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방의 길이는 728보(步)이고 둘레는 20리가 되며 벽골제·의림지와 함께 우리 나라 3대저수지로 불린다.
위치는 밀양의 속현이었던 수산현으로 현재의 하남읍 수산리·귀명리 지역과 초동면의 검암리·금포리에 걸치고 있다. 이 지역은 삼한시대에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이라고 하였는데 ‘미동’은 우리말로 물동·물둑(제방)을 뜻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東夷傳)에 벼농사를 위주로 한 이러한 지명이 많이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이 저수지는 서력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측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밀양도호부(密陽都護府) 고적조의 기록을 보면 고려 말에 김방경(金方慶)이 제방을 쌓고 관개를 하여 일본정벌을 위한 군량미를 비축했다는 전설이 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제방의 길이가 728보이고 당시에 이미 제방이 무너졌지만 고쳐 쌓지 않았다고 기록한 것으로 보아 15세기 중엽에는 저수지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점필재집 佔畢齋集》에서는 1467년(세조 13)에 체찰사 조석문(曺錫文)이 밀양·창녕·청도·창원·대구·현풍·영산·양산·김해 등 9개 고을에서 장정을 동원하여 제방을 다시 수축하였다고 한다.
《밀주지 密州誌》·《밀주구지 密州舊誌》·《교남지 嶠南誌》 등에서도 “못의 가운데 죽도(竹島)라는 작은 섬과 오산(鰲山)이 있고 못 안에 갖가지 풀이며 연꽃과 세모마름 등이 자생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지금도 이 지역사람들이 ‘대섬’과 ‘자라목산’이라고 부르는 곳으로 남아 있다.
1463년에 제방을 모으고 국둔전(國屯田)으로 만들었다가 200결(結)이나 되는 경작지의 반은 평민들에게 경작하도록 하고 나머지 반은 지금은 없어진 봉선사(奉先寺:밀양시 하남읍 대사리 뒷산 중턱에 ‘절티골’이라고 불리던 곳에 있었던 큰 절)에 주었다가 성종 때 다시 환속시켰다고 한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에 황폐하여 이용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이 수리시설을 하기 전인 1928년까지 주위에서 쉽게 이용될 수 있었던 황토흙으로 된 제방이 수산리 471-4번지에서 양동리 465-2번지에 걸쳐 약 1,040m 정도로 남아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저수지는 논으로 변하였다.
이곳의 제방은 낙동강의 지류인 용진강(龍津江:지역민들은 ‘안강’이라고 부르고 있음)물이 국둔전으로 범람해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 쌓은 것이다. 그리고 양수와 배수를 위하여 수산리 524-1번지 부근 자연암반 밑으로 수문을 내었는데, 그 수문의 흔적이 흙 속에 묻힌 채 지금도 남아 있다.
국둔전지 안의 저지대에는 주위의 산으로부터 모여든 물이 고여 자연적으로 저수지가 되었고 이 물을 이용하여 제방 안 비교적 높은 곳에 있는 논밭에 농사를 하였으며 저수지에서는 물고기도 잡고 연근(蓮根) 등을 채취할 수 있었다.
수산제 주위 양동리·귀명리·동촌마을의 산등성이에서는 지석묘(支石墓)나 석곽고분(石廓古墳)을 비롯하여 방대한 양의 조개무덤[貝塚]이 발견되고 있으며 돌칼[石劒]과 4∼7세기경의 유물인 적색연질토기 등 신라시대 토기가 많이 출토되고 있어서 주목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