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천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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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북도 선천지방의 장로교회에 대한 총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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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선천지방의 장로교회에 대한 총칭.
내용

최초의 교회는 선천읍교회로 양전백(梁甸伯) · 노효준(魯孝俊) · 나병규(羅炳奎) 등이 중점적으로 전도하여 1897년에 설립되었다. 그 뒤 휘트모어(Whitmore,N.C., 魏大模) · 베어드(Baird,W.M., 裵維良) 등의 선교사들이 선천에 상주하면서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1902년 2월 남자 사경회를 개최하면서 휘트모어는 양전백을 장로로 주1하였고, 이로써 조직교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06년에는 신도수가 1,400명으로 늘어나자 강신삼(姜信三) 등 신도들의 연보로 그 해 10월 새 예배당을 짓게 되었다.

1907년 양전백이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면서 휘트모어 선교사의 동사목사로 부임하여 이 지역의 개신교 지도자로 부각되었다. 이 시기의 장로는 김석창(金錫昌) · 이성삼(李成三) · 노정관(魯晶瓘) · 한덕제(韓德濟) · 장시혁(張時赫) · 주백영(朱伯英) · 양기혁(梁基赫) 등으로 후일 많은 사람이 목사로 되었다.

1911년 신도가 많아져 기존 교회에 신도를 수용할 수 없게 되자 선천읍내를 가로지르는 장천(長川)을 경계로 교회를 나누기로 하고 장천 남부지역 중심부에 대규모 예배당을 신축하여 선천남교회(宣川南敎會)라고 하는 한편, 기존 교회는 선천북교회(宣川北敎會)로 개칭되었다. 선천남교회의 초대 목사는 김석창, 장로는 이봉조(李鳳朝) · 이창석(李昌錫) · 홍성익(洪性益) 등이었다.

그러나 이 두 교회로도 급증하는 신도를 수용하지 못하게 되어 1930년 북교회로부터 선천중앙교회(宣川中央敎會)가, 1931년에는 남교회로부터 선천동교회(宣川東敎會)가 분립되었다. 그 밖에도 두 교회로부터 수많은 지교회가 설립되어 개신교선교지역 중 가장 발달한 지역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1906년에 개교한 선천 신성학교(信聖學校), 1907년에 설립된 보성여학교가 있고, 의료기관으로는 1905년에 개원된 미동병원(美東病院)이 있다. 선천 YMCA는 1919년 6월에 만들어져 사회계몽운동을 활발하게 펼쳤으며, 1920년에는 YWCA도 조직되어 유치원사업 및 여성 계몽 강연활동을 주도하였다.

일찍이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부로 지정되었던 선천은 평북 전역의 선교 중심지로 발전하는 한편, 선천교회를 중심으로 민족운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1911년 105인사건 때는 신성학교가 그 발상지였으며, 1919년의 3 · 1운동, 1937년의 수양동지회사건 때도 기독교인들이 적극 동참하였다. 1912년 조선예수회장로회총회가 조직된 이후에 평북노회의 중심적 구실을 수행하였다.

참고문헌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상(차재명 편, 신문로교회당, 1928)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하(한국교회사학회 편, 1968)
『한국개신교사』(백낙준, 연세대학교 출판부, 1973)
주석
주1

안수 목사가 장로로 선정된 신자에게 그 교직(敎職)을 주는 일. 우리말샘

집필자
전택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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