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린은 본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여러 대에 걸쳐 나라의 창고 옆에 살면서 길바닥에 흘린 쌀알을 주워서 생계를 이었다. 금군(禁軍)에 보입(補入)되어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때 이의방(李義方)의 무리에 가담한 공으로 낭장이 되었다. 1174년(명종 4) 동로가발병마사(東路加發兵馬使) 두경승(杜景升)의 휘하에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상장군으로 승진되었다.
뒤이어 동북면병마사 · 서북면병마사가 되었다. 예전에 관할 구역의 역리(驛吏)로부터 은 2근을 뇌물로 받고 서해도안찰사 강용유(康用儒)에게 청탁하였다가 거절당하였다. 이에 왕에게 그의 파면을 건의했으나 다시 거절되자 무례한 행동을 하고 나가버렸다.
결국 왕이 강용유를 파면하자 분노를 풀었으나, 다시 파면을 취소하므로 여러 번의 종용에도 불구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1187년 조원정(曺元正)과 함께 재상 문극겸(文克謙)을 제거하려고 반란을 일으켜 밤에 궁궐을 침범하다가 잡혀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