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 출신. 본관은 창녕(昌寧). 호는 나옹(裸翁).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곧 상경하여 대종교에 입교한 뒤 고향에 성선시교당(星善施敎堂)과 월선시교당(月善施敎堂)을 세워 포교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때 대대적인 만세운동을 벌였으나 고향을 떠나 쫓기는 몸이 되었다. 1945년 만주로부터 환국한 총본사(總本司)와 연락하여 또 다시 고향에 고선시교당(高善施敎堂)을 위시하여 13개 교당을 세워 포교에 힘쓰던 중 6·25사변을 맞았다.
휴전 뒤 고향에 다시 성주지사(星州支司)를 세웠고, 고선(高善)·자선(紫善)·산선(山善)·문선(文善) 등 여러 교당을 부활시켰다. 이러한 공로를 인정하여 교단에서는 정교(正敎)와 동시에 대형(大兄)의 호가 수여되었으며, 성주지사 전무(典務)로 선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