 태평만세(太平萬歲) 등의 축원을 써넣는다. 사월 초파일이 다가오면 거리 곳곳에 줄을 매어 수많은 연등을 달아 길을 밝히고, 사월 초파일 밤 불도들이 연등을 들고 여의도에서 조계사까지 행진하는 제등행렬(提燈行列)이 화려하게 펼쳐진다.

이 밖에도 만리동 고개의 석전(石戰)이 유명했다 하나 지금은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오늘날 바위절마을 호상놀이와 마들농요 · 장사편사놀이가 연희되고 있으며, 연날리기 · 제기차기 · 그네뛰기 등의 몇몇 놀이는 어린이들을 통해 겨우 그 명맥을 계승해 오고 있다.

한편 무형문화재로 종묘제례악와 제례 및 석전대제를 비롯하여 남사당놀이 · 북청사자놀음 · 봉산탈춤 · 서도소리 · 선소리타령 · 가야금 산조 및 병창 · 강령탈춤 등이 주로 무형문화재전수관을 통하여 연희되고 있으며, 전통공예와 술담그기 등이 다양하게 전승되고 있다.

동제

서울 도처에 부군당(府君堂) · 도당(都堂) · 대동당(大同堂) · 동제당(洞祭堂) 등이 있어, 주기적으로 이곳에서 동리 단위의 제를 지낸다. 부군당을 위하는 마을은 전농 · 수유 · 서빙고 · 보광 · 이태원 · 응봉 · 신영 · 주성동 등이며, 부군신(府君神)으로는 태조 이성계와 세조 · 김유신(金庾信) 등과 기타 무속신(巫俗神)을 봉안하고 있다.

제일은 대개 3월이나 9월 ·10월 초경에 길일을 택해 정하고 유례식(儒禮式)으로 치제(致祭)하지만, 수유동의 경우는 격년제로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데 부정풀이 · 대감놀이 · 조상굿 · 우물굿 · 도당굿 · 산신굿 등의 순서로 진행한다.

도당이 있는 마을은 답십리 · 석관 · 동빙고 · 가양 · 방화동 등으로, 이곳에서는 단군(檀君) 또는 산신을 주신(主神)으로 받들고 있다. 제일은 9월 말 또는 10월 초 길일을 택해 정하며, 제의(祭儀)는 대부분 유례풍으로 분향(焚香) · 재배(再拜) · 소지(燒紙) 순으로 진행된다. 소지는 도가(都家)부터 시작해 동네 안 큰길 순으로 올리게 된다.

북한산에도 도당이 있어 3년마다 한 번씩 3월 중 길일을 택해 무속풍의 큰 굿을 거행한다. 산신을 모시는 산신당으로는 신내동의 봉사당(奉祠堂), 평창동의 보현산신각(普賢山神閣), 부암동의 산제당(山祭堂), 도곡동의 산신제당(山神祭堂), 구기동의 천제당(天祭堂) 등이 있다. 제일은 각 마을마다 다르나 보통 3·6·10월 중 택일해 유례풍으로 치제한다.

이 중 봉사당의 산신제는 신내동뿐만 아니라 상봉 · 중화동이 공동으로 주최해 대동굿을 벌였으나, 근래에는 경비문제 등으로 한 번은 신내동에서 치르고 다음번은 상봉동과 중화동에서 치르는 식으로 격년제로 분담, 준비한다. 경비는 주민들에게 추렴해 마련하는데, 경비가 모아지면 제물을 준비하고 무녀와 잽이 5명을 불러들여 아침부터 종일토록 굿을 벌인다.

이 밖에도 용문동과 사근동에 남이장군 사당(南怡將軍祠堂)이 있어 주기적으로 제를 지내는데, 용문동의 경우 4·7·10월의 1일에 치제하고, 3년마다 4월 1일에 대규모의 제를 무속풍으로 거행한다.

이들 동제의 목적은 축재초복(逐災招福)과 길복기구(吉福祈求)이며, 마을에서 공동으로 치성을 드리는 것이므로 초상을 당했다든지 하는 등의 부정이 있을 때는 제관으로 선출되지 못하고, 제일이 정해지면 동민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근신하는 등 나름대로 엄격한 관례가 지켜진다. 그리고 인왕산 국사당, 성제묘, 서빙고동 부군당, 평창동 보현산신각, 선바위, 와룡묘, 관성묘 등의 제례도 지역주민의 복을 빌고 재앙을 물리치는 일종의 민속제례로 행해지고 있다.

설화 · 민요
설화

일반적으로 신화 · 전설 · 민담(民譚)으로 나누어진다. 조선조 500년의 수도인 서울의 신화로는 『용비어천가』의 서사시에 담긴 건국신화를 들 수 있겠으나, 여기에는 이미 신화적 성격이 많이 제거되고 신화적 모티프가 전설적 인간화로 대체되어 있다. 서울에서 구비 전승되는 신화로는 「무조신화(巫祖神話)」 · 「바리데기신화」 · 「풍신손돌신화」와 성씨신화로 「한양조씨신화(漢陽趙氏神話)」 등을 들 수 있다.

「바리데기신화」는 신을 청해 노래와 춤으로 신을 즐겁게 한 다음 공수(무당이 신들린 상태에서 신의 말을 전하는 것이라며 하는 말)를 내려 신의 의사를 듣는 삼단계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는 지노귀무가에 속한다. 그 밖에 제석거리 · 군웅거리 · 황제풀이 등 상당수의 무가가 채록되어 있다. 또 「바리데기신화」는 「버르더기」로도 채록되었다.

「풍신손돌신화」는 억울하게 죽은 뱃사공 손돌의 넋이 풍신(風神)이 되어 해마다 그가 죽은 날을 전후해 날씨를 춥게 하고 바람과 파도를 일으킨다는 이야기이다. 「한양조씨신화」는 시조가 인간이 아닌 화정(花精)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과 인연을 맺은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전설은 편의상 지명유래전설 · 암석전설 · 산악전설 · 수목전설 · 소지전설(沼池傳說) · 누정탑상전설(樓亭塔像傳說) · 능묘풍수전설(陵墓風水傳說) · 사찰연기전설(寺刹緣起傳說) · 인물전설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지명유래전설로는 밭 가는 농부에게 무학(無學)이 도읍터를 물어 정했다는 「왕십리와 서울」, 이성계가 한양에 도읍하고 지관들로 하여금 동구릉의 건원릉(健元陵) 터를 정하게 하고 근심을 잊었다는 뜻으로 붙여진 「망우리전설」, 임진왜란 당시 왜병이 비구니를 겁간해 임신시킨 데에서 이태(異胎)라 불리다가 나중에 주민들에 의해 이태원(梨泰院)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전설 등이 있는데, 서울의 지명에는 강한 역사성과 민중의식이 배어 있다.

이밖에 형제애와 관련된 「투금뢰전설(投金瀨傳說)」, 정절과 관련된 「도미나루전설(都彌津傳說)」, 풍수설과 관련된 「탄천전설(炭川傳說)」, 아기장수전설과 관련된 「마천전설(馬川傳說)」 등 다양한 유형을 포함하고 있다.

암석전설로는 무학대사와 정도전의 천도유래담과 관련된 현저동의 「선바위전설(禪巖傳說)」, 산이동담(山移動談)에서 파생된 「광주암전설」, 중종과 신씨부인의 역사적 여론과 관련된 「치마바위전설(裳巖傳說)」, 인간의 소박한 욕망과 관련된 「쌀바위전설(米巖傳說)」, 기자신앙(祈子信仰)과 관련된 「부암전설(付巖傳說)」 등이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산악전설 가운데 북한산의 노적봉(露積峰)은 모양이 곡식의 노적가리처럼 생겼다는 데에서 유래된 것이지만, 목포 유달산의 노적봉이 이순신의 의병술과 관련이 있듯이 서울의 것도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 또는 도선사상(道仙思想)과 관련이 있다.

불암산은 금강산의 한 부분이었는데, 한양의 남산이 되려고 서울 근교로 걸어왔다가 이미 다른 산이 자리를 잡고 있어 돌아가지 못하고 토라져 등을 뒤로하고 서 있게 되었다는 산이동전설과 결부되어 있다.

그밖에 안산(鞍山)은 말의 안장 모양에서, 우면산(牛眠山)은 드러누워 잠자는 소 모양에서 왔다는 등 동물의 형상과 결부되어 있으며, 백운대(白雲臺) · 인수봉 · 국망봉(國望峰)의 삼각산은 세모로 연결된 형상에서, 절두산(切頭山)은 종교적 교난사건과 관련해 전설이 유래되고 있다.

수목전설 가운데 「회현동 은행나무전설」은 임진왜란과 결부되어, 왜병에게 쫓기게 된 조선 군사가 망루로 사용하던 나무를 왜병이 베려 하자 홀연 찍힌 자국에서 핏물이 솟아 나와 왜병이 겁을 먹고 달아났다는 호국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충무로의 육신송(六臣松)은 박팽년(朴彭年)의 집터에 있는 나무로 충절을 기리는 후대인들이 붙인 명칭이다. 대청골 회나무, 대치동 은행나무, 용산동 은행나무, 금띠솔 등의 거수 · 고목들은 대개 지역적 역사나 의식과 결부된 전설을 지니고 있다.

전국적으로 분포하는 「장자못전설」도 서울에서 채록된 것이 있는데, 이 역시 욕심 많은 부자의 행위를 풍자한 징치담의 성격을 지니며, 효도와 관련된 「효자우물전설」 등도 유명하다.

누각전설 가운데는 남한산성 축성과 관련된 이회(李晦)의 「숭렬전전설(崇烈殿傳說)」과 그 부인의 한을 달랜 잠실의 「부군당전설(府君堂傳說)」을 들 수 있다. 이 전설은 부당하게 죽은 이회와 그 부인에 대한 민중적 숭앙심을 담고 있다. 세검정(洗劍亭) · 희우정(喜雨亭) · 청계당(淸溪堂) · 청량당(淸凉堂) · 압구정(狎鷗亭) 등의 유래도 역사성과 결부되어 있다. 관우묘(關羽廟)의 전설은 『삼국지』와 관련된 신앙으로 봉사된 특이성이 주목된다.

병자호란 때 청태종의 공덕을 기려 세운 삼전도한비(三田渡汗碑)는 대석의 돌거북이 땀을 흘리고 비석이 기울어져 나중에 다시 세웠는데, 이는 청나라에 대한 민중의 거부적 반응을 돌거북의 땀과 저항으로 나타낸 것이다. 헌릉(獻陵)의 태종신도비(太宗神道碑)는 임진왜란 때 왜군이 쳐들어와 철퇴로 비석을 깨뜨리려 하자, 뇌성벽력이 일고 깨진 부분에서 선혈이 흘러내려 이에 놀란 왜장이 쇠줄로 비석을 얽어매고 사죄의 제사를 드렸다고 전한다.

풍수전설 가운데는 한양에 도읍을 정할 때 아이를 업고 달아나는 형상인 부아암(負兒巖)의 지세를 달래기 위해 어머니를 위한 무악재, 아이를 위한 떡전거리라고 이름 지은 지명유래담이 있다. 거여동의 「매화낙지전설(梅花落地傳說)」은 임경업(林慶業)의 영웅성과 결부되어 있다. 용녀가 임도령과 동침하고 행운을 얻어 승천하면서 떨어뜨린 비늘이 매화나무로 둔갑을 하고, 그 자리에 선대의 묘지를 이장해 후손 가운데 임경업이 태어났다는 전설은, 지상과 천상을 잇는 인과구조를 지니고 있다.

사찰연기전설은 매우 문학성이 높다. 고려 현종이 대량원군(大良元君) 시절에 그의 인품을 알아보고 땅속에 굴을 파 숨겨준 인연으로, 진관조사는 진관사(津寬寺)를 창건하였다. 왕권과 관련을 맺은 연기담이다. 수락사(水落寺)는 원광법사와 인연을 맺고 있으며, 나중에 덕흥대원군의 원찰(願刹)로 선조에 의해 흥덕사로 명명되었다. 개운사(開雲寺) · 사자암(師子庵) · 내원암(內院庵)의 연기전설도 매우 흥미롭다.

인물전설로는 「임경업전설」 · 「강감찬전설」 · 「최치원전설」 · 「남이장군전설」 · 「순조가 된 농산스님전설」 · 「민충정공전설」 등이 전하는데, 모두 전승적 일화를 통해 그들의 신이함이나 영웅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민담의 경우, 서울은 인구의 대부분이 지방에서 이입되어 혼합문화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므로 독립적 작품으로 채록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민담은 그 성격상 공통적 형식을 가진 것이 대부분이므로, 화자에 따라 표현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 많다.

근래에 간행된 『한국구비문학대계』는 수유 · 미아동을 중심으로 채록되어 있는데, 「오성과 한음」 · 「송우암과 허미수」 · 「박문수를 가르쳐 준 신동」 · 「최치원담」 · 「마포 황곱재기」 · 「봉이 김선달」 · 「번동의 유래」 등 150여 화가 채록되어 있다. 『한국민속종합보고서』에는 「죄는 진 대로 간다」 · 「세서때라니까」 · 「신임사천군수와 주모」 등이 채록되어 있으며, 『향토서울』의 「서울의 설화모음」이 있다.

민요

서울은 일찍부터 도시화되어 노동요보다는 유흥민요가 발달하고, 거기에 전문문예집단의 참여로 가사와 가락이 다듬어지고 세련된 경향을 보인다.

정치와 관련된 참요(讖謠)라고 믿어지는 노래가 있다.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를 예언했다는 「미나리요」, 고종의 총애를 받던 기생 도화(桃花)와 엄비(嚴妃)의 관계를 풍자했다는 「도화타령」, 녹두장군 전봉준(全琫準)의 앞날을 예언한 「파랑새요」, 병인양요 때 전쟁을 예고했다는 「매화타령」, 러일전쟁을 예견했다는 「나비참요」 등이 그것인데, 노래와 사건을 무리하게 연결시킨 측면도 있다.

「도화타령」을 보면 “도화라지 도화라지 네가 무삼에 도화라고 하느냐 복숭화꽃이 도화라지/ 에헤요 에헤야 얼씨구 좋다 좋고 좋네 어화 이봄을 즐겨보세……”와 같다. 「창부타령」 · 「노랫가락」 등은 무가 계통의 노래로서 무당에서 전문소리꾼, 일반 민중에게로 전파되어, 서울을 중심으로 중부지방에서 많이 부르는 유흥민요가 되었다.

또 선소리꾼들에 의해 전파된 노래로는 「경복궁타령」 · 「한강수타령」 등이 있다. 「경복궁타령」은 “……경복궁의 역사(役事)가 언제나 끝나 그리던 가속을 만나볼까/ 에에헤이야 얼럴럴거리고 방아로다/ 도편수의 거동을 봐라 먹통을 들고서 갈팡질팡한다……” 하고 부르는데, 경복궁을 짓는 데 동원된 백성들이 자신들의 정서를 노래한 것이다.

