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필 수서본(手書本).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1책이 현전한다.
어윤중은 1877년(고종 14)에도 전라우도암행어사로 12개조의 내정개혁안을 진정한 바 있다.
그는 1881년 4월(음력)부터 11월까지 약 7개월 간 조사일본시찰단(朝士日本視察團)의 조사로서 일본을 방문하고 귀로에 청국에 들러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때 명치일본(明治日本)의 발전상과 낙후된 청국의 실상을 비교, 관찰하면서 조선의 개혁방안을 모색하는 가운데 참고가 되는 자료를 광범위하게 수집해 채록해 놓은 책이다.
그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과거(科擧)를 혁파하면 공명진취(功名進取)를 도모하는 자들이 모두 분주하게 다투어 외국에 나가 재예(才藝)를 배우고 습득하여 돌아올 것이다.”라는 과거제도 폐지론 내지 서양문물 수용론을 비롯해 관료제도의 개혁, 외국기술자의 고빙, 군사제도의 개혁, 유학생의 해외 파견, 근대적 학교의 설립, 기선 도입·해운 보호·상업 육성, 재정관할권의 중앙집권화 및 광업 진흥 등 정치·경제·군사·교육 등에 걸친 개혁 구상이 담겨 있다.
둘째, 「각교총론(各敎總論)」·「횡빈분의(橫濱紛議)」·「해군확장론(海軍擴張論)」·「내각책임(內閣責任)」·「동경부상법강습소약칙(東京府商法講習所略則)」·「삼정은행(三井銀行)」·「본년상반계조선부산항수출입표(本年上半季朝鮮釜山港輸出入表)」·「본년상반기조선부산항수출입품원가표(本年上半期朝鮮釜山港輸出入品元價表)」 등 조선의 제도 개혁에 참고가 될 만한 자료가 채록되어 있다.
셋째, 일본 내에 남아 있는 한국 문물에 관한 기록이 채록되어 있다. 일본에 유입된 한적(韓籍)으로서 『백제본기(百濟本記)』·『백제신찬(百濟新撰)』·『태평통재(太平通載)』·『태평후기상설(太平後記詳說)』·『동문문기(東文文幾)』·『삼한귀감(三韓龜鑑)』·『동국문감기(東國文鑑紀)』·『동몽선습(童蒙先習)』·『훈몽자회(訓蒙字會)』 등을 지적하고 있다.
또, 해동통보(海東通寶)·해동중보(海東重寶)·삼한통보(三韓通寶)·동국중보(東國重寶) 및 신라국전(新羅國錢) 등 일본에서 발견된 신라 이래 조선까지의 우리나라의 화폐 형태를 그림으로 채록하고 있다. 아울러 일본과 발해간의 고대무역에 관한 기록도 수록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당시 일본과 청국의 실정, 그리고 미국·프랑스·러시아·스위스 등 구미제국의 정세와 문물 등에 관해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메모해 놓고 있다. 이 책의 말미에는 어윤중 자신이 만났거나 만날 예정이었던 일·청 양국의 인사들, 즉 고토(後藤象二郎)·이타가키(板垣退助)·후쿠자와(福澤諭吉)·이홍장(李鴻章)·좌종당(左宗棠)·유종상(劉鍾棠)·양창준(楊昌濬) 및 장수성(張樹聲) 등의 명단도 기재되어 있다.
어윤중은 일본 및 청국을 시찰한 뒤에 『중동기(中東紀)』를 남겼는데, 『수문록』은 그 대본이 된 메모첩인 것으로 보인다. 어윤중은 귀국 후 감생청(減省廳) 구관당상(句管堂上) 및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를 역임하면서 1881∼1884년 개화운동을 주도했고, 또 1894∼1896년에는 주로 탁지부대신으로서 갑오경장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므로 이 책은 어윤중의 개혁사상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