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극장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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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예술학생좌 / 오닐의 지평선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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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개념
대극장의 상업주의연극에 반대하여 소극장을 중심으로 반기성 · 반상업을 목표로 하는 연극운동.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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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극장의 상업주의연극에 반대하여 소극장을 중심으로 반기성 · 반상업을 목표로 하는 연극운동.
내용

소극장은 대체로 300석 이하의 객석을 가진 규모가 작은 극장을 일컫는데, 여기에 운동이라는 낱말이 붙으면 연극운동의 특수개념을 지니게 된다. 즉, 대극장활동을 일단 상업주의연극으로 보고 그것을 개혁하거나 혹은 상업연극을 극복하는 새로운 연극을 만들어내겠다는 것이 바로 이 연극운동의 목표이다.

아무리 훌륭한 연극사조라도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매너리즘에 빠지게 되고 자연 타락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대를 예리하게 표출할만한 새로운 연극양식과 사조가 등장하는 것은 필연적이다. 이러한 새로운 연극작업은 기성연극을 반대하고 새로운 형식과 사조를 만들어내야 하는 목표를 지녔기 때문에 자연 실험성을 띠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연극작업은 새로운 작가와 연출가들에 의하여 이루어지며 주로 대중을 상대로 하는 대극장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소극장이라는 연극공간을 필요로 하게 된다.

이 연극운동이 처음 일어난 것은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였다. 가스회사출신의 앙트완느(Antoine, A.)가 1887년에 자유극장(The'tre Libre)을 창립해서 당시 유럽을 풍미하던 상업주의연극에 반기를 든 것이 바로 이 운동의 시발이다.

당시 유럽의 연극은 ‘잘 짜여진 연극(well-made play)’을 인기 있는 배우가 연기하는 기업형태의 상업주의연극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앙트완느는 이러한 연극에 반대하여 시대와 인생의 진지한 문제를 리얼리즘의 형식으로 무대 위에 표현하고자 하였다.

인생의 심각한 문제를 다루고 현실의 한 단면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리얼리즘 희곡이 채택되었고, 주인공 위주의 연기가 아닌 앙상블 연기와 사실적인 연출이 채택되었다. 또한 희곡의 내용에 적합한 매우 사실적인 무대장치·소도구·의상 등이 채택되었다.

8년간 계속된 앙트완느의 자유극장운동은 주변 국가로 퍼져나가서, 영국에서는 독립극장(Independent Theatre)·무대협회(Stage Society), 독일에서는 자유무대(Freie B○hne)·신민중무대(Neue Folks B○hne), 러시아에서는 모스크바예술극장(Moscow Art Theatre) 등이 창설되었다.

이 운동은 동양으로까지 전파되어 1924년에는 일본에 스키지소극장(築地小劇場)이 세워져서 우리나라·중국 등에 영향을 주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스키지소극장이 세워지기 몇 해 전에 그와 비슷한 연극운동이 일어났다. 즉, 1920년 봄에 동경에서 조직된 극예술협회(劇藝術協會)의 연극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극예술협회는 동우회(同友會)순회연극단(1921)과 형설회(螢雪會)순회연극단(1923)을 조직하여 순회소극장운동을 벌임으로써, 신파 상업주의연극으로 침체해 있던 연극계에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때 비로소 사실주의적인 희곡과 연출기법·무대장치 등이 시도되었다.

그러나 이들의 순회극단은 이름 그대로 학생들의 일시적인 아마추어연극운동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극작가 김우진(金祐鎭)과 연출가 홍해성(洪海星)만은 소극장운동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작품과 비평을 통해서 그 뜻을 펴려 하였다.

김우진이 쓴 「자유극장 이야기」라든지, 김우진·홍해성이 공동집필한 「우리 신극운동의 앞길」 같은 글이 바로 그러한 의지의 표현이었다. 그들은 또한 서울에 소극장을 마련하려는 구체적인 안까지 가지고 있었으나 김우진이 자살함으로써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처럼 1920년대 초에 고개를 들었던 이 연극운동은 이 땅에 조그만 씨앗을 떨어뜨렸던 것이다.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것은 1930년대에 이르러서였다. 즉, 1931년에 서울에서 조직된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의 신극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단체는 소극장을 끝내 갖지는 못하였지만 경성공회당을 거점으로 서구의 근대극운동을 이 땅에 소개하고 리얼리즘극을 정착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유치진(柳致眞)·함세덕(咸世德) 등 리얼리즘작가들을 배출하는 등 연극계를 혁신시켰지만 이들도 일제의 탄압으로 8년만에 좌초하고 말았다.

다시 이 운동이 재개된 것은 광복을 맞이한 뒤였다. 신협(新協)의 전신인 극예술협회와 박노경(朴魯慶)이 주도한 여인소극장(女人小劇場)의 연극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들의 운동도 국립극장 설립과 6·25전쟁으로 끝나고 말았다.

이처럼 1920년대 초 이후 간헐적으로 시도된 이 운동은 반신파극(反新派劇)에 성공, 리얼리즘을 미흡하나마 이 땅에 정착시킴으로써 신극의 주류가 되게끔 하였다. 그런데 리얼리즘을 위한 이 운동은 필수적 요건인 극장을 가지지 못하였기 때문에 언제나 본격적 실험을 하지 못하고 아마추어리즘의 수준에 머물고는 하였다.

