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영산(靈山). 가명은 이광제(李光濟). 호는 인산(仁山). 평안북도 정주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한 후 상해로 망명해 천도교 대표부에서 최동오(崔東旿)·남형우(南亨祐)·이춘숙(李春塾)·이민창(李民昌) 등과 독립운동에 헌신하였다.
또한 이광수(李光洙)·이영렬(李英烈) 등과 독립신문사에 근무하면서, 김여제(金輿濟)와 함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채를 모집하는 데 힘썼다.
1923년 박용만(朴容萬)·신채호(申采浩)·원세훈(元世勳) 등이 북경에서 군사통일촉진회를 조직하고, 안창호(安昌浩)·이동휘(李東輝)·박은식(朴殷植)·최동오 등은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때 각 단체의 분규 조정에 힘썼다.
이들이 결국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조파와 창조파로 분열된 이후, 중국 국민당 요인 장소의(張紹儀)를 만나 조국 광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중합작임을 파악하게 되었다.
신공제는 상해·난징[南京] 등지에 사는 청년들을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제 밀정들을 숙청하면서 중국 학생회·혁명당과 긴밀한 연결을 취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1925년 중국혁명당에 가입하고, 이듬해 중국혁명에 가담하여 장개석(蔣介石) 총사령부에 복무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국민당 요인 오철성(吳鐵城) 등과 교제하였다. 1927년 김규식(金奎植) 등과 중국인·인도인 등으로 구성된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대표 겸 상무위원으로 선임되어 독립운동을 보다 폭넓게 전개하였다.
1928년 동삼성(東三省) 당국이 한국동포를 일제의 밀정으로 단정, 추방하려 하자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와 교섭, 문제를 해결하였다. 1929년 안창호 등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난징지부를 설치하고 박찬익(朴贊翊)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활약하였으며, 1930년에는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하였다.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이듬해 조직동맹에 가입하여 안창호와 같이 독립운동의 방략을 세우며 대당(大黨) 조직준비에 노력하였다. 1933년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에 대한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1934년에는 김규식 등과 중국인을 설득, 한중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항일전선을 폈다.
다음 해 양기탁(梁起鐸) 등과 같이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조직하고 기관지로 월간 『민족혁명』과 주간 『우리길』을 발행하는 한편 군간부 양성에 진력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여러 단체의 대표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곽단체로 한국광복전선을 결성하였다.
이는 항저우[杭州]의 한국독립당·조선혁명당·한국국민당 등 3개 정당과 미주 및 각지에 산재한 대한인독립단·동지회·국민회·애국부인회·단합회·애국단 등 6개의 단체 대표들이 모여서 만든 것이다. 그 해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총간사와 중앙전시독도단(中央戰時督導團) 단장을 역임하면서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1년에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상무위원 겸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42년 한중문화협회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다.
1945년 귀국, 단국대학·청구대학 교수와 외무부 자문위원·한국독립당최고위원·독립동지회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