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고령(高靈). 별명은 신성(申誠) · 신목성(申木聖), 호는 예관(睨觀) · 여서(余胥) · 일민(一民) · 청구(靑丘) · 한인(恨人). 1880년 1월 13일 한성(漢城)에서 태어나 집안의 본향(本鄕)인 충청북도 청원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중추원 의관(議官) 신용우(申龍雨)이다.
1895년 서울로 유학해 1898년 관립한어학교(官立漢語學校)에 입학하였다. 2년 뒤 육군무관학교에 진학해 재학 중 학교당국의 부정에 반발하는 모의에 참여했다가 신병으로 고향으로 내려가던 중에 모의가 실행되어 처벌을 면하였다.
졸업 뒤 임관되어 참위(參尉) · 부위(副尉)에까지 진급하였다. 그 뒤 고향에서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된 소식을 듣고 지방 진위대와 연락해 거사를 계획하다가 실패한 뒤 음독자살을 기도하였다. 이 때 오른쪽 눈의 신경이 마비되어 흘려보는 상이 되므로 스스로 예관이라고 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 이후에는 학회를 조직해 공업계 잡지도 발간하였다. 또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 등 애국계몽단체에도 참가하였다. 중동학교 · 청동학교(淸東學校) · 문동학교(文東學校) 등의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1909년에는 대종교를 믿고 광산경영도 하였다. 1910년 망국조약의 소식을 듣고 다시 음독자살하려고 했으나 나철(羅喆)에 의해 구원되었다.
이듬 해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정(申檉)으로 개명하였다. 손문(孫文)이 이끄는 동맹회(同盟會)에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가맹해 10월의 무창의거(武昌義擧)에 참가해 신해혁명에 공헌하였다.
당시 상해에서 혁명사상을 고취시키려고 호한민(胡漢民) 등이 『민권보(民權報)』 발행을 준비하자 망명 때의 여비 2만원 가운데 잔액 1만원을 희사하였다. 이로 인해 청국정부와 일본영사경찰에게 현상수배되어 프랑스 조계로 피신하였다.
1912년에는 상해의 교민이 늘어나자 독립운동을 위한 교민단체로서 동제사(同濟社)를 조직해 이사장이 되었다. 동시에 중국국민당의 인사와 우호를 증진시키기 위해 신아동제사(新亞同濟社)를 발기하였다.
또한, 환구중국학생회(寰球中國學生會)에 가입해 이등휘(李登輝) · 여일장(余日章) · 주가화(朱家驊) 등의 명사와 교유하였다. 시인단체인 남사(南社)에 가입하여 장정강(張靜江) · 진과부(陳果夫) 등과도 사귀었다.
1913년 상해 프랑스 조계에 박달학원(博達學院)을 설립해 박은식(朴殷植) · 신채호(申采浩) 등과 중국혁명의 선구자 농죽(農竹) 및 미국화교 모대위(毛大衛) 등을 강사로 초빙, 3기에 걸쳐 졸업생 100여 명을 배출해 중국 각 대학 및 구미유학을 주선하였다.
군사교육도 장려하여 한국청년 100여 명을 중국 각지의 군사학교에 입학시키기도 하였다. 또한 대종교의 포교를 통해 독립의식의 고양에도 힘썼다. 1915년 박은식과 대동보국단(大同輔國團)을 조직해 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가를 연결했으며, 잡지 『진단(震壇)』을 발행하였다.
1917년 8월에는 스톡홀름 국제사회주의자대회에 한국독립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동제사를 개칭하여 조선사회당을 급조했으나 대회가 무산되자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에 앞서 미국대통령 윌슨(Wilson, T. W.)이 14개조의 민족자결주의를 발표하자, 만주와 각지의 독립운동가와 연락하여 길림(吉林)에서 독립선언을 하게 하였다. 이어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조직의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동제사의 지식인 청년그룹으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였다.
3·1운동 이후 정부수립운동이 일어나 3월에 해삼위(海蔘威)의 대한국민회의, 4월에 서울의 한성정부(漢城政府)가 수립되었을 때, 상해에서도 4월 제헌의정원회의(制憲議政院會議)에서 정부가 수립되고 10개조의 헌장이 채택되었으나 신병으로 참석하지 못해 각료 선출에는 빠졌다.
그 뒤 제1회 의정원회의에서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7월의 제2회 회의에서는 부의장과 아울러 의원직도 사퇴하였다.
9월에 3개 정부를 통합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11월에 법무총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으로 돌아가자 국무총리대리를 겸임했고, 1921년에는 외무총장도 겸하였다.
이 해 10월 임시정부에서는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신규식을 특사로 하여 부사 박찬익(朴贊翊), 수행원 민필호(閔弼鎬) 등을 광둥[廣東]의 중화민국정부에 파견하였다. 중화민국정부의 북벌서사식(北伐誓詞式)에 참여하고, 11월 대총통 손문을 만나 국서를 전하고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았다. 그 뒤 신병으로 사표를 제출했으나 처리되지 않았다.
1922년 임시정부의 내분이 표면화되어 이승만에 대한 대통령불신임안이 신규식의 불참 속에서 통과되었다. 병상에서 25일간 절식을 하다가, 9월 25일 오후 9시 30분 상해(上海) 법계(法界) 애인리(愛仁里) 주택에서 독립을 기원하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였다.
저서로는 『한국혼(韓國魂)』과 시집 『아목루(兒目淚)』가 있다.
상해 훙차오로[虹橋路] 만국공묘(萬國公墓)에 안장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