서구 근대극을 기조로 한 이 운동이 리얼리즘 일변도로 흐르자, 반(反)리얼리즘의 소극장운동이 고개를 들기 시작하였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초반에 걸쳐 일어난 제작극회(制作劇會)·실험극장(實驗劇場) 등의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때마침 을지로 입구에 원각사(圓覺社)라는 소극장이 세워짐으로써 그 곳을 거점으로 반연극(反演劇)계통의 연극실험이 약간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 실험극운동을 펼치지는 못하였고, 특히 원각사가 2년 만에 소실됨으로써 거점마저 잃었던 것이다. 실험극장 발족에 이어 민중극장(民衆劇場) 등 동인제(同人制) 형태의 극단들이 생겨나서 변형된 소극장운동을 벌였으나 거점이 없어 지속성이 없었고, 서구의 새로운 연극을 무비판적으로 소개하는 데 그쳤다.

이처럼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이 연극운동은 간헐적이었고, 따라서 리얼리즘의 수용조차 뿌리를 깊이 내리지 못했다. 그러다가 1969년에 극단 자유극장이 명동에 ‘까페 떼아뜨르’라는 80석의 살롱극장을 마련함으로써 이 연극운동은 전기를 맞게 되었다.

이 극장으로 인하여 기존의 자연주의무대 일변도의 극장개념에 일대 변화가 닥쳐왔고, 소극장운동도 내실을 기할 수 있는 문턱까지 오게 된 것이다. 즉, 천편일률적이고 자연주의적인 무대공간 개념으로부터 해방시킴으로써 연극공간의 개념을 확대시켰다.

특히 1960년대 중반까지의 이 연극운동이 순전히 외래성을 띠었던 데 반해서 까페 떼아뜨르 이후부터는 자생성을 띠게 된 점이 중요하다.

까페 떼아뜨르가 전위적인 구미연극만 하지 않고 민속인형극·판소리 등 전통극 공연을 곁들였다는 것은 한국적인 연극의 모색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까페 떼아뜨르의 소극장운동도 공연법과 세금공세에 밀려 고초를 겪다가 7년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소극장의 공연활동을 규제하는 공연법 등의 전근대적 행정규제 외에 사회단체의 후원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이 운동은 새 연극창조의 실험적 구실을 하여야 하므로 영리와는 거리가 멀었으며, 사회단체의 후원을 필요로 한다.

7년간의 까페 떼아뜨르운동에서는 연극유산의 개발과 오태석(吳泰錫) 등 신진극작가들의 배출 및 이오네스코(Ionesco)·베케트(Beckett, S.) 등 부조리극작가(不條理劇作家)들의 본격적 소개라는 업적을 남겼다.

특히 까페 떼아뜨르의 운동은 리얼리즘이 소극장운동의 전부라는 고정관념을 깨뜨린 동시에 연극의 상상력을 확대해주었고, 또한 연극을 다양하게 펼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뒤이어 마련된 까페 파리·에저또소극장·실험소극장·창고극장·공간사랑(空間舍廊) 등이 여러 각도에서 다양하게 이 운동을 벌였는데, 대체로 두 갈래로 진행되었다.

사실 소극장운동이란 타성적 연극의 흐름으로부터 벗어나 첨단적 시대정신을 반영하는 새 연극의 창조·실험이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의 연극상황이 실제로 극복해야 할 상업주의연극 자체가 약하고 공연장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험적 구실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이 운동은 실험적 성격의 운동과, 다른 하나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무대공간을 소극장으로 메꾸려는 경향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도전과 극복과 정립의 미래창조라는 당초의 소극장운동개념을 이완시키기도 하였지만, 연극붐 조성과 관객확대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다.

실험소극장의 「에쿠우스」·「아일랜드」·「신의 아그네스」 등이 바로 좋은 본보기이다. 그러나 1981년에 공연법이 개정됨으로써 소극장이 합법적으로 서게 되자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에 많은 소극장이 세워지기는 하였지만, 본래의 반상업극이라는 연극운동보다는 공연장 부족을 메우기 위하여 생겨났고, 일부는 상업적으로 흐르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이 운동은 1920년대초부터 간헐적이나마 부단히 일어났으며, 신파극을 물리치고 리얼리즘극을 미흡하게나마 토착시키는 데 기여하였고, 또 부조리극을 이식하였으며 연극의 다양화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나라 소극장운동의 취약점은 소극장 없이 벌여온 점이며, 소극장이 생긴 뒤에는 대극장 구실까지 한 점이라 볼 수 있다. 즉, 직업극단들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대극장무대가 극히 적으므로, 대신 소극장무대를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소극장이 실험적 구실을 거의 포기하고 상업주의적인 대극장무대의 축소판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공연법 개정 이후 소극장운동이 별로 제약을 받지 않게 되었으나 연극인들의 영세성으로 인하여 소극장이 예상만큼은 늘어나지 않았고, 새로 생겨난 몇 개의 소극장들도 재정난이나 또는 창조적 실험정신의 부족으로 새로운 연극문화를 창조하는 산실이 되지 못하고 있다.

이 운동이 꽃을 피우려면 극복해야 할 상업연극이 굳건하여야 하며, 또한 성숙한 사회의 뒷받침이 필요하다.

참고문헌

『전통극과 현대극』(류민영, 단국대학교 출판부, 1984)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 출판부,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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