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도정치 ()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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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후기 특히 19세기에 한 명 혹은 극소수의 권세가를 중심으로 국가가 운영되던 정치형태.
개설

조선의 정치이념으로 볼 때 국정의 정점에 있어야 할 국왕의 권력과 권위가 크게 약화되었다는 데 특징이 있다. 세도(世道)란 ‘세상 가운데의 도리’란 뜻으로서, ‘그 도리를 이끌어나갈 책임’을 함께 뜻하기도 했다. 세도의 책임은 원래 국왕에게 있어야 하지만, 조선후기에 신료의 발언권이 강해짐에 따라 유학자의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산림(山林)이 세도의 담당자로 지목되곤 하였다. 19세기의 권세가는 위와 같은 논리에서 합리화되었으며, 그 자의적인 권력행사를 비판하던 황현(黃玹), 안확(安廓) 등의 논자들이 세도(世道)를 세도(勢道)로 바꾸어 표현함에 따라 세도정치의 용어가 성립하게 되었다. 국왕의 외척 인물들이 권력을 장악했던 순조·철종대의 정치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으나, 고종대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 척족의 국정 주도를 포함시켜 지칭하기도 한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여흥 민씨의 국정 주도는 왕실의 외척 인물이 선왕의 유촉을 받아 세도를 자임한 앞 시기 정치의 전형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변천과 현황

18세기 영조와 정조는 탕평책을 통해 정국을 안정시켰으나 오랜 세월 당파가 결집되어 왔고 유력 가문이 크게 성장해 있어서 강력한 국왕권을 제도적으로 확립하지는 못하였다. 그리하여 정조는 안동 김씨 김상헌의 후손으로 노론의 핵심 가문 인물인 김조순(金祖淳)을 선택하여 그 딸을 세자빈으로 내정하고 세자를 돌볼 임무를 맡겼다. 순조가 11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영조 계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고 그 친정 인물들이 중심이 된 벽파(僻派)가 정치를 주도했다. 하지만 이들의 정국 운영은 앞 시기 붕당인 노론 중심의 정치를 재현하려는 것이었으므로 세도정치라고 불리지 않는다. 김조순은 정적인 벽파의 국정 주도 속에서도 1802년(순조 2)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는 데 성공하여 국구(國舅)의 지위를 얻었다. 1804년에 순조의 친정이 시작된 후 벽파는 조정에서 축출되고 김조순을 포함한 안동김씨 가문의 여러 인물들이 권력을 집중시켜 갔지만, 권력획득 과정에서 연합했던 인사들로부터 견제를 받고 순조가 국정을 주도하려 다각도로 노력함에 따라 1811년까지는 절대적인 권력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국왕의 국정 주도 노력이 1809년 기근과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실패한 후 1812년에서 1826년까지는 김조순이 확고한 정치 주도력을 행사했다. 순조 27년부터 30년 5월까지는 효명세자(孝明世子)가 부왕 순조의 명령을 받아 대리청정하면서 권력의 새로운 기반을 조성하려 했으나 이른 나이에 사망하였다. 김조순은 효명세자가 모은 정치세력을 축출하고 권력을 다시 강화했고 그가 죽은 뒤에는 아들인 김유근(金逌根)이 권력을 계승하여 1834년에 순조가 사망할 때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순조는 죽기 전에 효명세자의 장인인 풍양 조씨 조만영(趙萬永) 가문에 속한 조인영(趙寅永)에게 헌종을 돌볼 것을 부탁했다. 그리하여 헌종이 즉위하여 김조순의 딸 순원왕후(純元王后)가 수렴청정한 1840년까지는 대왕대비의 친정인 김조순 가문 인물들과 국왕의 외가인 조만영 가문 인물들이 균형을 이룬 가운데 연합하여 정국을 주도했다. 그 뒤 1849년까지 헌종이 친정할 때는 조만영 가문이 헌종의 원조를 기반으로 권력 행사에서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한편 헌종도 그 나름대로 국정 주도의 노력을 기울였지만 가시적인 성과는 이룰 수 없었다. 헌종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강화도에서 농부로 살고 있던 왕족 원범(元範)을 국왕으로 선택했고, 따라서 그 재위기간에는 김좌근(金左根)을 중심으로 하는 김조순 가문이 앞 시기보다도 훨씬 심화된 권력 독점을 누렸다.

