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무과에 급제,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 뒤에 세조)이 단종의 보좌세력인 황보인(皇甫仁)·김종서(金宗瑞) 등 원로대신을 살해, 제거하는 계유정난 당시에 처남인 홍달손(洪達孫)을 따라 가담, 협력하였다.
그 공으로써 정난공신(靖難功臣) 3등에 책정, 전농시직장(典農寺直長)에 임명되고 통례문봉례·의영고사(義盈庫使)·선공감판관·한성부판관을 역임했다. 1456년(세조 2)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이 되고 이어 전농시소윤에 옮겨졌다.
이듬해 종부시·한성부·예빈시의 소윤과 부지통례문사(副知通禮門事)를 거쳐 세자우사어(世子右司禦)에 전임되었다. 1459년 판선공감사(判繕工監事)가 되고 1461년 통정대부로 첨지중추원사에 승진, 1463년 가선대부로 나주목사가 되고 여산군(礪山君)에 봉해졌다.
1469년(예종 1) 가정대부에 승진되고 1472년 부호군에 임명되었다. 본래 재능이 없는데도 홍달손의 힘으로 정난공신에 참여, 벼슬이 2품에 이르렀으나 탐욕이 많아서 남의 땅을 빼앗고 양민을 잡아와서 노비로 삼는 일이 있었으므로 1474년에 관직을 파면당하였다. 시호는 양묵(襄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