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9년 11월 5일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을미사변 때 조선인 행동대로 가담하였으며, 육군 참령(參領)을 지냈다. 대한제국기에는 중추원 부찬의, 전라남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함경남도장관, 황해도장관,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 등을 지냈다. 1928년 2월 12일 사망했다.
가숙(家塾)에서 한학을 배웠다. 김옥균(金玉均)과 박영효(朴泳孝)의 권유로 1883년 5월 서재필(徐載弼), 서재창(徐載昌), 박응학(朴應學), 정행징(鄭行徵), 임은명(林殷明), 신중모(申重模), 윤영관(尹泳觀), 이규완(李圭完), 하응선(河應善), 이병호(李秉虎), 이건영(李建英), 정종진(鄭鍾振), 백낙운(白樂雲)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1년 전부터 일본에서 체류하고 있던 정난교(鄭蘭敎)와 합류하여 게이오의숙[慶應義塾]에서 일본어를 배운 후 그해 10월 육군 도야마[戶山]학교에 들어가 1884년 5월 졸업했다.
1884년 7월 귀국해 8월부터 무관으로 부장(部將) 겸 사과(司果), 9월 후영 군사마(後營軍司馬), 10월 남행 군직을 역임했다.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박영효의 심복으로 활동하면서 서재필·정난교 등과 함께 고종을 경우궁(景祐宮)으로 모셨다. 청나라의 개입으로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김옥균·박영효·서광범(徐光範) 등 9인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1886년 5월 김옥균 암살밀지를 받고 일본으로 건너간 지운영(池運永)을 유혁로(柳赫魯)·정난교와 함께 유인해서 그 밀계를 폭로시켰다. 일본에서 3년간 지낸 후 미국으로 건너가 7년간 머물렀다.
1895년 7월 김홍집 내각에서 사면을 받고 귀국했다. 10월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에 유혁로, 정난교, 이주회(李周會), 이두황(李斗璜)과 함께 조선인 행동대로 가담했다. 1896년 1월 훈련대 정위(正尉), 2월 육군 참령으로 제1훈련대를 지휘하던 중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다시 일본으로 망명했다. 1907년 7월 귀국 후 육군 참령으로 복위되어 군대해산을 지휘했고, 11월 중추원 부찬의에 임명되었다.
1908년 4월 대동학회 평의원, 5월 대한학회 찬성회 발기인, 6월 대한협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 달 내부대신 송병준(宋秉畯)의 추천으로 전라남도관찰사 겸 전라남도 재판소 판사에 제수되었다. 관찰사로 재임하며 1909년 8월 일본군의 ‘남한대토벌작전’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각 지역을 순시하면서 의병운동을 절멸하는데 앞장섰다. 1910년 5월 광주농림학교 교장을 겸임했다.
병합 후인 1910년 10월 함경남도장관에 임명되었다. 1911년 4월 조선총독부의 도로공사에 인부를 기부해서 1913년 8월 목배(木杯)를 받았다. 1914년 도장관으로 함경남도지방토지조사위원회 위원장을 겸직하며 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했다.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 천황 즉위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았다. 1918년 9월 황해도장관으로 전임되었으며, 11월 훈4등 서보장과 금배(金杯)를 받았다.
1919년 4월 3·1운동 참가자를 탄압하겠다는 경고문을 발표한 후, 황해도 각지에 3·1운동 참가자를 색출하는 자제단(自制團)을 조직했다. 1920년 함흥 육군용지 비용을 기부해서 목배(木杯)를 받았다. 1921년 2월부터 1923년 2월까지 문관분한령(文官分限令)에 따라 2년간 휴직했다. 1922년 2월 흥린건물㈜ 취체역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 4월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칙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되어 1928년 2월 타계할 때까지 재임하며 매년 2,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24년 4월 친일단체 동민회(同民會) 설립에 참여하여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1926년에는 이사, 1927년에는 상담역을 맡았다.
신응희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2·9·13·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9: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167∼18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