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은 광의로 해석하면 곡물뿐만 아니라 모든 음식물의 재료를 뜻하나, 사회통념상 협의의 식량인 곡물로 한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식량은 인간의 생존문제와 직결되어 있으므로 우리 생활에서는 무엇보다도 생산과 그 안정적 공급이 중요한 과제가 된다.
여기에서 식량문제가 생기며, 이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비롯된 것으로 매우 만성적이어서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과제이다. 식량문제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기아(飢餓)인데, 일반적으로 기아문제라고 하면 극단적인 기아에서 비롯되는 아사(餓死)는 물론이고 단순한 영양 결핍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개념을 통칭한다.
기아문제는 개인이 필요로 하는 기본 식량을 선택하는 데 제약을 받기 때문에 발생된다고 하겠다. 이것은 충분한 식량을 생산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며, 생산된 식량이 사회 전체에 적절히 배분되지 못하였기 때문일 수도 있고, 빈부의 차가 심화되어 발생된 것일 수도 있다.
이처럼 기아문제의 발생은 개별 소비 차원에서라기보다는, [그림]과 같이 식량의 생산 · 유통 · 소비의 전 과정, 즉 ‘식량시스템’ 속에서 발생되기 때문에 그 문제를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림]에 의하면, 식량문제는 위로는 국민경제의 일환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아래로는 개개인의 소비경제에 바탕을 두고 있는 반면, 좌우로는 개별 소비자의 영양상태, 그리고 농산물을 직접 생산하는 농민경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날 우리 나라의 식량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 식량 수급 상황과 그에 따라 실시되어 온 정책 또는 제도, 그리고 식품 소비형태가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농업국가로서 발전해 왔으며, 신석기시대부터 미곡을 주식으로 했다고 한다. 농업생산력이 뒤떨어졌던 고대나 중세는 그만두고라도, 농업생산력이 상당히 발전했던 것으로 알려진 조선 후기(17, 18세기)에 이르러서도 기근을 당하여 초근목피(草根木皮)로 연명하는 기민(飢民)이 집단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식량문제는 전통사회 전반에 걸쳐 가장 긴요한 통치과제였을 것이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농본정책을 제일의 국가정책으로 수립하여 토지경제에 의한 국가산업 발전과 민생 안정을 기하고자 하였으며, 후기에 이르러 각종 농학(農學)이 발달되어 이상적인 농정책(農政策)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말기의 농업은 풍수해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흉작과 봉건지주 및 관료들의 수탈과 착취, 이에 외환(外患)까지 가세하여 피폐하게 되었고, 생산력이 침체됨과 더불어 양곡의 유통과정도 비정상화되었다. 더욱이, 인구 증가로 식량 수요가 급증하게 되니 식량난은 불가피하였고, 기민이 집단적으로 발생하기에 이르렀다.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1786년(정조 10)에 충청도 · 황해도 · 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의 기민수는 361만5341명에 이르렀는데, 이는 당시 총 인구 735만6783명의 약 45%에 해당하는 숫자이다.
이처럼 식량난이 심각해지자 이들에 대한 기아(飢餓) 양정(糧政:식량에 관련된 모든 정책이나 행정)이 수행되었는데, 당시의 구황방법으로는 전곡진급(錢穀賑給)을 비롯하여 고구마 · 감자와 같은 구황식물 · 대용식물을 재배 · 권장하고, 조세 · 균역 또는 환곡의 상환을 면제하며, 곡물의 가격조절 · 독점금지 혹은 의연품과 기부금을 모집하는 것 등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양곡의 절대적 부족과 더불어, 조선 말기 유일한 식량정책의 하나로 활용되었던 환곡제도가 관의 고리대사업으로 변질됨으로써 양정이 효과를 거두기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양곡의 반강제적 일본 유출은 곡가 인상의 원인이 되고 식량난의 요인이 되었다.