「는실타령」과 「건드렁타령」도 서울 민요이다. 「는실타령」은 닭 · 개 · 봉황 · 솔개 · 명매기 · 꾀꼬리 · 봉접 등을 엮어 놓은 노래이다. 「건드렁타령」은 “왕십리처녀는 풋나물장수로 나간다지 고비 고사리 두릅나물 용문산채를 사시래요/ 건드렁 건드렁 건드렁거리고 놀아보자……애오개처녀는 망건장수로 나간다지 인모망건 경조망건 곱쌀망건을 사시래요……”로, 처녀들이 돈 벌러 나가는 내용이다.

일제강점기에 우리 민족의 애환과 저항을 담아 전국적으로 전파, 전승되었던 「아리랑」의 한 구절을 보면 “가자가자 어서가자 백두산 덜미에 해저물어 간다” 같은 가사도 있다. 서울 지방의 노동요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있지만 「이앙가」 · 「방아타령」 · 「밭매기노래」 등이 있다.

그리고 부요(婦謠)로는 「시집살이노래」 · 「베틀노래」 · 「빨래노래」 · 「바느질노래」 · 「맷돌노래」 등이 있다. 「베틀노래」를 들어보면 “베틀을 놓세 베틀을 놓세 옥난간에다 베틀을 놓세/ 에헤요 베짜는 아가씨 사랑노래 베틀에 수심만 지누나 ……닭아 닭아 우지를 마라 이베짜기가 다 늦어간다……”와 같다.

동요(童謠)로는 「술래잡기노래」 · 「두꺼비집만들기노래」 · 「이갈이노래」 등이 있고, 아이들이 논의 새를 쫓으며 부르는 「웃녘새야」는 노동요의 일종이다. 앞의 말을 되받아 이어가는 「꼬리따기노래」 등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가진 동요이다.

서울 지방에는 노동요 · 유희요 · 유흥민요 · 동요 · 부요 등의 노래가 있는데 유흥민요가 우세하게 불리고 있다. 민요는 지방의 민요를 받아들여 세련되어지고, 그것이 다시 전국적으로 전파되기도 하였다.

산업

서울은 1394년 조선의 수도로서 건립된 이후 600여 년간 우리나라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지로서 그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개항과 더불어 신문명의 도입에 따른 사회 · 경제적인 변화는 전산업형 도시에서 산업형 도시, 그리고 다핵심도시로의 변환을 유도하였다. 특히 경제발달과 함께 이루어진 인구의 급증은 서울을 거대도시로 발전시켰으며,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도시화는 주변의 위성도시들과 더불어 대도시권을 형성하고 있다.

수위도시로서 우리나라 도시의 외형적 · 내형적 발달에 주요한 일익을 담당했으며, 산업과 교통의 발달에도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도시의 특징은 산업과 교통의 발달을 고찰하면 더욱 뚜렷해진다. 산업별 취업인구는 1차산업인 농 · 임 · 어업에 18개 사업체, 2차산업인 광업 및 제조업에 5만 8573개 사업체, 3차산업인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 38만 4909개 사업체가 있어 3차산업이 두드러진 도시임을 입증해 준다.

이를 1990년의 통계와 비교하면, 1·2차산업은 각각 0.1%와 8.3%가 감소한 반면 3차산업은 8.4%가 증가해 산업구조가 3차산업인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 위주로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전국적인 현황과 비교하면 서울의 산업 특징이 더욱 잘 나타나는데, 광업 및 제조업의 경우는 비슷한 구성비를 보이나 농 · 임 · 어업은 현격히 낮으며 3차산업의 경우는 전국적인 현황보다 높아, 3차산업 주도형 도시로서의 특징이 뚜렷하다. 이러한 현상은 직업별 취업현황에도 그대로 나타난다.

신직업분류에 따른 직업별 취업현황은 1993년과 1996년의 통계를 비교하면, 입법자 ·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 농업 및 어업 숙련근로자, 단순 노무직 근로자의 경우는 거의 비슷하나 전문가 · 기술공 및 준전문가의 경우 취업비율이 3.4%나 증가했고, 서비스 근로자 및 상점과 시장 판매근로자의 경우는 0.8% 정도 증가하였다.

반면에 전체 취업자에 대한 사무직원과 기능원 · 기계 조작원 및 조립원이 차지하는 비율은 각각 1.9%와 2.3% 감소하였다. 이는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 취업하는 사람은 꾸준히 증가하고 있는 반면,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감소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또한 전국적인 취업현황과 비교, 고찰하면, 입법자 ·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 전문가 · 기술공 및 준전문가, 사무직원, 서비스 근로자 및 상점과 시장 판매근로자의 경우는 전국적인 구성비에 비해 월등히 높으나, 농업 및 어업 숙련근로자, 기능원 · 기계 조작원 및 조립원, 단순 노무직 근로자의 경우는 훨씬 낮은 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일찍부터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해 온 서울에 정부의 중추기관들이 들어서 있고 각 기업체와 금융기관 및 경제 · 사회 · 문화 단체 등의 본사나 본부가 집중 분포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

농업인 1차산업은 미미한 정도이며 식량작물 · 소채류 · 특용작물 · 과일류 등을 생산하는 근교농업의 형태로 영위되고 있다. 2차산업인 제조업에서는 사업체수와 종업원수, 부가가치 및 생산액 등에서 의복 및 모피제품이 수위를 기록하며, 출판 · 인쇄 및 기록매체 복제업이 그 다음을 차지한다. 섬유제품을 의복 및 모피제품과 동일 계열이라고 간주한다면, 이들 두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사업체수에서 40.2%, 종사자수에서 38.9%, 부가가치에서 30.8%, 생산액에서 32.0%를 기록, 서울 제조업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실제로 서울의 제조업은 중공업 분야는 미약하고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였다.

제조업체의 규모면에서는 종업원 수 50명 이하의 고용업체가 전체의 95.8%를 차지하는 반면 200명 이상의 업체는 0.7%만을 나타내고 있어, 대부분의 산업체가 소규모 경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업체는 서울 전 지역에 걸쳐 분포하고 있으나, 중구에 가장 많은 전체의 14.5%인 2,983개 업체가 입지하고 있으며, 일찍부터 공업지역이 형성되었던 영등포 · 구로 · 금천 · 성동구와 그 부근인 동대문 · 성북구 등에 전체의 53.5%가 집중 분포한다.

특히 구로구에는 구로공단이 있어 영등포 · 금천구와 함께 인천으로 이어지는 경인공업지구의 일부를 구성한다. 생산액은 금천 · 성동 · 영등포 · 구로 · 중구 순이며 이들 5개 구에서 전체의 50.5%를 기록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서울의 산업은, 3차산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는 경향을 보이나 1·2차산업은 감소현상을 나타낸다. 그 결과 서울 주변부의 토지는 근교농업용지로 사용되던 것이 주거지역의 확장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었으며, 공장들로 사용되던 지역들도 상업지역 · 주거지역 등으로 용도가 변경되고 있다.

토지종별 현황에서도 논 · 밭 · 임야 · 공장용지는 계속 감소하는 반면 주거용 대지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따라서 서울의 산업구조는 사회간접자본 및 기타 서비스업에 속하는 3차산업 위주로 구성되어 있음을 입증한다.

상업활동도 다른 지역에 비해 일찍부터 시작되어 육의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나, 근대적인 시장을 중심으로 한 본격적인 상업활동은 1905년 동대문시장이 설립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9세기 말 이후 일본인들의 이주가 증가하면서 지금의 퇴계로와 충무로 지역 일대에 근대적 상업활동 장소인 백화점을 비롯한 상가가 형성되었고, 종로에는 화신백화점이 한인 자본으로 설립, 운영되었다. 따라서 20세기 전반에는 종로를 중심으로 한 한국인들에 의한 상가와, 명동 일대를 중심으로 한 일본인들을 위한 상가가 형성되었고, 종로네거리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현재의 상업지구가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되었다.

1920년대 이후 공설시장과 사설 일용품시장의 설립이 증가하면서 상업활동이 활발해졌으나 6·25전쟁으로 상당히 위축되었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이루어진 경제발전에 따라 상업활동이 크게 성장했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시민들의 구매행태에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실제로 최근에는 24시간 편의점이 보편화되었으며, 대규모 상설할인매장이 등장하고 할인매장을 이용하는 구매자의 수도 증가일로에 있다. 이러한 상업활동의 변화는 도시의 생활에도 많은 변화를 유도하고 있다.

시장의 분포를 보면 일반시장 236개, 대규모 소매점 43개, 대형점 46개, 도매센터 3개가 있다. 대규모 소매점 중에는 백화점이 27개, 쇼핑센터가 27개이다. 일반시장의 경우, 전 지역에 걸쳐 입지하고 있으나 중구에만 42개가 있어 가장 많은 분포를 나타낸다. 그 다음에는 강남구에 21개, 영등포구에 14개, 서초구에 2개가 있다.

그러나 백화점의 경우는 차이가 많아 25개 구 중에서 13개 구에만 백화점이 입지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중구와 강남구에는 5개씩 분포하고 있다. 대형점은 강남구에만 3개로 가장 많이 입지하고 있고, 도매센터는 중구와 서초구에만 각각 1개와 2개가 있다. 결국 유통업체는 전통적인 상업지구가 위치하고 있는 중구와 신상업지역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강남구 · 송파구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다.

전문상가로는 전국에 의류를 공급하는 남대문 의류상가와 함께 동대문 주변의 평화시장, 전국 농수산물의 집산과 재분배를 맡고 있는 가락동농수산물시장, 용산전자상가, 노량진수산시장 등이 있으며, 경동시장 · 중부시장 · 중앙시장 등은 일부 상품을 주거래 품목으로 취급하는 특수시장 구실을 하고 있다.

금융서비스업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발달하였다. 한국인에 의한 3개의 보통은행(대한천일은행 · 한성은행 · 한일은행)이 설립, 운영되기 시작했으며, 수형조합(手形組合)과 농공은행(農工銀行)도 설립되었다. 금융제도는 경술국치 이후 일본인에 의해 변화되었는데, 중앙은행(조선은행) 또한 일본인이 운영했으며 한국의 경제잠식을 목적으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이 설립되었다. 이들 은행은 남대문로에 있었는데, 이 지역은 일제강점기에 상업활동과 함께 명실공히 서울의 경제적 중심지였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도 지속되어, 각종 금융기관의 본점과 증권회사 · 제2금융기관 · 보험회사 등이 남대문로 주변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최근에는 여의도에 증권감독원을 비롯해 증권회사가 집중되어 있는 증권가가 형성되었고, 강남 지역에 새로운 금융서비스업 지역이 형성되고 있다.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남대문로 주변지역에는 백화점 · 상가 · 호텔 · 음식점 등의 집중 분포와 함께 주요 상업지역으로서의 전통을 지키고 있다.

교통

조선시대 서울의 교통은 주로 도보로 이동했고, 일부 계층에서만 가마 · 초헌 · 말 등을 이용하였다. 개항과 더불어 도입된 신문명으로 교통수단의 변화를 가져왔는데. 전기의 부설과 함께 시내 대중교통수단인 전차가 1899년에 최초로 운행되기 시작했고, 같은 해에 시외 교통수단인 철도도 개통되어 서울과 지방을 연결시켜 주었다.

서울은 조선시대에 역로나 파발로 등을 기초로 한 전국 교통통신망의 중심지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데 기여했으며, 현재에도 철도망 · 도로망 · 항공로망의 중심지이다. 철도는 서울에서 인천으로 연결되는 경인선의 개통을 시작으로 경부선 · 경의선 · 경원선 · 경춘선 · 중앙선 등의 기점으로서 전국 철도망의 중심지이다.

도로는 서울과 지방을 연결하는 모든 국도 · 지방도로 · 고속도로의 기점으로 사통팔달해 있다. 특히 서울을 기점으로 경인고속도로 · 경부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 등으로 이어져 전국 어느 곳으로나 쉽게 통한다. 이러한 전국 교통망상의 구심점 역할은 물자의 유통, 인구의 이동에도 영향을 미쳐 서울로의 인구유입 및 기능의 집적에 큰 역할을 했다고 여겨진다.

항공교통도 국내선 및 국제선의 노선이 집중되어 있고, 인천국제공항과 김포국제공항은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기 위한 가장 중요한 관문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김포공항은 국내항공 노선도 같이 운행하고 있다.

시내 교통수단은 주로 도보로 도시 내 이동을 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동할 수 있는 전차가 등장하면서 서울시민의 중요한 운송수단으로서 환영을 받았다. 물론 당시에 자전거 · 인력거 등이 있었으나 많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므로 전차의 인기는 대단했고, 전차노선의 증설이 지속되었다. 1928년 버스가 시내 대중교통수단으로 운행을 시작했으나 1932년에 시외 교통수단으로 바뀌면서, 시내 대중교통수단은 전차로 단일화되었다. 광복과 6·25전쟁으로 교통의 발달이 위축되기는 했으나, 서울의 재건과 함께 전차는 서울의 주요 교통수단이 되었고 버스도 새롭게 시내 대중교통수단으로서 운행을 재개하였다.

그러다가 도시의 확장으로 전차노선 확장의 어려움이 제기되었으며 전차의 공간적 제한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반면 버스는 궤도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므로 도시 전역을 운행할 수 있어, 요금은 전차보다 비쌌으나 버스 이용자수는 계속 증가하였다.

1957년 버스 이용자수가 전차 이용자수를 능가하게 되었고, 시내 대중교통수단으로서 버스가 전차보다 더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도로의 혼잡, 교통의 방해, 지하도 건설 등을 이유로 1968년 전차의 운행이 정지되자 버스가 서울시내 유일의 대중교통수단으로 등장하였다.

1903년 고종을 위해 처음 등장한 자동차는 점차 그 수가 증가했고 1920년대부터 운행되기 시작한 택시도 서울시민을 위한 주요 교통수단이 되었다. 인구 급증에 의한 자동차의 증가, 도로의 부족 등은 새로운 교통수단의 필요성을 초래해 결국 1974년 지하철이 개통되었다.

지하철은 전철과 연결되어 서울 부근의 지역과 수원 · 인천까지 운행됨으로써 대도시권 형성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1980년대 들어 지하철 2·3·4호선이 연이어 개통했고, 제2기 지하철인 5·6·7·8호선의 개통 운행에 이어 9호선이 개통되었다.

실제로 1일 시민교통량 수송분담률을 보면 서울시내 교통수단의 역할 변화를 추측할 수 있다. 즉, 1990년에는 버스 이용자 43.3%에 이어 지하철 이용자가 18.8%로 두 번째를 차지하였다. 그밖에 승용차와 택시 이용자가 각각 14.0%와 12.8%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1996년에는 버스와 지하철 이용자가 각각 34.9%와 34.1%를 차지해 거의 비슷한 정도를 보이고 있다. 또 승용차와 택시 이용자는 각각 13.4%와 8.2%를 차지해 교통수단별 수송분담률 순서에는 변함이 없다. 그러나 1996년의 수송분담률을 1990년의 경우와 비교하면, 지하철의 경우만 급증했을 뿐 버스 · 승용차 · 택시는 수송분담률이 모두 감소했음을 알 수 있다.

