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사함(士涵), 호는 경은(經隱). 아버지는 찰방 서문영(徐文永)이다.
어려서부터 성품이 침착하고 단정하였으며, 장성하자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니 당대의 학자 이재(李縡)가 장래를 기대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서민들의 부담을 덜기 위하여 종래 2필씩 바치게 하던 군포(軍布)를 반으로 줄이고, 부족한 재정을 어(魚)·염(鹽)·선세(船稅) 등으로 보충하게 하는 균역법을 실시하게 되었는데, 서종해는 그 일을 주재하고 있던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에게 편지를 보내어 신법의 불편을 극진하게 논하였다.
서종해는 토지의 경계를 정하고 소유면적을 제한하는 일이 백성들에게 편하고 국가재정을 튼튼하게 하는 요체라 하여 60여 조항에 걸친 논설을 지어 「곽식문답(藿食問答)」이라 칭하고 조정에 올렸다. 균역법실시를 담당하고 있던 홍계희(洪啓禧)에게는 동문임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문구를 써서 공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