일제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실시한 토지조사사업과 1920년부터 시작한 3차에 걸친 산미증식계획을 통하여 우리 나라를 미곡 중심의 단작형 식량 공급지로 만들었다. 그 결과 국내 미곡생산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기는 했으나, 우리 나라에서의 양정은 일본 국내의 식량 수급과 미가 조절 혹은 농업 공황의 수급을 위한 조정자로서 이용되어 수탈과 희생만 강요되었다.
일제시대 양곡의 국내 생산은 인구증가율을 상회하는 고율로 증산되었지만 연간 1인당 소비량은 오히려 감소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일제가 양곡수출정책을 강행한 데서 비롯된다. 우리 나라 쌀의 수출은 일본 국내의 식량 수급량에 의해 결정되었고, 생산량에서 수출하고 남은 것이 국내 소비곡으로 이용되는 실정이었다.
다시 말해 일본이 풍작이거나 미가가 저렴할 때는 우리 나라 쌀의 대일 수출량이 억제되고, 반대로 공급이 부족한 해에는 크게 증가되었다. 특히 1930년부터 1939년까지 10년간 연평균 양곡 수출량이 1,200만 석에 달하고, 미곡의 수출액은 총 수출액의 평균 40%에 해당하였는데, 당시 미곡 수출을 떠나서는 국민경제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기간의 곡물 수출은 식량이 남아서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지정책에 의한 이른바 기아 수출이었다. 따라서 우리 나라에서는 식량부족이 심화되어 만주로부터 조[粟]나 수수 등 잡곡을 수입하고도 초근목피로 연명하지 않을 수 없는 처절한 상황이었다.
제2차세계대전으로 많은 장정이 징병되어 가자 농촌은 인력 부족에 허덕이게 되어 증산은 되지 않는 데다, 군량미의 수요량과 대일 수출량이 격증됨에 따라 식량 사정이 더욱 악화되었다. 더욱이, 1939년에는 큰 한발로 인하여 심각한 식량 부족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처럼 식량 사정이 악화된 가운데 일본은 전시의 군량을 확보하기 위해 미곡의 자유수매제를 폐지하고, 1940년부터 공출제도를 실시하기에 이르렀다. 이로 인하여 우리 농민은 생산된 양곡을 모두 착취당하고 그 대신에 만주 등지에서 들여오는 대두박(大豆粕:콩깻묵) · 피[稗] 등 동식물 사료를 배급받아 연명하였으며, 그것마저 부족하여 기근에 시달렸다.
한편, 일제는 공출 · 매상 · 배급제도 등의 수단을 통해 식량 통제를 강화하기 위하여 1939년에 <미곡배급조합통제법>을 제정하였고, 1943년에는 <식량관리법>을 제정, 조선식량영단(朝鮮食糧營團)을 창설하여 수탈을 강행하였다.
이렇듯 기아 수출과 강제 공출로 인하여 우리 국민은 외국에서 도입한 조악한 잡곡으로 연명하면서 풍년기근(豊年飢饉)이라는 모순 속에서 희생을 강요당하였다. 다시 말해서, 미곡은 일본으로 수탈당하고 밀 · 보리 · 조 등의 잡곡으로 대체 식량을 소비하게 되었지만, 잡곡까지 합한 1인당 소비량은 1915년에서 1919년까지 평균 2석3승2작에서 1930년에서 1934년까지는 평균 1석6두5승7작으로 기아 식량을 면하지 못하였다.
광복 직후에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일제 식민지하에서 억제되었던 양곡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식량 수요는 급증한 반면 식량 생산은 정체되어 식량 사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에 따라 미군정은 구호양곡으로 16만4000M/T(113만2000석)의 소맥을 도입하여 식량난을 완화하고자 하였으나 곡가는 계속 뛰어올랐다.
극심한 인플레이션과 더불어 곡물의 유통질서가 혼란하게 되자 미군정은 미곡 통제정책을 실시하였는데, 이는 쌀을 농가로부터 구입하여 소비자에게 직접 배급하도록 하는 배급제방식이었다.