아직은 버스가 서울시민의 중요한 운송수단이나 계획 중인 지하철이 모두 완성되어 서울시 대부분의 지역이 지하철 역세권 내에 들게 되면, 서울의 교통체계는 지하철을 중심으로 하는 대중교통체계로 바뀌리라 예상된다. 더구나 자가용승용차의 경우 버스나 택시의 경우와는 달리 수송분담률은 감소했으나 실질 이용자수는 증가해, 승용차의 증가가 버스 및 택시의 이용률 감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따라서 미래의 교통은 지하철 · 자가용승용차 · 버스 · 택시가 공존하는 가운데 지하철과 자가용이 주를 이룰 것으로 보인다.

관광

500년간 백제의 도읍지이자 또한 조선왕조 이후 600년의 수도로서 한국의 문화유산이 집중되어 있는 민족문화 · 예술의 중심지인 서울은 여러 고궁과 성곽을 비롯해 발 닿는 곳마다 사적지요, 유서 깊은 유적들이 산재해 있다.

서울은 고대와 현대가 서로 어울려 공존하면서 전통을 계승, 발전해 가고 있으며, 도시와 자연관광을 겸해 즐길 수 있는 큰 자원권(資源圈)을 형성한다. 활엽수와 침엽수가 대보화강암과 어우러진 수려한 암봉으로 이어진 산줄기가 동서로 뻗어 있고,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과 푸른 기슭을 지니고 있으며, 경승을 이루는 북악산 · 낙산 · 남산 · 인왕산의 내사산과 삼각산 · 도봉산 · 관악산 등의 산악이 자리 잡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동서로 흐르는 수도의 젖줄인 한강을 사이에 두고 강남 · 강북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현대적 시가지와 청계천 복원으로 이루어진 도심 하천 구간의 경관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문화재의 보고라 할 수 있는 관광 서울의 매력은 찬란한 6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고궁들로 집약된다.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경복궁은 조선왕조의 정궁(正宮)으로 근정전 · 사정전 · 강녕전 · 교태전 · 자경전 · 경회루 · 동궁전 · 향원정이 있으며, 건청궁을 비롯한 부속건물지가 발굴되어 중건을 기다리고 있다. 특히 조선왕조 정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어 서울을 상징하는 관광자원으로 구실하고 있다. 창덕궁은 조선왕조의 5대 궁궐 가운데 가장 잘 보존되어 온 궁궐로 특히 부용지를 비롯한 후원 지역의 전통정원으로서의 아름다움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데 큰 가치로 부각되었다. 이밖에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된 동궐로서, 덕수궁(경운궁)은 대한제국의 황제궁으로서의 의미를 간직한 소중한 관광자원이다.

고적으로는 독립협회가 자주독립정신을 선양하기 위해 세운 독립문, 조선왕조 역대 임금과 왕비들의 신주를 모신 종묘, 사직의 제사를 위한 사직단, 동묘, 성균관, 보신각종, 강감찬의 유적지인 낙성대, 근대우편사업의 발상지인 우정총국, 고종 즉위 40년을 기념해 세운 칭경기념비전 및 내사산의 자연적 지형을 이용해 축조한 서울 한양도성 등이 있다. 이밖에 강동구와 송파구 일대의 백제시대 문화유적과 암사동의 신석기시대 유적이 연차적으로 정비, 복원되어 사적공원 및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대한불교조계종의 총무원이 있는 조계사가 도심 한복판에 있고, 도선사 · 봉은사 · 화계사 · 흥천사 · 승가사 · 진관사 · 봉원사 등의 사찰이 있다.

서울시가의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는 남산공원에서는 세계에서 세 번째 높은 서울타워가 있어 사방으로 크게 발전한 수도의 모습을 조망할 수 있다. 3·1독립선언서가 낭독된 유서 깊은 탑골공원에는 팔각정을 중심으로 원각사지 십층석탑 · 대원각사비 · 앙부일구의 받침돌 등을 비롯한 문화유산이 보존되어 있다. 이 밖에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푸른 꿈을 심어주는 서울어린이대공원 · 드림랜드 · 사직공원 · 삼청공원 · 효창공원 · 보라매공원 등이 녹지의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각종 경기장이 있는 올림픽공원은 세계적인 공원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백제 초기의 몽촌토성(夢村土城)과 어우러져 고대와 현대에 이르는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데 귀중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문화의 중심지인 만큼 예술의 전당, 국립극장, 세종문화회관, 석촌호수의 서울놀이마당과 롯데월드, 삼청각, 한국의 집 등의 각종 문화시설이 있어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지는 문화공연과 예술활동을 보여주고 있으며, 잠실벌에는 서울올림픽대회 때 각종 경기장 등의 스포츠 시설이 들어선 종합운동장이 있다.

한편, 도심 반경 45㎞ 내의 수도권을 지하철과 전철이 1시간 거리로 감싸 교통수송의 대량화와 고속화 시대가 전개되면서 서울 관광의 안락함과 매력에 한층 빛을 더해 주게 되었다.

더욱이 한강종합개발사업으로 동쪽의 천호대교에서 서쪽의 행주대교 너머까지 한강의 남 · 북안을 달리는 상쾌한 강변로는 한강의 유유한 풍물들로 새롭게 단장되었으며, 한강은 산뜻한 유람선이 떠다니고 여의도에 63층의 빌딩이 세워져 경관이 더욱 돋보이게 되었다.

또한 인왕산 산허리를 달리며 북악의 정상을 누비는 인왕 · 북악의 두 산길은 남산공원의 순환도로와 함께 남 · 북에서 서로 서울의 장관을 마주 보게 한다. 관광 관련시설로는 국제수준급의 관광호텔을 비롯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일반 호텔과 여관 등이 완비되어 있다.

특히 서울올림픽대회를 계기로 국력을 과시하고 2002년 월드컵을 개최하는 도시로서 역사와 전통을 가진 문화민족임을 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서울은 눈부신 건설과 도시정비로 한강변의 기적을 이룩함과 동시에, 격조 높은 도시환경을 조성하고 문화도시를 건설하게 되었다.

근래에 들어 외국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은 인사동 전통문화거리와 북촌 전통공예 창작활동과 체험공간으로 우리나라의 유구한 역사와 수준 높은 문화를 알리는 공간이 되고 있다. 그리고 동대문시장 · 남대문시장 · 황학동벼룩시장 · 봉익동귀금속시장 등 우리의 생산 물산의 다양함과 높은 소비문화를 살필 수 있는 공간으로 알려져 있다.

구(區)
강남구(江南區)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39.50㎢이고, 인구는 57만 6495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삼성동이다. 본래 경기도 광주군 대왕면(大旺面)과 언주면(彦州面)에 속하였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었으며, 성동구언주출장소와 송파출장소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75년 서울특별시의 구 증설에 따라 성동구로부터 강남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1979년 탄천 이동 지역의 명일 · 고덕 · 암사 · 천호 · 성내동 등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강동구가 분구되어 천호출장소가 폐지되었다. 1988년에는 서초구가 분구되었다.

이 지역의 대부분은 한강의 침식을 받아 저기복의 구릉지를 이루며, 북쪽의 한강 연안에는 충적층이 발달하고 있다. 동쪽의 탄천은 하안공사가 이루어지고 제방도로가 가설된 상황에서 강 복판으로 자유곡류하며 하구에서 양재천을 만나 한강으로 유입된다. 남쪽에는 대모산(大母山, 293m) · 구룡산(九龍山, 306m) 등이 연봉을 이루어 자연경계를 형성하고 있다.

1960년대 말부터 영동개발 붐으로 농촌경관에서 주택지구로 발달하였으며, 저인구밀도에 중 · 고등학교 같은 교육기관의 신설과 이전으로 주거지역으로서 양호한 조건을 갖추어나갔다. 최근 사무실용 빌딩의 건설, 각종 연구소 등의 이전, 그리고 백화점 · 쇼핑센터 등의 집중적인 개점과 건설로 생활여건이 완비되어가는 주거지역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구청이 자리 잡은 삼성동 주변은 아파트단지와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한국종합무역센터 · 종합전시관 · 한국전력공사 · 관세청 등의 주요 기관이 있다. 한국감정원은 본래 삼성동에 있었으나 2013년 8월 대구광역시 동구 이노밸리로 291(신서동)으로 이전하였다. 압구정동은 고급 아파트촌으로 유명하며 쇼핑센터와 백화점 등 강남의 고급 상권을 형성한다.

신사동에서 논현동에 이르는 강남대로 주변은 강남구의 중심거리를 이룬다. 또한 도곡 · 개포 · 대치 · 일원 · 수서동 등은 새로운 대단위 아파트단지로 개발이 거의 이루어졌다.

강북을 잇는 교통수단은 1960년대까지는 한남동나루와 뚝섬나루를 내왕하는 나룻배를 이용했으나, 한남대교 · 영동대교 · 성수대교 · 동호대교 등의 가설로 도심과 바로 연결된다. 또한 현대도시의 주요 교통수단인 자동차 이용에 적합하게 토지이용이 계획되어 주요 간선도로망은 바둑판식으로 직선화되어 있으며, 지하철 2·3·7호선이 연결되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역삼동 청동기 시대 주거지와 삼성동에 선 · 정릉이 있으며, 전통사찰 봉은사에는 선불당 · 판전 등이 있고, 백제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삼성동 토성이 있다. 그리고 마을의 안위를 비는 동제당들이 역삼동 등에 남아 있다.

삼성(三成) · 신사(新沙) · 논현(論峴) · 압구정(狎鷗亭) · 청담(淸潭) · 대치(大峙) · 역삼(驛三) · 개포(開浦) · 포이(浦二) · 일원(逸院) · 수서(水西) · 도곡(道谷) · 세곡(細谷) · 자곡(紫谷) · 율현(栗峴) 등 15개 동이 있다.

강동구(江東區)

시의 동단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4.59㎢이고, 인구는 45만 8658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성내동이다. 암사동 유적에서 보듯 선사시대부터 생활의 터전이고 백제의 위례성이 있던 곳으로 추정된다. 대부분이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龜川面, 1907년에 九川面) 지역으로 한적한 농촌이었다.

1963년 서울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지역이 성동구에 편입되었으며, 천호출장소가 설치되어 이곳을 관할하게 되었다.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구되자 이에 속했으며, 1979년 강남구에서 강동구로 분리, 신설되었고, 1988년 송파구가 분구되어 나갔다.

남한산성이 있는 청량산에서 발원한 성내천(城內川) · 고덕천(高德川) 등이 한강으로 합류되며, 그 연안에 넓은 충적지를 이루어 땅이 비옥해 밭농사 · 논농사 지역으로 이용되어 왔다. 근래 천호동 일대에는 방적 · 식품 · 금속 ·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암사동은 점촌(店村)이라 하여 도자기 생산지로 유명했는데, 1925년 홍수 때는 옹기를 굽는 이 일대가 모두 물속에 잠겼던 일도 있었다. 광복을 전후해서는 성내동을 중심으로 벽돌 · 옹기 · 기와 · 토관 · 화분 등을 만드는 대규모의 연와공장이 자리 잡기도 하였다.

1970년대 중반부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해 천호지구와 고덕지구 등의 택지개발사업으로 크게 변모했으며, 점차 인구 증가와 도시 정비가 이루어졌고 생태공원 등 녹지공간을 사려 모범적이며 쾌적한 도시환경을 이루고 있다.

한강의 동쪽 끝에 있는 강동구를 강북 지역과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수단으로 지하철 5호선과 광진교(廣津橋) 및 천호대교(千戶大橋)가 있다. 1976년에 천호대교가 개통되어 천호동과 길동을 거쳐 경기도 도계에 이르는 천호대로가 건설되었고, 이 도로와 맞물리는 여러 갈래의 도로가 신설되었으며, 1999년 잠실역까지 지하철 8호선의 일부구간이 개통되어 교통을 더욱 원활하게 되었다. 또한 천호대로 · 풍납로(風納路) · 선사로(先史路)의 교차 사거리인 천호동 로터리는 상업중심지역이며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문화유적은 우리나라 대표적인 선사유적인 암사동 유적이 있다.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유적지 인근 대지 1만 평 위에 움집과 전시관을 복원하고 공원으로 꾸며 현장교육과 관광명소가 되었고 있다.

주요 기관으로는 서울시립종합직업훈련원, 한국시각장애자복지회, 암사 · 팔당수원지, 보훈병원 등이 있다. 성내(城內) · 강일(江一) · 상일(上一) · 명일(明逸) · 고덕(高德) · 암사(岩寺) · 천호(千戶) · 길(吉) · 둔촌(遁村) 등 9개 동이 있다.

강북구(江北區)

시의 동북부의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3.60㎢이고, 인구는 33만 87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수유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을 합친 노해면에 속하였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성북구 노해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3년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의 관할지역이 성북구에서 분리되어 도봉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였으며, 1995년 우이천을 경계로 그 서쪽지역을 관할구역으로 하여 도봉구에서 강북구가 분구되었다.

지형적으로 서부 산지와 중앙 저지, 동부 산지로 구분되는데, 서부 산지는 백두대간의 철령(鐵嶺)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한북정맥의 일부이다. 서울의 진산(鎭山)인 삼각산(837m)을 이루는 백운봉(白雲峰) · 인수봉(仁壽峰) · 만장봉(萬丈峰) 등의 암봉이 솟아 있다. 북동쪽으로 흐르는 우이천은 여러 물줄기를 합류하여 중랑천에 흘러든다. 산 아래 낮은 부분은 주택지로 개발되어 있으며, 산세를 이루고 있는 부분은 수도권개발지역 · 군사보호구역 등으로 남아 있어 비교적 자연이 잘 보호되고 있다. 따라서 공원녹지지역이 강북구 전체 면적의 54.8%에 이른다. 특히 우이동 계곡은 무더운 여름철에 서울시민의 피서지로 각광을 받고 있으며 일찍이 우이구곡(牛耳九曲)으로 아름다운 풍광이 유명하였다.

예전에는 중랑천 · 우이천 연안의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를 짓고 채소 · 화훼 · 과수재배가 이루어졌으나 도시화에 따라 거의 사라졌다. 그리고 도심개발정책으로 미아동 지역에 저소득층 주민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잡화 · 의류 · 가발 등과 하청에 의한 기계 · 전자부품 생산 등의 가내공업이 한때 활발하였다. 그러나 현재는 일부지역에서 의류 하청공장이 소규모로 명맥을 이어 가고, 번동 지역에는 아파트형 공장에서 봉제 · 전자제품이 생산되고 있다. 상가는 도봉로 좌우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수유삼거리와 미아삼거리는 상업중심지이다.

남북으로 뻗은 도봉로는 경원가도(京元街道)로서 구의 중심길이며, 길음동에서 우이동으로 연결되는 삼양로(三陽路)는 도봉로의 보조 간선으로 교통난 해소에 큰 역할을 한다.

