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찰과 치안 유지가 주된 임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설치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목종과 현종 때 서북면과 동북면에 도순검사(都巡檢使)를 파견한 적이 있다.
1093년(선종 10)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관할에 연평도순검군(延平島巡檢軍)의 존재가 보인다. 그러므로 고려 전기에 이미 동·서북면과 안서·안남·안북·안변 등 도호부에 설치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도 묘청의 난 직후인 1136년(인종 14)에 도성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한 임시 관직으로서 성내좌우순검사(城內左右巡檢使)를 두었다. 하지만, 순검군의 설치는 이보다 앞선 시기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그 뒤 1167년(의종 21)에는 궁궐내의 경비를 강화하기 위해 날랜 장정들을 뽑아 내순검군(內巡檢軍)을 설치하고 양번(兩番)으로 나누어 숙위하게 하였다. 그 조직은 알 수 없지만 순검지유(巡檢指諭)·순검도령(巡檢都領) 등 지휘관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그 뒤 내순검군은 순검군의 일부로서 국왕의 시위(侍衛)가 주된 임무였다. 하지만, 1170년(의종 24) 무신란이 일어나자 오히려 이고(李高)·이의방(李義方) 등에 의해 난에 동원되었다.
그리고 뒤이은 무신집권기에 순검군은 본연의 임무를 상실하고 집권무신의 사병(私兵)으로 변질되었다. 그나마 치안 유지를 위해 야별초(夜別抄)가 두어지면서 곧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고려의 기간 병제인 6위(六衛) 가운데 수도의 치안을 담당했던 금오위(金吾衛)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지만 분명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