한편,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과 함께 <미곡법> 및 <양곡매입법>이 제정, 공포되어 양곡 공출과 배급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식량통제경제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미곡수집제도는 당시의 재정능력 부족으로 수매가격이 시장가격보다 낮았고 반강제적이었기 때문에 실효를 거두기 어려웠다. 그 동안 양곡 도입에 의한 배급제가 실패함에 따라 효율적인 정부양곡관리의 제도화가 요청되었는데, 1950년 <양곡관리법>이 제정, 공포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나라의 양곡관리제도는 한편으로는 정부 관리,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시장 거래의 이중적인 제도 아래에서 운영되어 왔다. 그런데 1950년 6 · 25전쟁이 터지자 그나마 다져 놓은 식량경제의 안정 기반은 완전히 무너졌다. 당시 식량정책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군량 확보와 피난민에 대한 구호양곡의 공급문제였다.
그래서 정부는 되도록 많은 정부관리 양곡을 확보해야만 했는데, 그 소요 규모는 최소한 연간 60만∼70만M/T(400만∼500만 석)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1951년과 1952년에 보기 드문 한해와 수해가 겹쳐 쌀생산은 평년작에 비해 각각 20∼40%나 감수되었고, 그로 말미암아 식량 사정은 매우 심각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방대한 전시예산으로 말미암아 양곡매상 자금은 극도로 제약되어 있었기 때문에 필요 물량을 일반 매입만으로 충당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1951년 <임시토지수득세법>을 제정, 공포하여 토지 수익에 대한 조세를 현물로 납부하도록 하는 한편, 양곡과 비료를 현물로 교환하는 ‘양비교환제도’를 새로이 실시하였다.
그러나 자유시장의 곡가 폭등과 흉작에 따른 절대량 부족으로 목표량의 전량 확보는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결국 정부는 구호양곡 도입 촉구와 더불어 특별 외화대출에 의한 민간양곡 도입과 정부보유불에 의한 양곡 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그 결과 1953년의 총 도입량은 95만9000M/T(710만 석)에 달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막대한 양의 양곡 도입은 물가안정을 해쳐 곡가를 폭락시켰다. 더욱이, 그 해 쌀 생산량이 풍작이어서 공급 과잉현상까지 나타나 1954년의 쌀값은 전년도 대비 23.2%나 하락하였다. 그 결과 심각한 농촌 불황이 초래되어 농촌경제가 궁핍하게 되었으며, 정부는 곡가 하락 방지와 적정 미가 보장을 위해 1951년 이후부터 일반 매입제를 부활시키고 추곡 수매가격을 1954년산 쌀에 대하여 처음으로 시장가격 수준으로 책정하였다.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점차 경제가 안정되어 가면서 식량 소비량은 증대하였다. 그러나 농업 부문의 노동력 감소와 생산자재의 부족으로 생산 증가가 소비에 미치지 않자 식량 가격의 상승이 예견되었다.
이러한 국내 상황에 때맞추어 1954년에 미국에서 제정된 <농업교역진흥 및 원조법(PL480)>에 의하여 1955년 한미 간에 잉여농산물 도입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식량 사정이 크게 호전되었다.
이로 인한 잉여농산물 도입은 우리의 식량난 해소와 물가안정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반면에 저곡가정책 추구를 용이하게 하여 농민의 생산의욕을 저하시키고, 나아가 농업 부문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며 양곡도입 의존도를 심화시키는 등의 부정적인 효과도 가져왔다.
1960년대에 들어와 미국 잉여 농산물 도입 감소와 더불어 1962년의 미곡생산이 전년도에 비해 15.7%나 감수되는 대흉작으로 식량사정이 악화되어 곡가가 폭등하기 시작하였다. 더욱이 다음해인 1963년도 하곡이 연속적으로 흉작이 되자, 식량공급 사정은 더욱 악화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이러한 식량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혼식 장려를 골자로 전국절미운동요강(全國節米運動要綱)을 제정 · 실시하고, 이와 병행하여 ‘양곡예매제와 교환제도’를 신설하였다. 그러나 이 제도만으로는 의도했던 만큼의 양곡을 확보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연이은 흉작에 따른 1963년의 식량 파동으로 곡가의 수확기에도 오름세를 나타냈고, 일부 소비자와 상인의 매점매석현상은 곡가 등귀를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에 정부는 식량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외국 곡물 도입을 서둘렀으며, 1962년 11월부터 1963년 10월까지 1년 동안 수입된 양곡은 약 800만 톤으로 역사상 최고 수준을 기록하였다. 1960년대 후반에도 우리 나라의 식량 수요는 인구 증가와 소득 수준의 향상으로 급증한 데 반하여 국내 식량생산은 이에 따르지 못함으로써 식량자급률은 계속 하락 추세에 있었다.