그리고 최근 우이동과 상계동으로 진입하는 방학로(放鶴路)와 수유리와 월계동을 잇는 한천로(漢川路)가 개통되어 이 지역의 교통불편을 덜어주고 있다. 한편, 사당동에서 당고개를 잇는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도심과 수원 · 안산 방향으로의 교통이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으로 도선사(道詵寺) 마애불입상, 화계사(華溪寺) 대웅전이 있다. 그리고 우이동 도선사 길 입구에는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중 한 사람인 손병희(孫秉熙)의 묘소와 봉황각(鳳凰閣)이 있다. 그 외 김창숙 · 이준 · 신익희 · 여운형 · 조병옥 등 근대 역사인물의 묘역이 있다. 특히 수유동에는 4·19혁명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민주학도 216명의 넋을 봉안한 4·19묘지가 있는데, 대대적으로 확장공사를 해 1995년 4월 국립묘지로 승격되었다.

수유(水踰) · 미아(彌阿) · 번(樊) · 우이(牛耳) 등 4개 동이 있다.

강서구(江西區)

시의 서단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41.43㎢이고, 인구는 58만 9074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화곡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김포군 양동(陽東) · 양서면(陽西面)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어 영등포구 양동 · 양서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68년 양동출장소가 양서출장소로 통폐합되었으며, 1977년 강서구로 분구 신설되었다. 그후 목동 · 신정동 · 신월동 지역에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조성되어 인구가 급증하자 1988년 양천구를 분리 독립시켰다.

한강 하류연안의 김포평야에 속하며 한강변에 작은 구릉을 이루고 있다. 즉 평야지대에 낮게 솟은 개화산(開花山, 129m), 수명산(壽命山, 117m), 우장산(雨裝山, 102m), 궁산(宮山, 75m), 까치산(87m) 등이 구릉 산으로 남아 있다. 한강으로 유입하는 가양천(加陽川) · 안양천(安養川) · 방화천(傍花川) 등의 하천이 있어 관개수로로 발달되어 있다.

지역 내부는 주택지역 · 공업지역 · 농촌지역 · 개발제한구역 · 녹지지역 등의 경관으로 뚜렷하게 분화되어 있다. 1963년 정부가 서울 인구를 강남으로 유치하려는 시도로 화곡동에 10만 단지 주택지를 조성한 이후 서울시 서부의 최대 주택지역을 이루고 있다. 그후 공항로를 중심으로 교육 · 상업 · 문화 시설이 발달하였으며, 양천길을 따라 아파트 등 주거시설과 전문상가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그리고 가양 · 등촌 · 염창동 등지에 많은 공장이 건설되었는데, 주업종은 기계 · 섬유 · 화학 등이다.

한편, 우리나라 항공교통의 중심지인 김포공항이 있어서 교통량이 많은 곳이다. 김포공항과 도심을 잇는 공항로는 1980년 성산대교가 개통됨으로써 강서구와 경기도 김포시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생활도로가 되었다. 또한 경인고속도로 · 남부순환도로가 이곳을 통과하며, 까치산터널의 완공으로 공항로와 경인고속도로가 직결됨으로써 주변의 교통이 매우 원활해졌다. 또 지하철 5호선 간이 지나게 되어 지역주민과 김포공항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교통이 더욱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은 약사사, 약사사 삼층석탑, 양천고성지(陽川古城址), 양천향교(陽川鄕校) 등이 있으며 향교 앞에는 역대 양천현감들의 선정비(善政碑)가 서있다.

화곡(禾谷) · 염창(鹽倉) · 등촌(登村) · 가양(加陽) · 마곡(麻谷) · 내발산(內鉢山) · 외발산(外鉢山) · 공항(空港) · 방화(傍花) · 개화(開花) · 과해(果海) · 오곡(五谷) · 오쇠(五釗) 등 13개 동이 있다.

관악구(冠岳區)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9.57㎢이고, 인구는 50만 966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봉천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동면(東面)이었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관악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68년 관악출장소가 폐지됨에 따라 영등포구의 직할로 편입되었다가 1973년 영등포구에서 관악출장소 관할구역을 중심으로 관악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1980년에는 관악구에서 동작구가 분구 신설되었다.

구 전체가 관악산 북쪽 사면에 위치하며 그 사이에 흐르는 도림천 사이로 주거지가 발달해 있다. 서쪽으로 금천구, 동쪽으로 서초구, 북쪽으로 동작구, 남쪽으로 경기도 과천시 · 안양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관악산을 중심으로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지역이 넓으며, 인접한 영등포구 · 구로구가 대단위 공업지역인 데 비해 공장지역이 형성되지 못하고, 이 지역의 유휴노동력을 대상으로 하는 소규모의 전자 · 섬유 · 가발 · 농약공장 등이 각처에 분산되어 있다. 도심지역에 견줄 만한 큰 상업권이 형성되어 있지는 않으나, 봉천동 사거리와 신림동 사거리가 서울대학교와 연계되어 상업중심거리로 발전하고 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경인구와 철거민의 정착촌 전형을 이루었던 관악구는, 도시재개발사업의 진행으로 짧은 기간 동안에 정돈된 주택지구로 탈바꿈하였다. 1960년대 초까지만 해도 관악산 자체라고 할 정도였으나, 철거민의 정착 이후 1975년 서울대학교가 옮겨옴에 따라 점차 신흥주택지역으로 변하였다.

서울 도심부와의 거리가 가깝고 교통수단이 잘 정비되어 있으며, 남부순환로와 지하철 2호선의 개통으로 강남 · 영등포 지역 등과의 연결이 더욱 신속 · 원활해졌고, 낙성대길 · 은천길 · 난곡길 등이 구 내외를 동서남북으로 연결하고 있어 교통의 요충지를 형성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사당동 백제요지 · 봉천동 마애미륵불 · 강사상 묘역 등이 있으며, 특히 봉천동에 낙성대와 낙성대 유지가 있어 고려시대에 거란군을 물리친 강감찬의 행적을 살필 수 있는 산 교육장이 되고 있다. 또 중구 회현동에 있던 구 벨기에 영사관이 남현동으로 옮겨져 있으며, 신림동 굴참나무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봉천(奉天) · 신림(新林) · 남현(南峴) 등 3개 동이 있다.

광진구(廣津區)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7.06㎢이고, 인구는 36만 369명(2015년 현재)이다. 화양(華陽) · 능(陵) · 중곡(中谷) · 구의(九宜) · 광장(廣壯) · 자양(紫陽) · 군자(君子) 등 7개 동이 있다. 구청 소재지는 자양동이다.

본래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경성부를 축소시키면서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에 편입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의 확장에 따라 성동구에 편입되어, 뚝도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95년 동일로를 경계로 성동구에서 분구되었다.

구의 남쪽은 한강에 접하며, 동쪽으로는 아차산을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 아천동과 접하며, 북쪽으로는 중랑구 · 동대문구와 접하고, 서쪽으로는 성동구와 접한다. 광진구의 한강변에는 영동대교 · 청담대교 · 잠실대교 · 잠실철교 · 올림픽대교 · 천호대교 · 광진교 등이 놓여져 있어 강남 지역과 강북 지역을 연결하는 도심의 관문이 되고 있다.

자연녹지 지역은 32.14%를 차지하고 있는데 용마봉(348m)을 정점으로 하는 아차산 산지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100m 이하의 저지대를 이룬다. 서부 경계의 중랑천과 청계천이 흘러와 합류해 다시 한강 본류에 유입하면서 이룩한 범람원에 해당되는 저지이다. 해발 50m 이상의 지역이 겨우 20%밖에 안 되는 평탄한 충적평지이므로, 시가지 발달과 교통발달에 유리한 지형조건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주택과 공공기관이 밀집해 있다.

교통은 지하철 2·5·7호선이 동서남북으로 지나고, 천호대로 · 동일로 · 강변대로 · 용마산길 · 아차산길 등의 대로가 나 있어 강남과 강북간의 교통소통이 원활해 새로운 교통의 요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동서울종합터미널이 위치해 있다. 특히 화양동지구는 주변에 건국대학교 · 세종대학교 등이 있어 젊은이의 거리로 변모하고, 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위락시설이 밀집해 있다. 아차산 기슭에는 국제관광시설로 건립된 쉐라톤워커힐호텔이 있다.

문화유적은 어린이대공원이 있는 유강원(裕康園, 순명왕후 능) 터의 석물 일괄과 아차산성 · 아차산 고구려 보루군 · 낙천정지 등이 있으며, 화양동느티나무는 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리고 화양정(華陽亭)은 살곶이목장과 관련하여 세종 때 지어졌던 곳으로 많은 일화와 더불어 그 터가 보존되고 있다.

구로구(九老區)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0.12㎢이고, 인구는 42만 209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구로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북면(도림 · 구로리)과 동면(독산 · 가리봉 · 시흥리), 그리고 경기도 부천군 계남면(고척 · 개봉 · 오류 · 궁리) 등에 속하였다. 1936년에는 시흥군 북면의 일부지역을 경성부로 편입해 영등포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1949년 8월에는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경기도 시흥군에 속해 있던 구로(九老) · 도림리(道林里)가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동부지역인 가산(加山) · 시흥리(始興里) 등은 시흥군 동면(東面)에 속했던 것이 1963년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관악출장소 관할 내에 속하게 되었고, 서부지역인 소사읍(素砂邑: 지금의 부천시)의 일부는 오류출장소 관할 내에 속하였다. 1980년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오류 · 고척동 등을 합해 구로구로 분구되었고, 1995년 3월 1일 남쪽지역의 가산 · 독산 · 시흥동이 금천구로 분리되었다.

동쪽으로 관악산 능선을 경계로 관악구와 접해 있고, 서쪽은 부천시, 남쪽은 안양시 · 광명시, 북쪽은 도림천을 경계로 영등포구 · 양천구와 접해 있다. 서쪽으로는 경인선과 경인로를 따라 도시가 발달하였는데 해발 150m 이내의 낮은 구릉으로 되어 있고, 남쪽으로는 안양천과 경부선을 따라 저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구 중앙에 안양천이 흐르며 김포준평원(金浦準平原)으로 이어진다.

1971년 구로동에 공영주택 · 간이주택 · 공익주택 등 1,000여 채가 건축되면서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특히 당시에 구로공업단지의 전신인 구로수출산업단지가 들어섰다. 구로구의 공장지역은 한국수출산업단지가 들어선 구로동과 가리봉동이 중심을 이루었는데, 이곳은 영등포 공업지역과 연결되어 공장지대로서의 인상이 강화되었다. 근래에 구로동과 이어진 가산동 일대의 공업단지는 시대변화에 따라 서울디지털산업단지로 면모를 바꾸었다. 구로 지역이 공업단지가 된 것은 교통 외에도 풍부한 수자원, 풍부한 노동력, 그리고 저렴한 토지 가격 등의 유리한 조건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공장이 밀집하여 안양천이 오염되어 환경파괴문제가 심각해지기도 하였다. 그후 공장이 이전되고 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고 안양천 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환경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지하철 7호선이 개통되고, 경인 · 경수 간의 철도가 분기되어 출퇴근 때 교통이 편리하고, 오류동 지역에는 시가지가 조성되어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매우 적은 편으로 유진오 별장, 원각사, 관음사, 정선옹주 묘, 함양 여계 묘역 등이 있다. 고척공구상가 · 구로기계공구상가 · 중앙유통단지 등 명소가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구로(九老) · 신도림(新道林) · 가리봉(加里峰) · 고척(高尺) · 개봉(開峰) · 오류(梧柳) · 천왕(天旺) · 항(航) · 온수(溫水) · 궁(宮) 등 10개 동이 있다.

금천구(衿川區)

시의 남서단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3.02㎢이고, 인구는 23만 6284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시흥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지역이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시흥군 동면(시흥 · 안양 · 신림리) 등이 되었고, 1936년에는 시흥군 북면의 일부지역을 경성부로 편입해 영등포출장소에서 행정을 담당하였다. 1949년에는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이 확장되면서 경기도 시흥군 동면에 속해 있던 구로(九老) · 도림(道林) · 번대방리(番大方里)가 영등포구로 편입되었다. 동부지역인 가산(加山) · 시흥리(始興里) 등은 1963년에 서울특별시 영등포구로 편입되어 관악출장소 관할에 속하였다. 1980년 김포군에서 영등포구로 편입된 오류 · 고척동 등을 합해 구로구로 분구되었고, 1995년 남쪽지역인 가산 · 독산 · 시흥동이 금천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동쪽으로 관악구, 북쪽으로는 구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서쪽과 남쪽으로는 서울시의 남서부 경계로서 경기도 광명 · 안양시에 각각 면하고 있다. 관악산(629m)의 서쪽 기슭에서 안양천에 이르는 지역에 발달된 지역이다. 따라서 금천구는 남동쪽이 높아 해발 390m에 이르며 북서쪽으로 갈수록 낮아지고, 서쪽에는 안양천이 북으로 흘러 한강에 합류한다.

1968년에 한국수출산업단지 제2공단, 1973년에 제3공단이 가산동에 들어서고 인근에 많은 공장과 주거지역이 밀집해 있어 공기오염 등 환경문제를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근로자들의 숙소로서 이른바 벌집 또는 닭장집이라고 하는 주택이 건립되기도 하였다. 그후 공단이 디지털산업단지로 바뀌고 안양천 정화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환경이 날로 좋아지고 있다.

시흥대로가 구의 중앙을 남북으로 지나고, 남부순환로가 동서 방향으로 지나며, 서부간선도로가 서해안고속도로와 이어져 도로교통이 발달해 있으며, 경부선 철도가 남북으로 구의 서쪽에 안양천을 따라 놓여 있어 철도교통도 편리하다. 이러한 철도와 도로망의 발달은 서울의 남서쪽 제일 바깥부분에 치우쳐 있는 금천구의 지리적 입지의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지방을 잇는 교통상 요지가 되고 있다.

시흥대로를 중심으로 도로변 시가지화된 지역에는 일찍부터 주거지가 발달해 있으며 서울디지털산업단지가 있는 가산동은 타지역에 비해 도로망이 넓게 발달하였다. 서울특별시의 전체 면적 605㎢의 2.2%를 차지하는데, 이는 중구에 이어 두 번째로 작은 면적이다. 이 지역에는 외국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산업단지에 많은 외국인 근로자들의 거주함으로써 나타난 현상으로 보인다.

문화유적은 순흥안씨 양도공파 묘역, 호압사 석불좌상(약사불), 한우물 및 호암산성이 있다. 가산(加山) · 독산(禿山) · 시흥(始興) 등 3개 동이 있다.

노원구(蘆原區)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35.44㎢이고, 인구는 57만 458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상계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海等村) · 노원면(蘆原面)에 속했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두 면을 합친 노해면(蘆海面)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어 노해출장소 관할이 되었으며, 1973년 성북구에서 분구된 도봉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도봉구에서 노원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서쪽으로 도봉구, 북쪽으로 경기도 의정부시, 동쪽으로 경기도 남양주시 별내면, 남쪽으로 중랑구와 접해 있다. 지형적으로 서부 저지와 동부 산지로 구분된다. 서부는 월계 · 번동 등의 구릉지를 제외하면 마들평야의 낮은 지대를 형성한다. 이 저지대의 중앙에 한천(漢川, 중랑천)이 흐르는데, 서쪽의 우이천(牛耳川)과 동쪽의 태릉천(泰陵川)을 합류하여 한강으로 유입된다. 동부 산지에는 불암산과 수락산이 있다. 이들 산지의 서쪽 사면과 산록에 있는 동네가 상계 · 중계 · 하계동이다. 수락산 · 불암산의 안부(鞍部: 산마루가 말안장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가 덕릉현(德陵峴, 덕릉고개)이며, 이곳에서 남서쪽으로 흐르는 당현천(堂峴川)은 많은 토사를 퇴적시키면서 한천으로 흘러 들어간다.

