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의부(儀夫), 호는 완구(宛丘). 할아버지는 우승지 신택하(申宅夏)이며, 의영고판관(義盈庫判官) 아버지는 신성(申晟)이다.
1784년(정조 8)에 음보(蔭補)로 선공감역(繕工監役)에 기용되어 사도시주부(司寺主簿)·동부도사(東部都事)·경릉령(敬陵令)을 거쳐, 9년 동안 음성·강동·청도의 수령을 지냈다.
1799년에 학문과 덕행의 훌륭함을 인정받아 원자궁(元子宮)의 요속(寮屬)으로 발탁되어 동궁(東宮: 뒤의 순조)을 보필하였으며, 3년 뒤에 동궁이 세자로 책봉되자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익위에 제수되었다. 순조가 즉위한 뒤에 그 공로로 1801년(순조 1)에 우부승지에 제수되었고 그로부터 수년간 열세 번이나 승지에 임명되었다.
1804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부총관(副摠管), 한성부좌·우윤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가 얼마 뒤 공조참판에 제수되고 경연특진관으로 발탁되었다. 1807년에 동지중추부사·동지돈녕부사가 되었고, 1808년에 호조참판의 자리에 올랐다가, 이듬해에 성천에서 죽었다. 젊은 시절에 이덕윤(李德胤)을 비롯하여 이광려(李匡呂)·남건복(南建福)·이영익(李令翊)·이충익(李忠翊) 등과 교유관계가 깊었다. 시문(詩文)과 서예(書藝)에 능하였다.
저서로는 『완구유집(宛丘遺集)』이 전하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