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병조 ()

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신한청년당 대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이칭
신암(新巖)
이칭
송영석(宋永錫)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7년(고종 14)
사망 연도
1942년
출생지
평안북도 용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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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일제강점기 때, 신한청년당 대표, 임시정부 국무위원 등을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개설

일명 송영석(宋永錫). 호는 신암(新巖). 평안북도 용천출생. 송재홍(宋再弘)의 3남이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가 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 용천에서 청년들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도록 지휘하였다. 그 때 대한국민총회를 조직, 평의원이 되었다. 그 뒤 군자금을 모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일제의 위협이 가중되자 1921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상해의 대한적십자사 감사, 국민대표회의 대표, 신한청년단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와 보강에 힘썼다. 1926년 2월 18일에는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8월 18일에는 최창식(崔昌植)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되었고 동시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도 겸직,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투탄의거 후 임시정부는 부득이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로 이동하게 되었다. 차이석(車利錫)·양우조(楊宇朝)·문일민(文一民) 등 7명과 같이 장쑤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해외독립운동기구의 통일을 위해 각 방면에서 추진하였다.

이어 이른바 5당(五黨)의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통일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 등 5인이 임시정부를 떠나서 통일당에 참가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정통의 맥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차이석과 같이 임시정부를 사수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가 장쑤성 난징[南京]으로 이전하고 북경(北京) 교외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과 미주(美洲) 등지에 산재한 대한인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회·단합회·애국단 등 6개 단체가 모여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이 급박해지면서 임시정부가 난징에서 창사[長沙]로, 다시 광둥[廣東]·류저우[柳州]·치장[綦江] 등지로 이전할 때에도 국무위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국가적 법통성을 사수했다. 1939년 10월 치장에서 국무위원을 개선할 때에도 차이석·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홍진(洪震)·조완구(趙琬九)·조소앙·지청천(池靑天) 등과 같이 다시 선임되어 군사활동의 촉진과 조소앙의 건국강령 제정 등에 조력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하고 제4차 개헌을 통해 주석지도체제(主席指導體制)로 변경할 때, 역시 국무위원에 중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고문, 임시정부 회계검사원장직을 가지고, 광복군을 설립하고 대원수부(大元帥府)의 신설 및 중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상훈과 추모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임정과 이동녕연구』(이현희, 일주각, 1989)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의 법통성』(이현희, 동방도서, 1987)
『대한민국독립운동공훈사』(김후경, 광복출판사, 1983)
『독립운동사』 4·6·9·10(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1983)
『대한민국임시정부사』(이현희, 집문당, 1982)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朝鮮民族運動年鑑』(在上海日本總領事館警察部第二課編, 東文社書店, 1946)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이현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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