서울과 의정부시를 연결하는 도봉로와 마들평야를 관통하는 동일로(東一路) 연변에 새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시가지가 조성되었으며, 북쪽으로 개발제한지역과의 사이에 있는 농경지가 시가지개발의 확장으로 계속 잠식되고 있다.

상계 · 중계 · 도봉동 지역은 재개발계획 등에서 철거된 주민들의 이주정착지로 배정되어 영세주민의 밀집지역이 형성되었다. 1960년경부터 시작된 도심재개발사업으로 철거당한 주민들이 이 지역에 자리를 잡게 되었고, 1970년대 초부터 시가지가 크게 확장되면서 택지화되어 주택건설이 활발해졌다. 계속된 아파트의 계속 신축으로 현재 서울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구가 되었다.

1911년에 부설된 경원선이 지나는데, 지하철 1호선과 연계되어 기존의 광운대역 · 창동역 외에 월계역 · 녹천역이 신설됨으로써 도시교통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산수가 수려한 수락산 · 불암산 등에는 유적이 많이 분포해 있어 서울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가 되었다. 공릉동에는 국제사격장과 실내수영장, 태릉스케이트장, 공원시설을 갖춘 유원지 등이 있어 관광지로 유명하다. 아울러 이곳에는 1971년에 세운 태릉선수촌과 태릉골프장이 있으며, 주변의 갈비집 · 배밭 등이 유명해 주말에 서울시민이 여가를 위해 즐기는 곳이었는데, 이제 거의 다 아파트 공간으로 변하였다.

문화유적은 문정왕후 윤씨의 태릉, 명종과 인순왕후 심씨를 합장한 강릉이 있다. 육군사관학교 내에는 삼군부 청헌당 · 연령군 이훤 신도비가 있으며, 하계동에는 서울 이윤탁 한글영비가 있다. 또 월계동각심재와 정간공 이명 묘역, 서울 초안산 분묘군, 충숙공 이상길 묘역 등이 있다. 수락산 · 불암산 기슭에 학도암 · 불암사 · 흥국사 · 석천사 · 수락사 · 내원암 등의 많은 사찰이 있다.

상계(上溪) · 중계(中溪) · 하계(下溪) · 월계(月溪) · 공릉(孔陵) 등 5개 동이 있다.

도봉구(道峰區)

시의 북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0.70㎢이고, 인구는 35만 124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방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해등촌면에 속했으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노원면을 합친 노해면에 속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성북구에 편입되어 노해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숭인출장소와 노해출장소의 관할지역을 통합하여 성북구에서 도봉구가 분구 신설되었다. 1988년에는 노원구가 분리되어 나갔다.

구의 동쪽은 노원구, 서쪽과 남쪽은 강북구, 북쪽은 경기도 양주시 · 의정부시와 접해 있다. 지형적으로 서부 산지와 중앙 저지로 구분되는데. 서부 산지는 백두대간 철령 부근에서 갈라져 서남쪽으로 달리는 한북정맥이며,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과 도봉산 사이의 준령이 뻗어있다. 중앙 저지는 우이천과 도봉천이 흘러 중랑천으로 합류된다. 남쪽은 서울의 시가지에 연속되는 주택지구이고 북쪽은 산림지로 되어 있다. 과거에는 중랑천 연안의 평야를 중심으로 벼농사가 잘되고 채소 · 화훼 · 과수재배와 양계 · 양돈 · 육우사육 등이 활발했으나, 도시화에 따라 거의 아파트단지로 변하였다.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 · 의류 · 가발 등과 하청에 의한 기계 · 전자부품 생산 등의 가내공업이 횔발하다. 또 도시화 이전에 공업이 발달했던 창 · 도봉동 일대는 섬유 · 화학공업의 비중이 크다. 상가는 도봉로 좌우로 길게 형성되어 있으며 수유삼거리와 미아삼거리는 상업중심지가 되고 있다.

남북으로 뻗은 도봉로는 구의 남북으로 통하는 중심 길이며, 우이동과 상계동으로 진입하는 방학로(放鶴路)와 수유리와 월계동을 잇는 한천로(漢川路)가 개통되어 이 지역의 교통 불편을 덜어주고 있다. 그리고 신흥 주택지 개발에 따른 시루봉길 · 해등길 · 쌍문동길 · 노해길 · 창동길 등이 정비되어 교통을 원활하게 해주고 있다. 또한 지하철 1호선과 연결되는 국철과 사당동에서 상계동을 잇는 지하철 4호선이 개통됨에 따라 도심으로의 진입이 원활해졌다.

문화유적은 도봉동에 천축사(天竺寺) · 도봉서원(道峰書院)이 있으며 도봉계곡에는 빼어난 암각글씨가 있고, 방학동에는 연산군의 묘소와 양효공 안맹담과 정의공주 묘역이 있다. 쌍문(雙門) · 방학(放鶴) · 도봉(道峰) · 창(倉) 등 4개 동이 있다.

동대문구(東大門區)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4.21㎢이고, 인구는 36만 15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신설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 및 남부의 두모방(豆毛坊) 지역이었는데, 1914년 창신 · 숭인동 외의 지역은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으로 편입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동부출장소의 관할 내에 속하였다. 1943년 각 출장소를 폐지하고, 구제(區制)를 실시하면서 동부출장소 관할지역에 동대문구와 성동구를 구분, 설치하였다. 1949년 동대문구에서 성북구가 분구되었다. 이후 여러 차례의 행정구역 변경을 거쳐 1988년 중랑구가 분구되어 나갔다.

동쪽은 중랑천을 경계로 중랑구, 서쪽은 정릉천(貞陵川)을 경계로 종로구, 남쪽은 정릉천을 경계로 성동구, 북쪽은 천장산 능선을 경계로 성북구와 접해 있다. 천장산 기슭과 중앙의 배봉산 지역이 산지를 이루고 정릉천 · 중랑천 유역에는 장안평의 평야가 발달하였다. 장안평은 중랑천 연변의 평지를 이루고 있어, 도심의 팽창에 따라 농경지에서 아파트 주거단지로 변하였다. 그리고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동부 부도심(副都心)의 저지대는 평탄한 지형 때문에 인문(人文)이 발달하기에 좋은 자연환경을 이루고 있다. 철도와 도로망이 사방으로 통하고 주변에 상가가 밀집해 있으며,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인구의 조밀화와 상업기능의 집약화를 가져왔다.

인구가 조밀한 지구는 전농동을 비롯해 이문 · 청량리 · 답십리 · 용두동 등이다. 농경지가 없는 반면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 · 일용품 · 가발 · 의류 · 직조 · 연탄 · 제약 등의 공장이 산재한다. 인구의 집중 분포로 시장이 급속히 확장되었으며, 이에 따라 상품의 거래권도 더욱더 확장되었다. 이제까지의 일상필수품의 상업기능에서 점차 벗어나, 백화점 · 청량리시장 · 종합상가 등 현대식 설비를 갖춘 대형 상가를 중심으로 상업기능이 활기를 띠고 있다. 특히 경동시장은 명절 때는 제수용품, 김장철에는 마늘 · 고추 등 양념류의 거래가 활발한 곳으로 유명하며, 근처에는 한약 건재상들이 모여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청량리동 에는 한국개발연구원을 비롯해 산림청 · 산업연구원 등이 있으며, 휘경동 지역에도 건설부 산하의 건설공무원교육원 · 국립건설시험소 등의 국가연구기관이 진출해 있어 학술연구기관의 중심지로 발전하고 있다.

청량리역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뻗은 철도와 지하철 5호선의 개통으로 도로교통망의 발달로 점차 이 지역은 서울 동부의 관문으로 발전하고 있다. 또한 종로의 연장선상에 있는 왕산로(旺山路)와 망우로 및 사가정길 · 답십리길이 구의 동서를 통과하며, 고산자로 · 홍릉길 · 전농로 와 천호대로와 연결되는 한천로 등 간선도로가 구의 남북의 통과하여 지역발전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제기동에 선농단과 197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향나무가 있으며, 선농단 서쪽에는 보제원(普濟院)이 있어 여행객의 숙박과 진휼 및 경로잔치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청량리동 세종대왕기념사업회 내에는 조선시대에 수표교 옆에 세워져 있던 수표가 이전되어 있고, 영릉에 있던 세종대왕 신도비도 옮겨져 있다. 그 밖에 고종의 후궁 엄비(嚴妃)의 묘소인 영휘원(永徽園)과 영친왕의 장남 진(晉)의 묘소 숭인원(崇仁園) 등이 있으며, 배봉산에는 목장성터와 휘경원이 있었다.

신설(新設) · 용두(龍頭) · 제기(祭基) · 전농(典農) · 답십리(踏十里) · 장안(長安) · 청량리(淸凉里) · 회기(回基) · 휘경(徽慶) · 이문(里門) 등 10개 동이 있다.

동작구(銅雀區)

시의 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6.35㎢이고, 인구는 40만 641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노량진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上北面)과 하북면(下北面)이었다가 뒤에 시흥군 동면과 신동면(新東面) 및 북면(北面)이 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경성부에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에 속했다가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영등포구에 속하였다. 1963년 영등포구신동출장소가 설치되어 그 관할이 되었다가 1973년 신설된 관악구에 편입되었으며, 1980년 관악구에서 분리 신설되었다.

북쪽은 한강과 샛강을 경계로 용산구와 여의도와 접해 있으며, 동작대로를 경계로 서초구와 접해 있다. 북쪽은 국사봉 능선과 도림천을 경계로 관악구와 접해 있으며, 서쪽은 시흥대로를 경계로 영등포구와 접해 있다.

신대방 · 대방동 지역에 모방 · 화학 · 방직 · 제약 등의 큰 공장이 밀집해 있으며, 그 밖에 전자 · 전기기기공장이 있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는 수산물이 공급 전문시장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이 1899년에 개통된 뒤 이듬해에 한강철교가 준공되어 강북과의 교통이 처음 열린 철도의 시발지이며, 지하철 2·4·7호선의 개통으로 사당역 · 이수역 · 상도역 등이 각각 건설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용하고 있다. 간선도로는 한강대교에서 노량진을 거쳐 수원에 이르는 1호 국도와 올림픽대로 · 남부순환로가 있다.

문화유적은 용양봉저정, 사육신 묘, 양녕대군 이제 묘역, 창빈 안씨(昌嬪安氏)의 묘역, 백제요지 등이 있다. 특히 동작동에는 민족의 성역으로 16만 위의 순국영령이 고이 잠들어 있는 국립현충원이 있으며, 이승만 · 박정희 대통령 묘역도 마련되어 있다. 그리고 화장사(華藏寺) · 사자암(獅子庵) 등의 사찰이 있으며, 원불교 서울회관, 조정특수훈련장 등이 있다.

노량진(鷺梁津) · 상도1(上道一) · 상도(上道) · 본(本) · 흑석(黑石) · 동작(銅雀) · 사당(舍堂) · 대방(大方) · 신대방(新大方) 등 9개 동이 있다.

마포구(麻浦區)

시의 중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3.84㎢이고, 인구는 38만 7643명(2015년 현재). 구청 소재지는 성산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성저십리(城底十里) 지역으로 후기에는 용산방(龍山坊)과 서강방(西江坊)에 속하였다. 1911년 고양군의 연희면(延禧面)과 용강면(龍江面)에 속했으나,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어 1944년 서대문구와 용산구의 일부를 합해 마포구가 신설되었다.

동쪽으로 용산 줄기의 능선을 따라 용산구와 접해 있고, 북쪽은 은평구 · 서대문구, 서쪽은 경기도 고양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한강을 경계로 영등포구 · 강서구와 접해 있다. 창천 · 홍제천 · 불광천이 한강으로 유입되며, 와우산 · 노고산 · 성산 · 연희산의 작은 구릉이 이어져 있고 난지도에는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조선 후기 한양으로 집산되는 많은 조세와 물자가 마포나루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상업활동이 번창하였다. 그리고 동교동에서 양화대교에 이르는 구간은 지하철 2·6호선의 개통으로 도로가 확장, 정비됨에 따라 호텔 · 예식장 · 종합상업시설과 고급 상점가가 조성되어 있고, 홍익대학교 앞 지구는 새로운 젊은이의 문화광장이 되고 있다.

영등포 · 강서구 지역에서 도심으로 진입하는 통로로서 도심과 직접 연결되는 간선도로가 놓여져 있다. 그리고 양화대교, 마포대교, 성산대교와 지하철 2호선이 통과하는 당산철교 등이 놓여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으로 절두산 순교지(切頭山殉敎址)와 순교기념관, 외국인 묘지, 공민왕 사당과 한강변에 여러 부군당이 있다.

성산(城山) · 아현(阿峴) · 공덕(孔德) · 신공덕(新孔德) · 도화(桃花) · 용강(龍江) · 토정(土亭) · 마포(麻浦) · 대흥(大興) · 염리(鹽里) · 노고산(老姑山) · 신수(新水) · 구수(舊水) · 현석(玄石) · 창전(倉前) · 상수(上水) · 신정(新井) · 하중(賀中) · 당인(唐人) · 서교(西橋) · 동교(東橋) · 합정(合井) · 망원(望遠) · 연남(延南) · 상암(上岩) · 중(中) 등 26개 동이 있다.

서대문구(西大門區)

시의 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7.61㎢이고, 인구는 31만 2141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연희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반석방(盤石坊)과 반송방(盤松坊), 북부의 상평방(常平坊) · 연은방(延恩坊) · 연희방(延禧坊) 지역이었다. 1914년 경성부 구역이 축소되면서 경기도 고양군 용강 · 연희 · 은평면에 속하였다. 1936년 다시 서울에 다시 편입되고 서부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서대문구가 신설되었다. 1944년 마포구가 분리되었고, 1979년 다시 은평구가 분리 신설되었다.

인왕산 · 안산 · 백련산(白蓮山, 216m) 줄기와 그 사이에 흐르는 홍제천을 중심으로 동쪽은 종로구, 서북쪽은 은평구, 남쪽은 마포구와 접해 있다. 구릉과 한강 인접의 충적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지역이 주택가와 학원가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 의주로 · 신촌로 · 연희로 등 삼각상의 간선도로변을 중심으로 상업지구를 형성하고 있으며 이와 연결된 교통로가 발달해 있다. 그 가운데 이화여자대학교 입구의 양장점과 양품점, 신촌로터리 주변의 음식점과 주점 등이 대표적인 전문상가를 형성하고 있다. 1914년경의선의 개통과 1920년대 연세대학교 · 이화여자대학교의 설립은 이 지역 발달의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대학촌으로 상징된다.

교통은 신촌로와 성산로가 동서를 관통하며 연희로가 홍제천을 따라 남북으로 통한다. 또 지하철 2·3·5호선이 통과되어 도심지와의 소통이 매우 편리하며, 또한 경의선이 통과하여 통일을 향한 전초기지 구실도 한다.

