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8년 경상남도 밀양에서 출생했다.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밀양공립소학교를 거쳐 1901년 사립 진성학교(進成學校)에 입학했다. 1905년 진성학교 보통과를 마치고 진성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으며, 1909년 고등과를 졸업했다. 1910년 8월 보성전문학교 야학부를 중퇴했다. 1909년 5월 내무부 주사로 임용되었으며 1910년 경상남도 서기가 되었다.
일제강점 이후에도 경상남도 도서기로 남아 친일관료가 되었다. 이후 경상남도 고성군수 · 동래군수 · 울산군수를 역임하고 1929년 총독부 내무부 사무관으로 승진했다. 1929년 조선사편수회 간사와 중추원 통여관 · 서기관을 거쳐 강원도 문관보통징계위원, 강원도 참여관, 경상남도 참여관 · 사무관, 강원도지사, 전라북도지사, 총독부 시가지계획위원회 임시위원 등을 역임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朝鮮功勞者銘監)』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38년 8월 전라북도지사로 재직 중 비행기헌납기성회를 조직하고 12월 육군기 1대와 해군기 1대를 헌납했다.
1940년 9월 선만척식회사 이사, 1941년 5월 만주척식회사 이사, 1941년 8월 친일단체 흥아보국단 설립에 참여했으며, 1943년 4월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장, 1944년 12월 반도무훈현창회 위원, 1945년 2월 ‘내선일체화’ ‘전쟁협력’의 구호 아래 결성된 대화동맹의 이사, 1945년 2월 국민동원총진회경기도역원대회 이사로 친일활동에 적극 참여했다. 해방 직전 1945년 6월 16일 강원도지사로 재임되어 해방을 맞았다. 미군정청 강원도지사로 근무하다가 10월 17일 해임되었다. 해방 후 반민족행위로 체포되었다가 보석 출감되었다. 1950년 5월 7일 사망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26년 서보장(훈6등), 1928년 대례기념장, 1930년 서보장(훈5등), 1935년 서보장(훈4등)을 받았다.
손영목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17·18·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8: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465∼510)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