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송영석(宋永錫). 호는 신암(新巖). 평안북도 용천출생. 송재홍(宋再弘)의 3남이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해 1914년 졸업과 동시에 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향리 용천에서 청년들을 만세시위운동에 참여하도록 지휘하였다. 그 때 대한국민총회를 조직, 평의원이 되었다. 그 뒤 군자금을 모금해 독립운동을 지원하다가 일제의 위협이 가중되자 1921년 상해(上海)로 망명하였다.
그 곳에서 상해의 대한적십자사 감사, 국민대표회의 대표, 신한청년단 대표 등을 역임하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와 보강에 힘썼다. 1926년 2월 18일에는 여운형(呂運亨)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부의장에 선임되었다. 그 해 8월 18일에는 최창식(崔昌植)의 후임으로 임시의정원 의장에 선임되었고 동시에 임시정부 국무위원으로도 겸직, 활동하였다.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훙커우공원[虹口公園] 투탄의거 후 임시정부는 부득이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로 이동하게 되었다. 차이석(車利錫)·양우조(楊宇朝)·문일민(文一民) 등 7명과 같이 장쑤성[江蘇省] 전장[鎭江]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해외독립운동기구의 통일을 위해 각 방면에서 추진하였다.
이어 이른바 5당(五黨)의 통합운동이 일어났다. 통일작전이라는 명목으로 임시정부의 국무위원 7인 가운데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김규식(金奎植)·조소앙(趙素昻)·최동오(崔東旿) 등 5인이 임시정부를 떠나서 통일당에 참가하였다. 이 때문에 임시정부 정통의 맥을 유지하기가 매우 힘든 처지에 놓이게 되자, 차이석과 같이 임시정부를 사수하였다.
1937년 임시정부가 장쑤성 난징[南京]으로 이전하고 북경(北京) 교외 루거우차오[蘆溝橋]에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한국국민당·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의 3당과 미주(美洲) 등지에 산재한 대한인독립단·동지회·국민회·부인애국회·단합회·애국단 등 6개 단체가 모여 임시정부의 외곽단체인 한국광복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중일전쟁이 급박해지면서 임시정부가 난징에서 창사[長沙]로, 다시 광둥[廣東]·류저우[柳州]·치장[綦江] 등지로 이전할 때에도 국무위원으로서 임시정부의 국가적 법통성을 사수했다. 1939년 10월 치장에서 국무위원을 개선할 때에도 차이석·이동녕(李東寧)·김구(金九)·홍진(洪震)·조완구(趙琬九)·조소앙·지청천(池靑天) 등과 같이 다시 선임되어 군사활동의 촉진과 조소앙의 건국강령 제정 등에 조력하였다.
1940년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하고 제4차 개헌을 통해 주석지도체제(主席指導體制)로 변경할 때, 역시 국무위원에 중임되었다. 임시의정원 의장, 임시정부 고문, 임시정부 회계검사원장직을 가지고, 광복군을 설립하고 대원수부(大元帥府)의 신설 및 중국과의 조약 체결을 추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