문화유적은 독립문, 서울 영은문(迎恩門) 주초, 백련사(白蓮寺) 명부전(冥府殿) · 삼성전(三星殿) · 극락보전(極樂寶殿) · 범종각(梵鐘閣) · 원통전(圓通殿) 등이 있고, 그 밖에 보도각 백불(普渡閣白佛), 봉원사 대웅전, 무악산 동봉수대 터, 화산군 이연 신도비 등의 유적이 있다. 그리고 서대문형무소역사관과 독립공원이 조성되어 있어 독립운동과 일제의 만행을 살필 수 있는 교육의 장이 되고 있다.

연희(延禧) · 충정로2가(忠正路二街) · 충정로3가 · 합(蛤) · 미근(渼芹) · 천연(天然) · 냉천(冷泉) · 옥천(玉川) · 영천(靈泉) · 현저(峴底) · 북아현(北阿峴) · 대신(大新) · 대현(大峴) · 신촌(新村) · 봉원(奉元) · 창천(滄川) · 홍제(弘濟) · 홍은(弘恩) · 남가좌(南加佐) · 북가좌(北加佐) 등 20개 동이 있다.

서초구(瑞草區)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47.00㎢이고, 인구는 44만 6764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서초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과천군에 속했던 지역으로, 1914년 시흥군 신동면으로 개편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신동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73년 성동구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성동구에서 강남구가 분리 신설되어 이에 속하였다. 1988년 강남구에서 서초구가 분구 신설되었다.

북쪽은 한강을 끼고 있으며, 서쪽은 반포천(盤浦川)을 경계로 동작구, 동쪽은 강남대로를 경계로 강남구, 남쪽은 경기도 과천시 · 성남시와 접해 있다. 한강변을 따라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이루어져 있으며, 저구릉지에는 바둑판식으로 규칙적인 간선도로망을 갖춘 신개발도시로 터전을 잡았다.

한강 연안으로 충적층이 발달한 잠원동 일대는 사질토(砂質土)에서 잘 자라는 뽕나무를 많이 가꾸었는데, 조선시대부터 양잠을 장려해 국립양잠소격인 신잠실(新蠶室)이 설치되었다.

한때 화훼재배단지로 유명하였는데, 서울로 편입된 이후 도시개발로 인해 쇼핑센터 · 지하상가 등이 들어서는 등 상업이 발달해 신도시로 개발되었다. 특히 강남종합고속터미널 주변과 지하상가, 화물터미널 주변, 강남대로변은 대규모 백화점을 비롯한 상업유통 중심지로 번창하고 있다. 그리고 강남구와 더불어 학군이 좋은 지역과 주민소득이 높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구의 남북으로 경부고속도로가 통하고, 강남종합고속버스터미널 · 남부시외버스터미널 · 화물터미널 등이 위치함에 따라 우리나라 최대의 교통 요지이자 물류처리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반포대교 · 한남대교 · 동작대교 등으로 강북과 연결되어 도심과의 교통이 원활하며 올림픽대로 · 신반포로 · 사평로 · 서초로 · 사임당길 · 효령로와 도곡동길 · 남부순환로 등이 동서로 횡단하며, 강남대로 · 반포로 · 방배로 · 동작대로 등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있다. 또한 지하철 2·7호선이 구의 동서 방향을 가로지르며, 지하철 3·4호선이 남북 방향을 잇고 있어 원활한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유적은 헌 · 인릉, 청권사 부묘소, 성안공 상진 묘역, 대성사 목불좌상, 원지동 석불입상 및 석탑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의 전적문화재가 있으며, 조선 초기에 심은 것으로 추정되는 잠실뽕나무는 조선시대에 잠원동에 설치했던 신잠실과 함께 당시 양잠업이 성행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도곡동에는 산신제당 등이 있어, 토착 주민의 동제가 이루어지고 있다.

국립중앙도서관 · 서울시공무원교육원 · 법조단지 · 학술원 · 예술원 · 예술의전당 · 국립국악원 등 주요 기관이 있다. 서초(瑞草) · 원지(院址) · 우면(牛眠) · 염곡(廉谷) · 신원(新院) · 잠원(蠶院) · 반포(盤浦) · 방배(方背) · 양재(良才) · 내곡(內谷) 등 10개 동이 있다.

성동구(城東區)

시의 동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6.86㎢이고, 인구는 29만 700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마장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의 인창방(仁昌坊)과 남부의 두모방(豆毛坊)에 속했던 곳으로, 1914년 경성부를 축소시킬 때 경기도 고양군 뚝도면(纛島面)과 한지면(漢芝面)에 편입되었다. 1936년 경성부로 편입되어 동부출장소에 속하였고,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동부출장소 관할구역이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분리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확장에 따라 뚝도면을 편입해 성동구뚝도출장소를 두었으며, 1963년 광주군의 4개 면을 편입해 천호 · 송파 · 언주출장소를 설치하였다. 1973년 송파 · 언주출장소를 폐지하고 영동출장소를 설치했으며, 1975년 강남구가 분구됨에 따라 한강 이남지역이 분리되었다. 1995년 동일로를 경계로 광진구가 분구되어 나갔다.

남동부지역은 중랑천과 청계천이 흘러와 합류해 한강에 유입되면서 이룩된 범람원에 해당되는 저지이며, 구 전체적으로 평탄한 충적평지로, 시가지가 이루어져 교통이 발달해 있다. 주택과 공장이 혼재하는 혼합지구로 원래 근교농업이 발달했으나, 광복 후 계속적인 인구 증가와 성동교(城東橋) · 광진교(廣津橋)의 건설로 도시화가 진전되어 왕십리 지구와 뚝섬 지구에 주택 · 학원 · 공장 · 특수시설 등이 들어서게 되었다.

동호대교 · 성수대교 · 영동대교로 강남 지역과 이어지는 남북 종단 도로가 나 있고, 지하철 2호선이 동서로 관통하며, 강변북로 · 뚝섬길 · 왕십리길 · 광나루길 · 천호대로 등이 동서로 횡단하고 있어 교통망이 매우 발달해 있다.

역사적으로 유서 깊은 고장으로 옥수동 응봉에서는 구석기시대 지표유물이 발견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에는 두모포(豆毛浦) · 입석포(立石浦) 등 포구가 발달하여 물산의 유통중심지가 되었으며, 서울 살곶이 다리가 놓여진 살곶이벌에는 국립목장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하왕십리(下往十里) · 상왕십리(上往十里) · 도선(道詵) · 홍익(弘益) · 마장(馬場) · 사근(沙斤) · 행당(杏堂) · 응봉(鷹峰) · 금호동1가(金湖洞1街) · 금호동2가 · 금호동3가 · 금호동4가 · 옥수(玉水) · 성수동1가(聖水洞1街) · 성수동2가 · 송정(松亭) · 용답(龍踏) 등 17개 동이 있다.

성북구(城北區)

시의 북부, 삼각산 남쪽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4.58㎢이고, 인구는 45만 9275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삼선동5가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동부 숭신방(崇信坊)과 인창방(仁昌坊)에 속하였다.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崇仁面)으로 되었다가, 1936년 경성부의 관할구역 확장으로 경성부에 편입되어 한지면(漢芝面)에서 편입된 일부지역과 함께 동부출장소에 속하였다. 1949년 서울특별시의 행정구역 확장 때 고양군 숭인면의 일부지역과 동대문구의 일부를 합해 성북구가 신설되었으며, 1963년 양주군 노해면이 편입되었다. 1973년 성북구숭인 · 노해출장소 관할구역이 도봉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서울특별시와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는 삼각산 보현봉과 주능선 및 칼바위능선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린 산줄기와 성북천 · 정릉천 계류사이에 주거지로 발달한 지역으로 동쪽에 중랑구, 남쪽에 동대문구, 서쪽에 종로구와 접하고 있다. 산봉우리들을 앞뒤에 두고 구릉과 계곡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많은 고갯길이 있는데, 미아리고개 · 아리랑고개 · 보토현 · 제터고개(안암동) · 성황당고개(석관동) 등이 널리 알려져 있다.

광복과 6·25전쟁 이후 돈암동∼미아리 일대와 삼양동∼수유리 일대 등 곳곳에 불법정착지구가 형성되면서 인구집중이 되었으며, 1960년대의 도시재개발사업으로 중상류의 단독주택지구를 형성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는 인구성장이 멈추어 안정된 거주지역으로 정착되었다. 그후 내부순화로가 개통되고 정릉천 주변이 고층 아파트지구로 변모하면서 도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성북뉴타운 지역 개발로 인한 새로운 면모로 변신하고 있다.

부자동네로 소문난 성북동에는 전통가옥과 외국 대사관저가 많으며, 기존에 개화된 한옥이 많던 돈암 · 동선 · 삼선동 등은 많은 부분 아파트단지로 변모하였다.

미아로 · 보문로 · 종암로 등 주요 도로를 따라 상가가 발달하고 주민생활과 직결되는 시장 · 슈퍼마켓 등이 발달하였다. 도심과 연결되는 혜화문과 동대문을 통과하여 원산으로 향하는 길이었던 동소문로와 미아로 · 종암로를 통해 일찍부터 교통이 발달하였으며, 정릉길과 북악터널 개통, 내부순환로와 정릉터널 개통이 이루어져 북부 서울을 동서로 관통하는 대로가 되었다. 또 지하철 6호선이 개통되고 4호선이 통과되면서 교통은 더욱 편리해졌다.

문화유적으로 한성의 외곽 관방시설인 북한산성(北漢山城)이 삼각산의 주요 봉우리를 연결하며 보국문 · 대성문 등과 더불어 축조되어 있다. 왕릉으로 태조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경종과 경종비 선의왕후 어씨의 의릉(懿陵) 등이 있다. 봉국사(奉國寺) · 경국사(慶國寺), 신흥사(新興寺), 미타사(彌陀寺) · 보문사(普門寺), 개운사(開雲寺) · 보문사(普門寺) 등 역사가 긴 전통사찰이 있으며, 이 밖에 많은 암자도 있다. 그리고 서울 한양도성이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며 성북동 일대에 남아 있으며, 선잠단지(先蠶壇址), 성락원 등 문화유적이 자연림과 수석(水石)이 어울려 많은 시민이 찾는 명승지로 손꼽힌다. 또 성북동에는 많은 국보 및 국보급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는 간송미술관이 있으며 이종석 가옥 · 이태준 가옥, 김진흥 가옥 등도 전통가옥이 보존되고 있다.

삼선동5가(三仙洞五街) · 삼선동1가 · 삼선동2가 · 삼선동3가 · 삼선동4가 · 성북(城北) · 성북동1가(城北洞一街) · 돈암(敦巖) · 동소문동1가(東小門洞一街) · 동소문동2가 · 동소문동3가 · 동소문동4가 · 동소문동5가 · 동소문동6가 · 동소문동7가 · 동선동1가(東仙洞一街) · 동선동2가 · 동선동3가 · 동선동4가 · 동선동5가 · 안암동1가(安巖洞一街) · 안암동2가 · 안암동3가 · 안암동4가 · 안암동5가 · 보문동1가(普門洞一街) · 보문동2가 · 보문동3가 · 보문동4가 · 보문동5가 · 보문동6가 · 보문동7가 · 정릉(貞陵) · 길음(吉音) · 종암(鍾巖) · 하월곡(下月谷) · 상월곡(上月谷) · 장위(長位) · 석관(石串) 등 39개 동이 있다.

송파구(松坡區)

시의 동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33.88㎢이고, 인구는 66만 30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신천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광주군 중대면(中垈面)이었으나, 1963년 서울특별시에 성동구에 편입되어 송파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75년 성동구에서 분리된 강남구에 속하였다. 1979년 강남구에서 분리된 강동구에 속해 있다가, 1988년 송파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북쪽과 서쪽에는 한강과 탄천이 흐르며, 그 연안에 비교적 넓은 범람원이 발달해 있으며, 강남구와 경계를 이루로 동쪽은 성내천을 따라 난 강동대로와 풍납로를 경계로 강동구와 접해 있으며, 남동쪽으로 경기도 하남시 · 성남시와 경계를 이룬다. 그 사이 탄천과 성내천 사이에는 잠실과 그 배후지역이 연결되어 있고 작은 구릉지대에 주택지가 발달하였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한적한 농촌이었으나, 서울시의 폭발적인 인구증가로 발생한 주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실 일대에 아파트단지를 조성하여 서울 도심과 성남시가 연계되는 징검다리 부도심으로 발전하였다.

1980년 지하철 2호선의 개통과 바둑판식의 넓은 도로망의 건설, 서울올림픽대회를 치른 잠실 · 방이동 일대의 경기장 시설, 1985년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의 건립과 또 계속되는 아파트단지의 건설 등으로 인구가 계속 증가하였다. 또한 가락동 농수산물종합도매시장과 잠실의 대형 호텔 · 백화점 · 쇼핑센터 등의 건설은 대단위 유통단지를 이루었으며, 잠실역 일대는 체육 · 오락 · 업무 · 주거 단지가 집합된 쇼핑문화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서울올림픽대회가 개최된 잠실동의 종합운동장 시설과 방이동의 올림픽공원을 중심으로 올림픽경기장 일대는 새로운 관광지로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한강 본류가 인공호수 모습으로 남아 있는 석촌호수 주변에는 서울놀이마당 · 롯데월드 등과 어울려 많은 시민이 찾고 있는 명소가 되었다.

교통은 지하철 2호선과 더불어 강북 지역을 잇는 잠실대교 · 잠실철교 · 올림픽대교 · 천호대교 등의 교량이 있어 서울도심과 원활한 교통망을 형성하며, 지하철 5·8호선이 계통되어 성남시와 직결되고 있다.

문화유적으로 잠실지구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발굴 조사된 서울 석촌동 고분군과 1976년에 발굴된 서울 방이동 고분군이 있어 한성백제의 유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2000년에 발굴된 풍납동 토성 내부의 유구와 성벽 절단 발굴 조사를 통하여 한성백제의 궁궐 유구로 추정하기에 이르렀다. 아울러 몽촌토성 또한 백제 초기의 왕성 유구로 추정되고 있다.

이 밖에 삼전도비, 거창신씨 묘역, 문화유씨 묘역, 충헌공 김구 묘역 등이 있으며, 무형문화재로 송파 산대놀이가 있다.

송파(松坡) · 풍납(風納) · 거여(巨餘) · 마천(馬川) · 방이(芳荑) · 오금(梧琴) · 석촌(石村) · 삼전(三田) · 가락(可樂) · 문정(文井) · 장지(長旨) · 잠실(蠶室) · 신천(新川) 등 13개 동이 있다.

양천구(陽川區)

시의 서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7.40㎢이고, 인구는 48만 453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신정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천현이었고, 1914년에 경기도 김포군 양동면(陽東面)에 속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어 양동출장소의 관할이 되었다. 1968년 양동출장소가 폐지되어 양서출장소에 속했다가 1977년 영등포구에서 분구된 강서구에 속하게 되었다. 1988년 강서구에서 양천구로 분리 신설되었다.

