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희문 쇄미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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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오희문 쇄미록 1책 임진남행일록
오희문 쇄미록 1책 임진남행일록
조선시대사
문헌
국가유산
조선시대 학자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실기. 피란일기.
국가문화유산
지정 명칭
오희문 쇄미록(吳希文 ?尾錄)
분류
기록유산/전적류/필사본/일기류
지정기관
국가유산청
종목
보물(1991년 09월 30일 지정)
소재지
경남 진주시 남강로 626-35, 국립진주박물관 (남성동,진주성)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시대 학자 오희문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실기. 피란일기.
서지적 사항

7책. 필사본.

개설

이 책은 오희문이 한양을 떠난 1591년(선조 24) 11월 27일부터 도성으로 돌아온 다음날인 1601년 2월 27일까지 만 9년 3개월간 임진·정유 양란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면서 지내던 일을 기록한 일기이다.

책의 명칭을 ‘쇄미록’이라 한 이유는 『시전(詩傳)』 모구장(旄丘章)에 있는“瑣兮尾兮 遊離之子(쇄혜미혜 유리지자: 무엇보다 누구보다 초라한 것은 여기저기 객지를 떠도는 사람)”라는 문구에서 취한 것으로 유리기(遊離記) 또는 피란록(避亂錄)이라는 뜻이다.

내용

책의 내용은 제1책이 「임진남행일록(壬辰南行日錄)」과 「임진일기」이다. 이 가운데 「임진남행일록」은 날마다 기록한 것이 아닌 신묘년(1591) 11월 27일부터 임진년(1592) 6월 말까지 사이의 중요한 사실만 들어 기록한 것이다.

제2책은 「계사일록」인데 1593년 정월 14일부터 3월 말까지의 기록이 없다. 이것은 그가 당시 중병에 걸려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제3책은 「갑오일록」, 제4책은 「을미일록」·「병신일록」·「정유일록」, 제5·6책은 「정유일록」, 제7책은 「기해일록」·「경자일록」·「신축일록」으로 구성되어 각 연도의 사실을 적고 있다.

그리고 각 책의 말미에는 국왕과 세자의 교서(敎書), 의병들의 격문(檄文), 명나라 장수의 성명문(聲明文)과 각종의 공문서, 과거방목(科擧榜目), 기타 잡문을 수록한 것들도 있다.

이 책은 오희문의 개인 일기인 까닭에 주로 사생활을 기록한 부분이 많으나 전쟁에 관한 기사도 많이 실려 있다. 왜병의 침입과 전국 각지의 전황, 관군의 무력, 명군(明軍)의 내원(來援)과 화의(和議), 화의의 결렬과 왜병의 재침 등 임진·정유 양란의 전황이 대략 기술되어 있다.

특히 이 가운데는 다른 책에서 볼 수 없는 기사가 수록되었다. 그가 전라도 장수에서 직접 보고 들은 금산·무주·용담·진안·웅현·전주 등 여러 곳의 전황과 전라감사 이광(李洸)의 용인전투에서의 패배, 경상도 의병장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 전라도 의병장 김천일(金千鎰)·고경명(高敬命)·김덕령(金德齡),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심수경(沈守慶) 등의 애국정신과 활동 등이 그것이다. 이외에도 왜군의 잔인한 살인·방화·약탈·강간 행위, 명군의 무지한 약탈과 행패, 한양의 파괴 상황에 관한 내용은 중요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다.

이 밖에도 이 책은 전쟁에 관련된 기사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와 민중들의 생활 상태를 엿볼 수 있는 기록이 있다는 데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 예컨대 전란으로 인한 피란민들의 유리, 군사 징발과 군량 조달로 인한 백성들의 도산(逃散), 처와 자식을 버리고 도망한 아버지, 자식을 버리고 달아난 어머니, 죽은 어머니의 젖을 만지면서 우는 아이 등을 기록하였다.

이외에도 임진년에는 걸식자가 많았으나 다음해에는 다 굶어 죽어 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 비록 집을 지키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행병과 배고픔으로 인해 죽은 사람들이 속출했다는 사실 등 일반 백성의 생활은 참담의 극에 달했으며,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기까지 했다는 기록은 보는 이의 마음을 슬프게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저자인 오희문의 아들·사위 및 친척·친지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수령이었다. 이 때문에 이 기록은 당시 수령의 권력과 호화한 생활, 아전의 생태, 일수(日守)·서원(書員)의 성격, 향청(鄕廳)의 좌수(座首), 면(面)의 장무(掌務), 경주인(京主人)·영주인(營主人)의 임무 등 지방행정 제도를 연구할 수 있는 자료가 많이 있다.

또 군대의 징발과 공물의 징수, 군량의 수송, 잡역의 초정(抄定), 농민의 경제 생활에 관한 실제 문제가 있다. 더욱이 오희문이 양반으로서 많은 노비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특권과 노비들의 비참한 생활, 특히 노비의 신공(身貢)과 매매·소송·입안(立案) 및 각지의 산물과 풍속에 대해서도 자세히 실려 있다.

1962년 필사본을 대본으로 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활자화해 『한국사료총서』14로 간행했으며, 상·하 2책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이 책의 해제가 실려 있다. 이 책은 비단 임진왜란에 관한 사료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회 경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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