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민속춤의 하나. 1969년 중요무형문화재(현, 중요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본래는 지역에 따라 각기 양식과 구성을 달리하면서 그 고장의 광대(廣大)들, 특히 판소리꾼에 의해 추어져왔으나, 구체적인 것은 알려진 것이 없다.
1900년대 초 협률사(協律社)의 조직에서 비롯하여 광무대(光武臺) · 단성사(團成社) · 원각사(圓覺社)로 이어지는 동안, 당시 ‘국고(國鼓)’라고까지 칭송되었던 한성준(韓成俊)이 그 때까지 무작위적 즉흥형식으로 추어지던 춤의 사위와 가락을 1934년조선음악무용연구소(朝鮮音樂舞踊硏究所)의 창립과, 1936년 제1회 무용발표회를 계기로 집대성하고 체계화시켰다.
따라서 이를 많은 문도(門徒)들에게 수습시키는 한편, 손녀인 한영숙(韓英淑)에게 계승하였다. 그 가운데 1969년에 이르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던 <승무>만이, 비교적 소상하게 그 계보를 밝혀주고 있을 뿐이다. 이 밖에 박금슬(朴琴瑟)의 <경기승무 京畿僧舞> 계열과, 198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이매방의 <호남승무 湖南僧舞> 등이 널리 추어지고 있다.
<승무>의 기원을 말해주는 것으로는, ① 천부의 미모와 능수능란한 풍류솜씨를 빌려, 지족선사(知足禪師)로 하여금 파계의 지경으로까지 몰고 가게 한 것이 시작이라는 황진이초연설(黃眞伊初演說)이라든가, ② 상좌승의 기거범절(起居凡節)이나 독경설법(讀經說法)의 모습을 사미승들이 희화시킨 것에서 나왔다는 동자기무설(童子起舞說), ③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 성진(性眞)이 탁발수도에 나섰다가 깊은 계곡에서 8선녀(八仙女)를 만나, 한때 그 미색에 현혹되어 번민하였으나 광대무변한 불도의 참을 깨달아 해탈의 법열을 체험하게 되었던 과정을 무용화한 것이라는 구운몽인용설(九雲夢引用說), ④ <산대가면극> 가운데 노장춤에서 따왔다는 노장무유래설(老杖舞由來說), ⑤ 파계로 환속한 자가 가책을 이기지 못하는 오회(悟悔)의 심정을 춤에 담아본 것이라는 파계승번뇌표현설(破戒僧煩惱表現說) 등이 있다.
한편으로는 ⑥ 악신(樂神) · 건달바(乾達姿)가 <영산회상 靈山會相>의 장엄하고 엄숙한 광경을 묘사한 것이라든가, ⑦ 위(魏)의 조자건(曺子建)이 천태산(天台山)에 올랐다가 범천(梵天)에서 들려오는 오묘한 소리에 고기떼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춤으로 옮긴 것이라는 등의 불교문화사적 기원설까지 나오고 있다.
이 밖에 탁발승이 포교과정에서 군중을 모으기 위해 법무(法舞)를 속화시켜 추었던 것이 항간에 번지게 되었는데, 억불숭유 이후 민간에 의해서 재연된 것이 이 춤의 발상이라고 보는 불교무용유래설이 있어 그런대로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하지만 이 또한 추측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붉은 가사에 장삼을 걸치고, 백옥 같은 고깔과 버선코가 유난히 돋보이는 차림으로, 염불 · 도드리 · 타령 · 굿거리 · 자진모리 등 장단의 변화에 따라 일곱 마당으로 구성되는 춤을 추는데, 신음하듯 번민하듯 움틀거리는 초장의 춤사위에서부터, 열반의 경지에서 범속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하염없는 법열(法悅)이 불법의 진리와 더불어 표상된다는 말미의 춤사위에 이르기까지, 뿌리고 제치고 엎는 장삼의 사위가 서로 혼화(渾和)를 이루어가며, 소쇄(瀟灑:기운이 맑고 깨끗함)함 속에 신비로움이, 역감 속에 정교로움이 감도는 조화의 극치야말로, 가히 정중동(靜中動)의 산 증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