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여장(汝張). 아버지는 성대팽(成大彭)이다.
1689년(숙종 15) 원자 위호(位號) 문제로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이 조정에서 쫓겨나고 인현왕후(仁顯王后)가 폐출되자 성한은 이를 개탄하여 상소하려 하였으나, 장인 허격(許格)이 극력 저지하여 그만두었다.
1691년 성균관좨주(成均館祭酒)로 있던 남인 학자 이현일(李玄逸)을 공격하다가 양사(兩司: 사헌부와 사간원)와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1693년 진해로 귀양갔다. 이듬해 유배에서 풀려 돌아왔다. 이로부터 향리에 숨어 두문불출하다가 1705년 효성과 품행으로 천거되어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다.
이 후 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에 승진, 1708년부터 회인과 목천의 현감을 지냈는데, 백성들이 비를 세워 덕을 칭송하였다. 어려서부터 교유를 즐기지 않았고 공사(公事)가 아니면 권세가문에 간 일이 없었다. 판서 민진후(閔鎭厚)가 한번 만날 것을 원하였으나 끝내 거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