한편, 정부수립 이후 계속적으로 추진한 저곡가정책은 도시와 농촌간의 소득 격차를 심화시킨 반면, 저곡가는 쌀의 소비를 촉진시켜 외국 쌀의 도입을 증대시킴으로써 국내 곡물의 자립기반이 더욱 약화되었다. 그 결과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식량자급도의 제고가 중대한 정책과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전격적으로 고미가정책(高米價政策)을 표방하면서, 1969년산 매입가격을 전년 대비 22.6%, 1970년산은 35.9%를 각각 인상하는 획기적인 조치를 단행하였다. 또한, 맥류에 대해서는 정부 방출가격을 매입가격보다 낮게 책정하는 이중맥가제(二重麥價制)를 처음 실시하였다. 이 제도는 미곡 소비를 억제시키는 동시에 대체효과가 큰 맥류의 증산과 소비를 촉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1970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을 비롯한 식량수출국의 과잉 재고를 배경으로 세계의 식량수급은 급박한 양상을 나타내지는 않았으며 식량문제에 관한 한 낙관론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73년 후반기에 세계적인 식량 파동을 전환점으로 세계의 식량 사정은 이전의 공급 과잉에서 공급 부족으로 그 양상이 급변하게 되었고, 식량자원이 무기화되면서 세계 식량수급 사정은 불완전한 상태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해마다 막대한 양의 외국 곡물을 도입해야 하는 우리 나라로서는 안보적인 차원에서 식량문제를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제3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72∼1976)을 수립함에 있어 기본 식량인 주곡의 자급화를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농업생산 기반의 확충과 통일계 다수확품종의 확대 · 보급을 추진하는 동시에 미맥수매가(米麥收買價)의 인상 및 이중곡가제도의 강화에 정책의 초점을 두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정부 수매가격이 항상 낮은 수준에서 책정되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정부 수매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1971∼1973년간 쌀 수매가격의 인상률은 연평균 15%였으나 1974∼1976년간에는 연평균 27% 인상하여 가격면에서 주곡 증산을 유도하였다.
또한 정부는 1974년 양곡 소비를 억제함으로써 양곡 도입량을 감축하기 위하여 7분도제(七分搗制)를 실시하였다. 즉, 1974년 5월에 유통질서 확립에 관한 행정 명령으로 정부미 도정률(搗精率)을 과거의 10분도에서 9분도 이하로의 도정을 제한하였고, 같은 해 12월에는 미곡의 도정수률(搗精收率)을 조정하고 7분도정(七分搗精) 이상의 쌀을 판매 금지시켰다. 그러나 이 방책은 양곡 수급사정이 호전되자 1977년 10월에 해제하였다.
한편, 고도 경제성장에 따른 공업화와 산업화는 비농업용 농지의 수요를 급증시켰으며, 이는 농지를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도록 함으로써 식량 증산을 제약하는 큰 요인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1973년에 <농지보전 및 이용에 관한 법률>을 제정 · 공포하여 농지의 타목적 전용을 강력히 억제하였다. 특히, 1973년부터 시작된 통일계 다수확품종의 본격적인 보급으로 우리 나라는 미작에서 세계 최다 수확 국가의 하나로 등장하였으며, 1977년에는 주곡인 쌀과 보리를 자급하는 신기원을 이룩하게 되었다.
