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북도 경성 출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3월 중순경 향리에서 장날을 이용하여 주민 200여 명을 이끌고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다가 경찰에 잡혔으나 얼마 뒤 훈방되었다.
이어 1919년 7월 초순 송윤섭(宋玧燮)의 집에서 동지 이상호(李相鎬) 등 8명이 비밀리에 회합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국내 연통제(聯通制)의 조직에 적극 호응, 가담하기로 결의하고, 연통제 경성군(鏡城郡) 지부조직을 완료하였다.
송관섭은 동지들의 권유로 재무를 담당, 우선 군자금모집에 적극 활동하여 군내의 유지와 부호들이 독립성금으로 갹출한 수백원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조직을 통하여 송달하였다.
그뒤 이 운동을 더욱 대규모적으로 확산, 보급시키기 위하여 서울과 연락하는 등 활약하다가 1920년 3월초 경성군 자택에서 미행하던 일본경찰에 잡혀 1920년 8월 10일 함흥지방법원 청진지청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자 중앙본부와 연락하여 함경북도지부를 조직하고 그 회장에 취임, 좌우합작적인 민족유일당운동을 전개하였다. 함북지부내의 군단위 조직을 위하여 활약하다가 3년여에 걸친 옥고의 후유증으로 죽었다.
1977년에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