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신지(信之), 호는 율옹(栗翁). 아버지는 증공조참의 송문절(宋文節)이다. 송정순(宋庭筍)의 문인이며, 정철(鄭澈)과 가까이 지냈다.
1612년(광해군 4)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1591년(선조 24) 정철이 파출(罷黜)되었을 때 신구소(伸救疏)를 올렸다가 연좌되어 10년 정거령(停擧令)을 받았다. 송징은 형벌 및 부세(賦稅)를 경감할 것과 문교 진흥에 힘쓸 것을 조정에 건의하여 정책에 반영하기도 하였다.
고용후(高用厚)가 무고를 당하여 계옥되었을 때에는 신무소(伸誣疏)를 올려 임진왜란 때 의병으로 순국한 고경명(高敬命) 3부자의 충효를 들어 석방을 청하였고, 1612년에 이이첨(李爾瞻)이 폐모론을 주장하자 성균관 유생으로 항소를 올렸다. 담양의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율옹유고(栗翁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