안양천과 한강 연안에는 두꺼운 충적층으로 된 넓은 범람원이 형성되어 김포평야의 일부를 이루었으며, 낮은 구릉지대 사이로 안양천의 지류가 흐르고 다시 한강으로 유입한다. 따라서 안양천을 경계로 동쪽에 영등포구와 접하며, 북쪽으로 공항로를 경계로 강서구와 접하고, 남쪽은 구로구, 서쪽은 낮은 구릉을 경계로 부천시와 접해 있다.

서울에 편입되기 전에는 전형적인 농촌지역으로서 산림지 · 농경지 · 취락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농산물의 생산량도 많았다. 1970년대 중반까지 서울 각지의 철거민이 이주해 와 영세민 집단거주지역을 형성하였다. 서울의 인구를 강남으로 분산시키려는 정부시책에 따라 대규모 주택단지로 개발되기 시작했으며, 강서구 화곡동 일대와 더불어 서울 서부의 최대 주택지역이 되었다. 목동에는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건립되었으며 신월동에는 영세민을 위한 연립주택단지가 조성되었다. 대규모 주택지역으로 교육 · 상업 · 문화 등의 제반시설이 들어섰다.

주택지역으로 성장하게 된 요인 중의 하나는 교통의 편의이다. 경인고속도로와 남부순환로가 교차 · 통과하며, 이들 도로를 근간으로 오목로 · 신월로 · 신정로 등이 개설되어 있고, 지하철 2·5호선이 동서로 관통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안양천을 따라 개설된 안양천 길은 광명시로 이어져 서해안고속도로와 이어지며 등촌로와 강서로가 구를 관통하는 교통망을 형성하고 있다. 문화재로 성시헌익사공신록 · 열조통기 등 전적(典籍) 문화재가 있다.

신정(新亭) · 목(木) · 신월(新月) 등 3개 동이 있다.

영등포구(永登浦區)

시의 남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4.53㎢이고, 인구는 37만 8504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당산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시흥군 영등포면이었으며, 1931년 영등포읍으로 승격되었다. 1936년 경성부의 구역확장 때 시흥군 북 · 동면의 일부지역과 함께 편입되어 영등포출장소의 관할에 속하였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영등포구가 되었으며, 1949년과 1963년에 시흥군 및 김포군의 일부가 편입되어 행정구역이 크게 확장되었다. 그후 1973년 관악구, 1977년 강서구, 1980년 동작구와 구로구 등이 차례로 분구됨에 따라 종래 영등포구 관할지역의 중심부만 남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한강과 그 지류인 안양천에 인접해 발달한 충적평야지대로, 대체로 해발 10m 내외의 낮고 평탄한 지역을 이룬다. 이러한 특징은 특히 경부선의 서부에서 안양천에 이르는 양평 · 당산 · 문래동 일대에 뚜렷하며, 제방이 갖추어지기 전에는 많은 범람이 있었다. 그리고 동쪽의 동작구와 인접한 지역은 낮은 구릉을 이루고 있어 여의도 샛강 사이에 포구가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북쪽으로 한강의 하중도인 여의도를 지나 마포구와 경계를 이루며 남쪽으로는 구로구 · 금천구와 접해 있다.

1900년대 초기까지 영등포구의 취락발달은 극히 미약했으나, 철도의 개통과 공업지역의 건설로 이 지역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일제 식민지정책에 의해 영등포 · 양평 · 당산 · 문래동에 집중적으로 건설된 공장지역, 영등포시장을 중심으로 한 상업지역과 그 밖의 지역에 산재한 주택지 등으로 시가지가 확충되어 왔으며, 서울의 부도심으로 발달해 왔다. 이러한 공업도시로서의 면모는 지금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는데, 현재의 공업 특징은 섬유 · 식품 · 음료공업을 중심으로 한 대규모의 노동집약적 공업이 특색이고, 기계 · 화학 등의 공업은 규모가 작은 편이다. 일찍부터 근대공업이 발달해 도시화의 추진력이 되어 왔고, 이에 따른 인구증가, 주택지 확장과 상업지역 및 기타 업무기능지역의 발달을 가져왔다. 특히 최근 들어 영등포민자역사에 고층의 백화점이 들어서고, 역 앞 일대에 새로운 대형백화점들이 건설되어 유통 중심지로서의 지위를 구축하고 있다.

그리고 영등포의 위상은 여의도의 개발과 이에 따른 교량건설로 더욱 높아졌다. 1970년대 초기부터 개발되기 시작한 여의도는 고도로 발달한 금융 · 방송 등 4차 산업의 업무기능들이 집중됨으로써 서울의 또 하나의 경제중심부를 이루고 었고, 국회의사당이 옮겨옴으로써 정치적 위상도 높아졌다. 마포대교 · 원효대교 · 서강대교의 가설로 도심부와의 접근성이 더욱 좋아진 영등포 지역에는 국회의사당 · 증권거래소 · KBS · 전경련회관 · 대한결핵협회 및 주요 금융기관들이 들어서 있으며 주요 기관이 밀집해 어우러져 상호 시너지 효과를 가지며 다양한 업무를 펼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교통의 편리함을 이용한 대단위 아파트단지가 들어서 주거공간으로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개통된 경인선, 뒤이어 개통된 경부선과 이에 따른 영등포역의 설치 및 호남선의 개통, 이에 더해 1917년한강인도교(현 한강대교)의 준공으로 한강 남부지역과 서울 중심부를 잇는 교통의 요지가 되었다. 또 지하철 2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고 지하철 5호선이 동서로 지나고 있어 교통이 편리하다. 그리고 성산로 · 선유로 · 당산로 · 양평로 · 제물포길 · 여의대로 · 대방로 · 도신로 등이 구의 남북을 관통하고, 올림픽대로 · 노량진길 · 경인로 · 영등포로 등이 동서로 관통하여 인천 지역과 남쪽지역으로 이어지며 성산대교 · 양화대교 · 당산철교 · 서강대교 · 마포대교 · 용호대교 등으로 한강을 건너 강북과 이어져 있다.

문화재로는 조선 이흠례 묘지가 있으며, 선유봉과 당산동 일대에는 경승을 이루었고 부군당이 있어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당산(堂山) · 영등포(永登浦) · 영등포동1가(永登浦洞一街) · 영등포동2가 · 영등포동3가 · 영등포동4가 · 영등포동5가 · 영등포동6가 · 영등포동7가 · 영등포동8가 · 여의도(汝矣島) · 당산동1가(堂山洞一街) · 당산동2가 · 당산동3가 · 당산동4가 · 당산동5가 · 당산동6가 · 양평(楊坪) · 양평동1가 · 양평동2가 · 양평동3가 · 양평동4가 · 양평동5가 · 양평동6가 · 도림(道林) · 문래동1가(文來洞一街) · 문래동2가 · 문래동3가 · 문래동4가 · 문래동5가 · 문래동6가 · 양화(楊花) · 신길(新吉) · 대림(大林) 등 34개 동이 있다.

용산구(龍山區)

시의 중남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1.87㎢이고, 인구는 23만 3342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원효로1가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서부의 용산방(龍山坊)이었으며, 1911년 고양군 용산 · 한지면(漢芝面)에 속하였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경성부용산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용산구가 되었다.

남산의 남쪽 사면에 위치해 있으며, 서쪽으로 안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용산 줄기를 경계로 마포구와 접해 있고, 동쪽은 남산의 부어티고개에서 한강으로 뻗은 종남산 한줄기를 경계로 성동구와 접해 있다. 남쪽으로 한강이 흐르고 둔지산과 남산에서 동쪽으로 뻗은 산줄기 사이에 낮은 평지가 발달되어 주거지와 도로망을 형성하고 있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와 같이 제방이 없던 시절에는 한강이 신계동과 삼각지까지 범람하였다. 따라서 이촌동 지역은 넓은 범람원이 퇴적되어 한강백사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갈수기에는 노들섬까지 걸어갈 수 있었다.

원효로 방면을 구용산, 한강로변을 신용산이라 부르는데, 구용산은 조선 말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의 무대였고, 특히 일본인 거류지로 조성되어 지금도 효창 · 청파동과 원효로 등지에는 일본식 목조의 낡은 가옥이 남아 있다. 서울역에서 한강철교에 이르는 신용산 지역은 일제가 군사기지로 삼았으며, 해방 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미군이 주둔하여 오늘에 이르며, 2006년에 들어 용산기지 반환과 더불어 용산민족공원 조성에 여론이 모아지고 있다.

용산 지역은 도심과 인접한 주거지역으로 발전한 곳이었으나, 근래 도시기능의 확산으로 종합시설물과 편의 · 위락시설이 이전됨에 따라 도심과 직결되는 간선도로변에는 상업기능이 많이 들어서고 있다. 남영동을 중심으로 서울역에서 삼각지에 이르는 도로변에는 인근의 여러 학교와 학원의 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상가가 형성되었고, 서울의 이방지대라 불리는 이태원 상가는 외국인 관광객뿐 아니라 내국인까지 유인하는 새로운 상업지역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이태원과 한남동 일대에는 대형 호텔과 각국의 대사관 들이 자리하고 있어 국제도시의 모습을 띠고 있다.

한강로3가에 있던 용산청과물시장이 가락동 농수산물도매시장으로 이전되고 그 자리에는 용산전자상가단지가 들어섰다. 용산동2가의 흔히 해방촌이라 부르는 곳은 월남한 이북사람들이 만든 마을로, 대부분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억척스럽고 부지런한 생활을 한 곳이었다. 반면 최근에 재벌들의 주택이 자리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주택지로 주목되고 있다.

삼국시대에 이미 수륙교통의 요충지로서 세력 확장의 쟁탈지였으며, 고려시대 임금의 유락공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초기에는 용산을 중심으로 물산이 모아지는 길목으로 한강 상류나 삼남 지방을 서울의 도심과 연결시키는 하항의 관문 구실을 하였다. 특히 1900년 이후 철도가 개통되면서 철도교통의 중심으로서 일제의 대륙침략의 발판이 되기도 하였다.

용산은 1900년 한강철교가 준공되어 경인선의 전 구간이 개통되고 용산역이 설치된 이후 철도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왔다. 용산시외버스터미널이 강남으로 이전한 후에도 지하철 1·4·6호선이 통과하여 교통이 매우 편리하며, 한강대교 · 한강철교를 비롯해 반포대교 · 한남대교 · 동작대교 등의 교량이 걸쳐 있어 강남과 연계되어 도심의 관문으로서의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지역에는 많은 유물 · 유적이 남아 있는데, 조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원인 효창원(孝昌園) 터에는 효창공원과 김구선생 묘역 및 삼의사 묘가 있다.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많은 천주교도가 처형된 이촌동의 새남터와 용산신학교 및 원효로 예수성심 성당 등이 있다. 또한 구 용산 수위관측소, 서빙고동 부군당, 김유신장군 사당 등의 동제당이 남아 있다.

주요 시설로서 효창공원과 효창운동장이 있으며, 그밖에 남산도서관 · 철도도서관 · 회교성당(回敎聖堂) 등이 있다. 특히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세종로에서 용산가족공원 서쪽으로 이전 개관하여 종합사회문화교육의 장으로 자리하고 있다.

원효로1가(元曉路一街) · 원효로2가 · 원효로3가 · 원효로4가 · 후암(厚巖) · 신창(新倉) · 용산동1가(龍山洞一街) · 용산동2가 · 용산동3가 · 용산동4가 · 용산동5가 · 용산동6가 · 갈월(葛月) · 남영(南營) · 동자(東子) · 서계(西界) · 청파동1가(靑坡洞一街) · 청파동2가 · 청파동3가 · 청암(淸巖) · 산천(山泉) · 효창(孝昌) · 용문(龍門) · 도원(桃園) · 신계(新契) · 문배(文培) · 한강로1가(漢江路一街) · 한강로2가 · 한강로3가 · 이촌(二村) · 이태원(梨泰院) · 한남(漢南) · 서빙고(西氷庫) · 동빙고(東氷庫) · 주성(鑄城) · 보광(普光) 등 36개 동이 있다.

은평구(恩平區)

시의 북서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9.70㎢이고, 인구는 49만 7920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녹번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 북부의 연은방과 상평방 지역이었는데, 1914년에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이 되었다. 1949년 서울특별시 서대문구에 편입되어 은평출장소에 속하였다. 1973년 고양군 신도면(神道面)의 구파발리(舊把撥里) · 진관내리(津寬內里) · 진관외리(津寬外里) 등이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 은평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9년 서대문구은평출장소 관할구역이 분리되어 은평구가 신설되었다.

서북쪽은 효경산 줄기와 창릉천과 삼각산 의상봉 능선을 경계로 고양시와 경계를 이루며, 동쪽은 비봉과 탕춘대능선을 따라 종로구와 경계를 이루고, 남쪽은 서대문구와 마포구와 접해있다. 그리고 연신내 일대는 불광천을 따라 얕은 충적지를 이룬다.

도심지역과 구분되어 주택과 학교 등이 집중되어 깨끗하고 조용한 주거지역으로서 도시주변의 성격을 띤다. 산지의 대부분을 개발제한구역으로 설정해 주택지구의 기능이 강화되고 있으며, 공장 분포수가 적어 다른 구에 비해 환경오염의 요인이 적은 편이다. 특히 불광동 지역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생긴 집단주택지역에 속하는데, 1957년 재건주택 171채로 시작되었으며, 1964년경 문화 · 경제 수준이 높고 안정된 주거공간으로 인식되었으며 지속적으로 고층아파트가 건립되었다. 또 주거지역으로 기자촌이 개발되었고, 2006년에는 진관내 · 외동과 구파발동 등이 은평뉴타운지역으로 개발되고 있어 넓은 녹지공간 속에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형성되고 있다.

주택지역으로 본격적으로 개발될 즈음인 19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통일로(統一路)가 도심과 이어지는 거의 유일한 길이었으나, 그후 구기터널이 개통되어 진흥로를 통해서도 연결되었으며 가좌로 · 증산로 · 응암로 · 은평로 · 연서로 · 서오릉로 등의 여러 길로 각 지역이 연결되고 있다. 또한 지하철 3호선과 6호선이 개통되어 은평구의 교통상황은 크게 호전되었다.

역촌동과 구파발은 조선시대 역참이 있어 유래된 지명으로 이와 관련하여 인조별서 유기비, 금암기적비와 하마비 등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그 외에 북한산성, 서울 삼천사지 마애여래입상과 진관사의 여러 불교유적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녹번(碌磻) · 불광(佛光) · 갈현(葛峴) · 구산(龜山) · 대조(大棗) · 응암(鷹巖) · 역촌(驛村) · 신사(新寺) · 증산(繒山) · 수색(水色) · 진관내(津寬內) · 구파발(舊把撥) · 진관외(津寬外) 등 13개 동이 있다.

종로구(鍾路區)

시의 중북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23.91㎢이고, 인구는 15만 4986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수송동이다. 조선시대에 한성부 중부의 서린방(瑞麟坊) · 견평방(堅平坊) · 경행방(慶幸坊) · 징청방(澄淸坊) · 수진방(壽進坊) · 관인방(寬仁坊) · 장통방(長通坊) · 정선방(貞善坊), 동부의 연화방(蓮花坊) · 창선방(昌善坊) · 건덕방(建德坊) · 숭신방(崇信坊) · 숭교방(崇敎坊), 서부의 인달방(仁達坊) · 여경방(餘慶坊) · 적선방(積善坊), 북부의 순화방(順化坊) · 준수방(俊秀坊) · 의통방(義通坊) · 관광방(觀光坊) · 안국방(安國坊) · 진장방(鎭長坊) · 가회방(嘉會坊) · 양덕방(陽德坊) 등의 지역이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에 따라 종로구가 되었다.