우리 나라의 쌀 생산은 1960년부터 1973년 사이 1970년을 제외하고는 400만M/T을 넘은 적이 없었으나 1973년부터는 매년 급증하여 1978년에는 600만6000M/T으로 늘어났다.
이상과 같이 정부의 지속적인 식량 증산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체 식량생산은 인구 증가와 소득 향상으로 급증하는 식량 수요에 미치지 못하여 식량자급률은 계속 하락하였다. 사료곡을 포함한 곡물의 자급률은 1960년대 초에 90% 수준이던 것이 1978년, 1979년에는 75% 수준으로 하락하였다.
미곡의 경우 1976년도부터 일시 자급의 기미를 보였으나 1978년에는 신품종의 심한 병충해로 쌀 생산이 크게 감소한 반면, 쌀 소비량의 급증으로 쌀 자급률은 1979년에 85.7%로 하락하였다.
1980년 이후 전체 양곡의 자급률 추이를 보면 1980년의 56.0%에서 계속 하락하여 1996년에는 26.4%로 크게 감소하였다. 이는 전반적으로 식량 작물의 생산이 감소한 반면, 식생활의 고급화로 육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밀 · 옥수수 · 콩 등 사료곡의 소비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1980∼1996년간에 양곡 생산은 1980년 704만8000톤에서 1996년 550만4000톤으로 감소 추세에 있는 반면, 양곡의 소비량은 이 기간에 1259만6000톤에서 2086만7000톤으로 66%나 증가하였다. 용도별 양곡 소비량의 추이를 보면 식용 소비량은 1970년 686만 톤에서 1996년 617만8000톤으로 10% 감소한 데 반하여 같은 기간에 사료용 소비량은 247만2000톤에서 1037만2000톤으로 4.2배, 가공용 소비량은 207만2000톤에서 390만6000톤으로 1.9배 각각 증가하였다.
1996년의 경우 곡종별 자급률을 보면 쌀 90%, 보리쌀 74%, 서류 100%로 비교적 높은 수준이나, 콩의 자급률은 9.9%, 옥수수 0.8%, 밀 0.4%로 전량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도 쌀 생산량은 냉해로 말미암아 사상 유례없는 흉작을 기록함으로써 1981년에는 무려 244만8000M/T(1560만 석)의 외국 쌀을 도입하였다. 이로 인하여 쌀 자급률은 1978년에 103.8%이던 것이 1981년에는 66.2%로 크게 하락하였다. 그 뒤 쌀 작황이 호조를 보여 쌀 자급률이 다시 증가되어 1985년에는 103.3%에 달하였다.
1986∼1992년 기간중에는 쌀 생산량이 안정적으로 550만 톤 내외를 유지하였고, 또 국민 1인당 쌀 소비량도 점차 줄어들면서 매년도의 국내 쌀 생산이 그 해의 소비량과 거의 맞먹게 되었다. 그러나 1993년에는 냉해로 쌀 생산량이 475만 톤으로 전년 대비 11%나 감소하여 1994년도 쌀 자급률은 87.8%로 크게 하락하였다. 그 뒤 쌀 생산량은 약간 회복되어 500만 톤 내외를 유지하고 있으며, 쌀 자급률은 90∼105%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1980년대 이래 쌀 자급률이 높아짐에 따라 통일계 벼의 보급도 소비자의 양질미 선호에 따라 줄어들기 시작하였다. 1988년까지만 해도 엄연한 품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통일계나 일반계의 정부 수매가격이 동일하였다. 그러나 1989년부터 차등 수매제를 적용하여 일반계의 수매가격이 통일계보다 1,007원 높았으며, 1990년에는 6,620원이 높았다. 그리고 1992년부터는 통일벼 품종은 정부 수매에서 제외되었으며, 그 결과 통일벼는 마침내 자위를 감추게 되었다.
1980년 후반 이후 1992년까지 쌀 수매가격은 농가소득논리에 따라 인상되고, 방출가격은 물가논리에 따라 인상이 억제됨에 따라 시장 외곡이 심화되었다. 이에 따라 민간 상인들의 벼 매입 · 유통기능이 위축되면서 생산 농가는 시장 출하시 제 값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정부 수매량 확대 및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게 되었고, 정부의 수매 부담도 그만큼 가중되었다.
