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비세(庇世). 할아버지는 서광리(徐匡履)이고, 아버지는 서문적(徐文赤)이며, 어머니는 유경소(柳景紹)의 딸이다.
1711년(숙종 37)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간원·사헌부의 여러 관직을 거쳐 참의에 이르렀다.
1721년(경종 1) 김일경(金一鏡) 등과 상소하여 노론의 김창집(金昌集) 등 4대신을 처벌할 것과 왕세제(王世弟: 후일의 영조)를 해치려 하였던 환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와 궁녀 석렬(石烈)·필정(必貞)을 처벌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로 인하여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이 일시 몰락하고 소론이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영조가 즉위하자 그 해에 관직을 박탈당하고 이어 유배되었다. 1728년(영조 4) 서소문(西小門)의 괘서(掛書)의 변이 일어나 이인좌(李麟佐) 등이 밀풍군(密豊君)을 추대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관련된 혐의로 유배지에서 서울로 압송되어, 신문을 받던 중 매를 맞고 죽었다. 죽은 뒤인 1755년 역적으로 추시(追弑)되었고, 순종 때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