내용

조선 후기에는 제도적으로 비변사(備邊司)가 국정을 처리하는 중심 관서가 되어 있었다. 주요 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비롯하여 행정·경제·사회 정책 등 국정의 거의 모든 부문을 장악하고 있었다. 언론 활동은 제외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공론과 언론의 의미가 극도로 약화되어 있었다. 비변사는 고위 관원으로 이루어진 구성원들이 회의를 통해 의견을 결정했으며 국왕에 대해서도 상당히 자율성을 확보하였다. 그 회의는 비밀을 보장하게 되어 있었고 소수의 중심 인물이 회의를 진행시켰다. 따라서 권력을 장악한 세도 가문이나 인사는 그들을 대표하거나 대리하는 소수 인물들을 통하여 비변사를 장악함으로써 국정 운영 방침을 뜻대로 결정하고 국왕에게 보고한 후 그대로 수행할 수 있었다. 국왕은 형식상 정치 구조의 최고 정점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는 했으나, 그 실질적 권한은 대단히 미약해졌다. 외척 세도 가문과 인물들은 비변사를 중심으로 국정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힘과 이익, 그리고 이념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려 했다. 김조순을 예로 들면, 그는 국왕의 장인, 왕비의 친아버지라는 권위에다가 정조가 친히 국왕을 돌볼 임무를 맡겼다는 사실을 최대한 이용하면서 홍문관 대제학(大提學)과 규장각 검교제학(檢校提學)을 오랫동안 맡아 학술과 정치이념을 이끌었고, 당시 최정예 군사력인 훈련도감의 훈련대장을 오래 지내다 심복에게 넘겨주었다. 또한 비변사 주교사당상(舟橋司堂上)을 맡았는데 그것을 통해 대상인의 상업 행위를 감독하고 경제적 실권을 장악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상황은 다른 세도 인물들에게서도 대개 마찬가지였다.

19세기에 들어오면 사회가 크게 동요하였으며 1862년에는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발발하였다. 그러나 세도정치기 정부 인사들은 그러한 위기를 인식하지 못했으며,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관계없이 대개 개혁이나 변통에 지극히 소극적이었다. 구조적 사회적 문제들을 수령의 개인적 문제로 돌려버림으로써 사회 모순을 정면으로 다루는 것 자체를 회피하고 삼정(三政)의 문란 등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무너져 가는 과거제에 대해서 몇 가지 복고적 방안을 논의했을 뿐이며, 소외된 서북의 지방민이나 양반 서얼들을 관료로 뽑으려는 노력도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의의와 평가

왕권의 약화와 외척 권세가의 발호가 특징인 세도정치는 우연히 나타난 한때의 현상이 아니고, 조선후기 사회의 모순이 격화되면서 시대적 흐름으로서 빚어졌다. 국왕권의 약화는 단순히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 점은 정조가 신하에게 세자를 부탁해야 했고, 순조가 나이를 먹으면서 국정을 주도하려 했으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권세가 역시 외척이어서 권력을 잡았다기보다는, 조선중기 이래 오랜 기간 동안 정치를 주도해 오거나 그 시기 정치를 주도할 핵심 가문의 인사들이 외척의 자리를 차지하였던 것이다. 세도정치는 전반적인 사회변화를 바탕으로 계속 변화해온 조선의 전통적 지배체제가 한계를 드러내며 마지막으로 도달한 정치운영 형태였다. 따라서 그 시기의 사회나 정치의 성격은 정치 운영형태 자체보다, 그것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와 정치를 성립시킬 수 있는 역량이 어떠한 상태에 있었는가 하는 데서 찾아야 한다. 훨씬 앞 시기부터 사회 기층에서는 민중의식이 성장하고 상업이나 농업 경영을 통한 새로운 성격의 경제력을 갖춘 인물들이 성장했다. 또한 1862년의 전국적 민란에 나타나듯이 민중들은 자기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실력을 사용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한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역량이 없던 지배계층이 오히려 권력을 집중시켜 낡은 지배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던 것이 세도정치이며, 그것은 역사의 진전 과정에서 극복되어야 할 한 단계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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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梅泉野錄』(黃玹, 국사편찬위원회, 1955)
『近世朝鮮政鑑』(朴齊炯, 中央堂, 東京,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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