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문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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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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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문서를 관장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내용

이문(吏文)의 교육도 담당하였다. 괴원(槐院)이라고도 하였다. 조선 개국 초에 문서응봉사(文書應奉司)가 설치되어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관장했는데, 이를 응봉사(應奉司)라고도 하였다. 직제는 1408년(태종 8) 당시 지사(知事, 정3품) 1인, 첨지사(僉知事, 종3품) 1인, 검토관(檢討官, 4품) 2인, 교리관(校理官, 5품) 2인, 수찬관(修撰官, 6품) 2인, 서기(書記, 參外) 4인이 있었으며 모두 겸직 관원이었다.

1411년에 문서응봉사를 승문원으로 개칭하고 그 직제도 바꾸어 판사(정3품) 1인, 지사(종3품) 1인, 첨지사(종4품) 2인, 교리(종5품) 2인, 부교리(副校理, 정6품) 2인, 정자(正字, 종7품) 2인, 부정자(副正字, 정8품) 2인을 두고 모두 녹관(祿官)으로 삼았다. 그리고 도제조(都提調)와 제조(提調)도 설치되어 있었다.

1417년에 직제 일부가 개편되어 박사(정7품) 2인, 저작랑(著作郎, 정8품) 2인이 증치되고, 정자가 정9품, 부정자가 종9품으로 낮아졌다. 그리고 세종 때 첨지사가 부지사(副知事)로 개칭되었다.

그 뒤 1466년(세조 12)에 판사가 판교(判校), 지사가 참교(參校), 부지사가 교감(校勘), 저작랑이 저작(著作)으로 개칭되었다. 뒤에 부교리는 교검(校檢)으로 개칭되었는데, 이와 같이 정비된 직제가 ≪경국대전≫에 수록되어 있다.

즉, 도제조(정1품 : 의정이 겸임) 3인, 제조(2품 이상) · 부제조(副提調, 정3품 당상관)는 정원이 없으며, 판교(정3품) 1인, 참교(종3품 : 교훈 담당) 1인, 교감(종4품 : 교훈 담당) 1인, 교리(종5품) 2인, 교검(정6품) 2인, 박사(정7품) 2인, 저작(정8품) 2인, 정자(정9품) 2인, 부정자(종9품) 2인이 있고, 그 밖에 이문습독관(吏文習讀官) 20인이 있었다.

승문원의 관원은 모두 문관으로만 임용하며, 참교 이하의 관원은 다른 관원이 겸임하였다. 그리고 교검 이상의 관원 가운데 1인은 구임(久任 : 장기복무)이었다. 그 뒤 연산군 때 박사 이하의 관원이 혁파되었다가 중종 초에 복구되었으나, 다시 참교 · 교감 · 교리가 혁파되고 교검은 1인이 감축되었다.

뒤에 제술관(製述官) 2인, 이문학관(吏文學官) 3인 및 사자관(寫字官) 40인이 설치되었는데, 사자관은 본업인(本業人 : 중국과 주고받는 문서에서 독특하게 쓰이는 용어를 전공한 사람)이 임용되었다. 그리고 참교 이하의 관원을 다른 관원이 겸임하는 조항은 폐지되었다.

아전(衙前)으로 서리(書吏) 10인과 제원(諸員) 3인이 소속되어 있었다. 그러나 뒤에 서원(書員)으로 대체되고, 그 수도 8인으로 줄었다가 다시 서리 1인, 서원 6인으로 바뀌고 제원은 6인으로 늘어났다. 승문원은 원래 서울 북부 양덕방(陽德坊 : 지금의 종로구 桂洞)에 있었으나 세종 때 경복궁 안으로 옮겼다.

참고문헌

『태종실록(太宗實錄)』
『세조실록(世祖實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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