삼각산 보현봉에서 뻗어내린 북악산을 주산(主山)으로 동쪽에 낙산, 서쪽에 인왕산이 솟아 있고 남쪽의 남산에 에워싸인 분지의 중앙을 흐르는 청계천 북쪽에 위치한다. 풍수지리적으로 주산 아래 좌청룡 · 우백호와 내명당수에 에워싸여 장안에서 으뜸가는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지형상 북악산 남사면에 위치하여 북고남저(北高南低) 남향한 지형으로 일조와 배수가 양호하며 전망도 매우 좋다. 행정구역상으로 서쪽은 서대문구 · 은평구, 북쪽은 성북구와 고양시, 동쪽은 동대문구와 성동구, 남쪽은 중구와 접해 있다.

종로구는 조선왕조 왕궁이 위치한 도성의 중심지로서 한양 천도 때 이미 중심가로인 세종로 · 종로 · 남대문로의 대로가 마련되어 도성문으로 이어지는 간선도로가 되었다. 아울러 이들이 교차하는 종로사거리 운종가를 중심으로 시전이 형성되어 육의전으로 발전해 도심의 핵을 형성하였으며, 이 때 형성된 육조거리 관청가와 주요 도시구조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현재 율곡로 북쪽의 북촌 지구는 전통주거지역으로 관리 보전되고 있으며, 세종로 일대는 관공서와 경제 · 언론 · 외교 등의 업무지구를 이루고 있다. 종로 일대는 상업의 중심지역을 형성해 도산매상(都散賣商) 등 동일종(同一種)의 상점이 밀집하는 경향을 나타내는 것이 특징이다. 인사 · 견지동의 골동(骨董) · 표구(表具) · 화상(畵商), 익선동과 종로3가의 보석 및 귀금속상,악기와 자동차부품상, 청계로의 전자제품, 종로4·5가의 약품 상가 등이 밀집되어 있다. 또 이와 관련된 문화지구 · 국악거리 등이 형성되어 있다. 그리고 자하문터널 뒤쪽은 인왕산과 북악의 북쪽 사면으로 경관 좋은 주거지로 형성되어 있다.

한편 종로구는 교통망이 가장 발달해 있고, 교통량이 가장 많은 복잡한 곳이다. 종로 · 율곡로 · 세종로 · 우정국로 · 삼일로 · 창경궁로 · 대학로가 종로구의 동서 · 남북을 관통하여 도로교통의 간선을 이루고 있다. 북악터널을 지나는 세검정길 등도 교통소통에 큰 몫을 하며, 내부순환로의 정릉터널구간과 홍지문터널구간의 일부가 종로구를 통과하고 있다. 지하철 1호선이 종로를 통과하는 외에 3·4·5호선이 종로3가와 동대문에서 교차함으로써 시내 교통소통이 더욱 원활해졌다.

종로구는 조선왕조의 5대 궁궐 가운데 4개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비롯하여 종묘 등 세계문화유산을 간직한 문화유적의 보고이다. 그리고 양반계급인 권문세가들이 모여 살면서 청계천 북쪽의 북촌(北村)과 인왕산 동쪽 기슭에 우대를 형성하면서 양반생활과 관련된 유 · 무형의 문화유산을 간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직 · 서울 한양도성 등 나라의 상징건조물과 문묘 · 와 각종 관아터를 있으며, 성리학을 이념으로 운영하면서 사상 통일을 꾀하기 위해 한양에 둔 원각사 · 흥천사 · 조계사 등의 불교유적과 남아 있다. 그 외에 우정총국 · 번사창 등 근대역사 유물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

민속박물관 · 궁중유물전시관 · 세종문화회관 · 정독도서관 · 중앙교육원 · 문화예술진흥원과 짚풀생활사박물관 등 각종 특수박물관이 분포되어 우리나라 문화 · 예술의 중심지 구실을 하고 있다. 그리고 동숭동 대학로 주변은 문화거리로 다양한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인사동 문화지구, 종묘공원의 국악마당과 국악거리축제 등이 있다. 아울러 고궁 · 국립공원 · 근린공원과 탑골공원 · 사직공원 · 삼청공원 등은 도심 속 시민들에게 휴식공간을 제공해 준다.

수송(壽松) · 청운(淸雲) · 신교(新橋) · 궁정(宮井) · 세종로(世宗路) · 효자(孝子) · 창성(昌成) · 통인(通仁) · 누상(樓上) · 누하(樓下) · 옥인(玉仁) · 사직(社稷) · 체부(體府) · 필운(弼雲) · 내자(內資) · 통의(通義) · 적선(積善) · 삼청(三淸) · 팔판(八判) · 안국(安國) · 소격(昭格) · 화(花) · 사간(司諫) · 송현(松峴) · 부암(付岩) · 신영(新營) · 홍지(弘智) · 평창(平倉) · 구기(舊基) · 교남(橋南) · 평(平) · 송월(松月) · 홍파(紅把) · 교북(橋北) · 행촌(杏村) · 도렴(都染) · 당주(唐珠) · 내수(內需) · 신문로1가(新門路一街) · 신문로2가 · 가회(嘉會) · 재(齋) · 계(桂) · 원서(苑西) · 인사(仁寺) · 청진(淸進) · 서린(瑞麟) · 중학(中學) · 종로1가(鐘路一街) · 종로2가 · 종로3가 · 종로4가 · 종로5가 · 종로6가 · 공평(公平) · 관훈(寬勳) · 견지(堅志) · 와룡(臥龍) · 권농(勸農) · 운니(雲泥) · 익선(益善) · 경운(慶雲) · 관철(貫鐵) · 낙원(樂園) · 묘(廟) · 훈정(薰井) · 봉익(鳳翼) · 돈의(敦義) · 장사(長沙) · 관수(觀水) · 인의(仁義) · 예지(禮智) · 원남(苑南) · 효제(孝悌) · 연지(蓮池) · 충신(忠信) · 이화(梨花) · 연건(蓮建) · 동숭(東崇) · 혜화(惠化) · 명륜동1가(明倫洞一街) · 명륜동2가 · 명륜동3가 · 명륜동4가 · 창신(昌信) · 숭인(崇仁) · 무악(毋岳) 등 87개 동이 있다.

중구(中區)

시의 중앙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9.96㎢이고, 인구는 12만 5733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예관동이다. 조선시대 한성부의 남부 광통방(廣通坊) · 회현방(會賢坊) · 명례방(明禮坊) · 태평방(太平坊) · 훈도방(薰陶坊) · 낙선방(樂善坊) · 성명방(誠明坊)과 서부의 양생방(養生坊) 일부, 반석방(盤石坊)의 일부지역이었다. 1943년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가 되었다.

남쪽은 남산 주봉 능선을 따라 용산구와 접하고, 북쪽은 청계천을 따라 종로구와 접하며, 서쪽은 서대문구, 동쪽은 성동구와 접해 있다. 따라서 남산의 산각 사이를 작은 개천이 흐르고 그 사이를 동현(銅峴) · 송현(松峴) · 인현(仁峴) · 야현(冶峴) · 종현(鐘峴) 등의 고개가 잇고 있다. 복개되었던 청계천이 복원되어 새로운 경관을 보이며 자연생태가 살아나고 있다.

남산의 북쪽 사면은 일조가 좋지 못하나 지하수가 풍부해 생활용수를 얻기 쉽기 때문에 조선시대부터 평민이나 중인 · 하급관리와 세력을 잃은 양반의 후손들이 모여 남촌(南村)을 이루어 왔다. 그렇지만 청학동과 회현동 일대는 경관이 수려하여 권문세력들의 세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훈련원(訓鍊院) · 남별영(南別營) · 남소영(南小營) 등이 있어 많은 장교들이 거주하였다.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가 각축을 벌이면서 그 세력에 힘입어 중국 화교촌과 일본인 상가가 형성되었으며, 급기야 충무로 일대를 중심으로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 중심의 새로운 남촌이 형성되었다. 이때 형성된 명동 일대의 상권은 현재까지 서울의 도심지역에서 지속적으로 발전하였다.

서대문 · 광화문 · 을지로2가 사이에는 서울특별시청이 있고, 서울의 중앙업무지구가 형성되어 있으며, 언론 · 은행 · 재벌회사 등의 본사가 모여 있어 우리나라 경제력이 집중되어 있는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명동 · 충무로 일대는 유흥 및 상업 중심지를 이루며, 특히 남대문시장을 비롯해 대형 백화점 등이 몰려 있어 서울의 중심상업지역을 이룬다. 청계로와 인접한 지역에는 대규모의 의류시장인 평화시장 · 동대문종합시장을 비롯한 서울의 대형시장이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중구는 상주인구보다 유동인구가 훨씬 많은 곳이다. 따라서 중구는 서울의 25개 구 가운데 가장 작은 면적과 인구로 형성된 도심지역이 된다. 그리고 을지로 일대에는 인쇄업이 서울에서 가장 발달해 있으며 특히 영세한 소규모의 시설로 이루어져 있다.

청계로 · 을지로 · 퇴계로가 동서 방향의 교통간선을 이루며, 의주로(義州路) · 태평로(太平路) · 남대문로 · 삼일로 · 돈화문길 · 훈련원로 · 흥인문로와 장충단길 등이 남북 방향의 교통간선을 이룬다. 서쪽에는 우리나라 철도의 시발지인 서울역이 있어 서울의 출입문 구실을 하고, 지하철 1·2·3·4·5호선이 동서남북으로 뻗어 있어 교통이 매우 편리하다.

문화유적은 1962년 국보로 지정된 서울 숭례문을 비롯해 덕수궁(경운궁)의 여러 전각과 중명전 · 석조전(石造殿) 등의 근대건축물이 있으며, 약현성당 · 명동성당 · 정동교회 · 서울성공회성당 등의 각종 종교기관이 있다. 그 밖에 환구단(원구단)의 황궁우와 석고, 장충단비, 남산골 한옥마을의 전통가옥, 경희궁 숭정전 건물과 서울역사 · 구 러시아 공사관 · 한국은행 본관 등이 남아 있다. 그리고 남산공원 · 장충단공원 · 서울타워(N타워) ·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등이 있으며, 도심 곳곳에 대형 호텔이 있고 동대문쇼핑타운과 황학동 풍물시장 등이 집중해 있어 외국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다.

예관(藝館) · 장교(長橋) · 무교(武橋) · 다(茶) · 태평로1가(太平路一街) · 태평로2가 · 을지로1가(乙支路一街) · 을지로2가 · 을지로3가 · 을지로4가 · 을지로5가 · 을지로6가 · 을지로7가 · 남대문로1가(南大門路一街) · 남대문로2가 · 남대문로3가 · 남대문로4가 · 남대문로5가 · 삼각(三角) · 수하(水下) · 수표(水標) · 북창(北倉) · 소공(小公) · 서소문(西小門) · 정(貞) · 순화(巡和) · 의주로1가(義州路一街) · 의주로2가 · 충정로1가(忠正路一街) · 봉래동1가(蓬萊洞一街) · 봉래동2가 · 회현동1가(會賢洞一街) · 회현동2가 · 회현동3가 · 남창(南倉) · 저동1가(苧洞一街) · 저동2가 · 충무로1가(忠武路一街) · 충무로2가 · 충무로3가 · 충무로4가 · 충무로5가 · 명동1가(明洞一街) · 명동2가 · 남산동1가(南山洞一街) · 남산동2가 · 남산동3가 · 인현동1가(仁峴洞一街) · 인현동2가 · 필동1가(筆洞一街) · 필동2가 · 필동3가 · 주자(鑄字) · 남학(南學) · 예장(藝場) · 장충동1가(奬忠洞一街) · 장충동2가 · 묵정(墨井) · 쌍림(雙林) · 광희동1가(光熙洞一街) · 광희동2가 · 방산(芳山) · 주교(舟橋) · 오장(五壯) · 입정(笠井) · 산림(山林) · 초(草) · 무학(舞鶴) · 흥인(興仁) · 신당(新堂) · 황학(黃鶴) · 중림(中林) · 만리동1가(萬里洞一街) · 만리동2가 등 74개 동이 있다.

중랑구(中浪區)

시의 동북부에 위치한 구이다. 면적은 18.50㎢이고, 인구는 41만 3909명(2015년 현재)이다. 구청 소재지는 신내동이다. 조선시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에 속했으며,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 때 구리면 상봉 · 중화 · 묵동 · 신내 · 망우리 등과 성동구 면목동이 동대문구에 편입되어 망우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88년 동대문구망우출장소 관할지역이 분리되어 중랑구가 신설되었다.

동쪽은 아차산 줄기와 망우리고개를 경계로 경기도 구리시와 접해 있으며, 남쪽은 광진구, 서쪽은 동대문구와 성북구, 북쪽은 노원구와 접해 있다. 대체로 중랑천과 검암산 · 망우산 · 용마봉 서쪽 기슭의 중랑천 일대의 충적평야 지대에 주택지가 발달해 있다. 그리고 농경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반면 노동력이 풍부해 잡화 · 일용품 · 의류업이 활발하다. 이 지역은 1970년대 초 토지구획정리사업 시행으로 농경지가 주택지로 변모해 대부분 주거지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통은 중앙선 철도가 지나고 망우로(忘憂路)를 이어 6번국도 강릉노선과 46번국도 경춘로가 중앙을 횡단하여 강원도로 이어지며, 광진구 화양동에서 상봉동을 거쳐 노원구로 이어지는 동이로(東二路) · 동일로가 개통되어 서울 동부지역 개발에 박차를 가하였으며 급기야 도심을 거치지 않고 경기 북부와 경부고속도로 · 중부고속도로와 직결되어 도심소통에 크게 기여한다. 또 상봉동에는 상봉시외버스터미널이 있어 경기 북부와 강원도 및 경상도로 여행하는 시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며, 지하철 7호선이 남북으로 관통하여 도심으로 향한 교통을 원활하게 한다.

문화유적은 충익공 신경진 묘역와 아차산 봉수대지가 있으며, 봉화산에서 고구려 보루로 알려져 있는 석축과 도당굿과 산신제를 지내기 위해 세운 산신각(山神閣)인 봉화제도당이 있다. 망우묘지공원에는 한용운(韓龍雲) · 방정환(方定煥) · 조봉암(曺奉岩) · 오세창(吳世昌) 등 애국독립지사와 순국선열들의 묘소가 있으며, 1907년 의병 봉기를 기념하는 13도창의군탑이 있다.

면목(面牧) · 상봉(上鳳) · 중화(中和) · 묵(墨) · 망우(忘憂) · 신내(新內) 등 6개 동이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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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www.seoul.go.kr)
집필자
강진철·김연옥·박경룡·손인수·이재곤·소재영·이혜은|나각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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