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중부(鄭仲夫)의 사위이다. 인종(仁宗) 때 아버지가 사직(社稷)을 지키다가 죽었으므로, 음보(蔭補)로 산원(散員)이 되었다. 그 뒤 태자부지유(太子府指諭)를 거쳐 위장군(衛將軍)이 되어 태자의 총애를 받았다. 처음에 송나라의 거상(巨商) 서덕언(徐德彦)의 처와 혼인했는데, 처는 천인이었지만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어서 백금(白金) 40근을 환자(宦者)에게 뇌물로 주어 3품의 관직을 얻었다.
의종(毅宗) 말에는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문신들과 교제하므로 무신들로부터 미움을 샀다. 정중부가 실권을 잡자, 화가 미칠까 두려워 처를 섬으로 쫓아내고 정중부의 딸을 처로 삼았다. 그리하여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가 되었다. 이 때 창주(昌州: 지금의 평안북도 창성)·성주(成州: 지금의 평안남도 성천)·삼등현(三登縣) 등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는데 진압하지 못하였고, 신변에 위험이 올까 두려워 병을 핑계되고 사직하였다.
1174년(명종 4)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병부상서(兵部尙書)가 되었고, 이듬해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어 위세를 떨쳤으며, 뒤이어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친척을 싫어하는 정중부가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있을 때는 재상에 오르지 못하고 추밀원에 있다가, 처에게 부탁해 수사공 상서복야(守司空尙書僕射) 등에 보직되었다.
1178년에 정중부가 치사(致仕)하자,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郎平章事)가 되었으며, 왕의 허락을 얻어 수창궁(壽昌宮)에 살면서 왕에 못지않은 호화로운 생활을 하였다. 1179년에 동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同中書侍郎平章事判兵部事)가 되었는데, 당대의 명유(名儒)인 추밀원사(樞密院使) 문극겸(文克謙)과 추밀원부사 한문준(韓文俊)이 왕의 신임을 받는 것을 시기해 그들을 탄핵하여 좌천시킴으로써 크게 인심을 잃었다. 조신(朝臣)들로부터 미움을 받다가 정중부와 함께 경대승(慶大升)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