따라서 정부는 1993년 8월에 양정개혁을 단행하기에 이르렀다. 이 개혁안의 주요 내용은 수매가격의 인상을 억제하고, 쌀 가격의 계절 진폭을 확대하며, 쌀 매매업의 허가제를 신고제로 전환하여 경쟁시장체제를 유도하고, 농협의 차액수매 지원을 확대하며, 민간 유통업체에 대해 벼 구입자금을 융자하고, 정부미 방출방식에서는 전면적인 공매제를 도입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1993년 12월에 다자간 국제협상인 우루과이라운드(UR)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우리 나라의 경우 쌀은 UR협정의 이행 기간인 1995∼2004년 기간중 관세화에 의한 수입자유화가 유예되었고, 최소 수입량을 1995년 5만1000톤에서 2004년 20만5000톤으로 증대시키기로 하였다. 또한 세계무역기구(WTO)체제하에서 쌀 수매량은 지속적으로 감축해야 하며, 수매가격을 인상할 경우에는 그만큼 수매량을 더 감축해야 한다.
앞으로 쌀의 시장개방에 대비하여 쌀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농업진흥지역을 중심으로 생산 기반을 집중적으로 정비, 중대형 기계화 추진, 전업농 · 농업회사법인 등 규모화된 경영체 육성, 직파 재배의 확대 및 고품질 다수성 품종개발 등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 주요 식품의 소비량 추이를 보면, 곡물 소비량은 1970년 이래 계속 감소 추세에 있는 반면, 비교적 고급식품이라고 할 수 있는 축산물과 경제 작물의 소비량은 현저한 증가 추세에 있다.
곡종별로 보면, 쌀의 국민 1인당 연간 소비량은 1970년대에는 120∼136㎏ 수준이었으나 1980년대 이후 완만한 감소 추세를 나타내어 1997년에는 102㎏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보리의 경우 1975년까지는 35㎏ 수준이었으나 그 이후 급격히 감소하여 1980년 14㎏, 1990년 이후에는 2㎏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
1960년대만 하더라도 보릿고개라고 하여 보리쌀마저 배불리 먹지 못하던 때도 있었으나, 1970년대 이후 보리가 주식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밀가루의 소비량은 가공식품 등으로 소비가 확대됨에 따라 급격히 증가하여 1970년대 중반부터 보리쌀의 소비를 앞지르기 시작한 이래 1990년대 들어서는 보리쌀의 18배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옥수수 · 콩의 소비량은 1970년대에는 증가 추세를 보이다가 1980년대 이후에는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잡곡 소비량은 1970∼1990년 기간 동안에는 감소 추세였으나 최근에는 약간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한편, 축산물의 소비량은 소득 수준의 향상과 더불어 현저한 증가 추세에 있다. 1970∼1997년간에 걸쳐 쇠고기 소비량은 1.2㎏에서 7.9㎏으로 6.6배로 증가하였고, 돼지고기는 5.9배, 닭고기는 4.4배로 각각 증가하였으며, 우유의 소비량은 이 기간중에 무려 33배로 증가하였다.
이와 같이 축산물의 소비량이 증가함에 따라 사료곡 소비량은 1970년에 58만 톤이던 것이 1997년에는 940만 톤으로 무려 16배나 증가했으며, 이는 최근 곡물 자급률 하락의 주요 요인이 되고 있다. 이 밖에 수산물 · 채소 · 과일 · 유지류 등의 소비량도 현저한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식량 소비패턴의 변화와 더불어 식량생산이 수요에 미달되어 식량자급률은 해마다 떨어지고 있다. 사료곡을 포함한 곡물의 자급률은 1970년의 81%에서 1997년도에는 30%로 하락하였다.
이에 따라 양곡의 도입량은 1970년의 212만 톤에서 1997년에는 1490만 톤으로 7배 이상 증가하였다. 특히, 옥수수의 도입량은 이 기간중에 무려 30배나 증가하였으며, 1965년에는 자급되던 콩이 1997년에는 163만 톤을 도입하게 됨으로써 콩의 자급률은 8.6%로 대폭 하락하였다. 이처럼 곡물의 도입량이 증가함에 따라 1997년도 양곡도입 금액은 약 28억 달러에 달하였는데, 이는 국제수지면에 큰 부담이 되고 있다.
곡물의 자급률이 하락하게 된 원인을 수요 측면에서 보면, 인구 증가와 축산물 수요 증가에 따른 사료곡 소비량의 급증, 그리고 국내에서 증산 여력이 있는 보리와 서류 등의 소비량 감소 등으로 요약될 수 있다. 한편, 공급 측면에서는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른 경지면적의 감소와 보리 재배면적 등의 감소에 의한 경지이용률 하락이 주원인이 되고 있다.
농지면적은 1970년의 230만 정보에서 1997년에는 192만 정보로 감소하였고, 경지이용률은 같은 기간에 142%에서 108%로 현저히 하락하였다. 따라서, 식량자급률을 적정 수준에서 유지하려면 제한된 경지의 이용도를 극대화함으로써 식량 생산능력을 배양하는 동시에 식생활을 우리 실정에 알맞게 정착시켜야 할 것이다.
주식인 쌀과 보리쌀은 대체로 자급하고 있으나 밀 · 옥수수 · 콩 등의 자급률이 현저하게 낮아 전체 식량자급률은 약 30%에 머물고 있는 실정이다. 앞으로 인구 증가와 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식량 수요는 급증할 것이므로 획기적인 식량 증산 및 소비대책이 수립되지 않는 한 식량자급률은 더욱 하락할 전망이다. 식량자급도의 지나친 하락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대책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 실정에 알맞는 식생활을 정착시켜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장기 식량수급의 목표설정, 이를 위한 일관성 있는 식량증산대책, 가격 및 수급정책, 그리고 식생활 개선대책이 조화있게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장기 식량수급 목표는 국민의 적정 영양소요량, 장기 식량수요 및 국민소득 등 전반에 걸친 여러 요인을 고려하여 국내에서 증산이 용이한 식량을 최대한도로 활용할 수 있는 방향에서 수립되어야 한다.
둘째, 농업생산 기반의 확충과 기술개발 등을 통하여 식량 증산에 역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를 위한 투자의 확대가 이루어져야 한다. 특히, 농업연구지도사업비는 극히 낮은 수준이므로 이 분야의 투자 확대가 요청된다.
또한 앞으로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라 상당한 농경지가 비농업용으로 전환될 전망이므로, 식량자급도를 적정 수준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적정 수준의 농지 확보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 농지의 효율적인 보존대책과 더불어 개간 · 간척 등을 통한 농지 확장, 또한 기존 농지의 질적 증대 등에 대한 개발대책이 필요하다.
셋째, 식량 증산을 위해서 농민의 증산 의욕이 고취될 수 있도록 종합적인 대책이 선행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정부의 적절한 소득보상정책은 물론 농수산물의 유통구조 개선과 비축사업 등의 강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현재 생산된 식량이 소비가구에 유통되는 과정과 소비단계에서 상당한 감모가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조사 결과에 의하면 곡물의 유통과정에서 생기는 감모량은 연간 418만 석이나 되며, 소비단계에서도 연간 216만 석이나 버리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넷째, 합리적인 농수산물의 수출입전략을 추진하여 농수산물 수입의 적정화와 다원화를 도모하는 동시에 주요 수입 농산물의 비축제도를 개선해야 할 것이다. 농산물시장의 개방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국내 대책은 물론 적극적인 농산물 수출대책과 함께 수입 농산물에 대한 효율적인 관리방안이 모색되어야 한다. 그리고 농산물 수입은 가급적 통상 마찰을 최소화하고 소비자의 기호와 국내 시장조건에 알맞는 방향으로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