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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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인물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6년(고종 43)
사망 연도
1987년 1월 27일
본관
영광
출생지
전라남도 여수시 서교동
관련 사건
신탁은행부정대부사건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때, 한성은행 본정지점 지배인 대리, 동아일보 여수지국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 제헌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정치인.
내용

1906년 전라남도 여수군 여수읍 서교동 출생으로,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金炳魯)의 사위이다. 1932년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해동은행에 취직해 1938년 1월까지 해동은행 본정(本町) 지점 차석(次席) 지배인으로 근무했다. 한성은행이 해동은행을 인수하며 1938년 2월 한성은행 본정(本町) 지점 지배인 대리가 되었다. 동아일보 여수지국장을 역임했다.

해방 직후 1945년 8월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여수지부 문화부장으로 참여했으며, 9월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 여수군당을 조직하고 11월 한국민주당 전라남도당 결성에 참여했다. 1946년 6월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제1회 중앙상무집행위원회에서 노동부 차장을 맡았으며, 대동청년단 조직원으로도 활동했다.

1948년 5월 실시한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여수군 갑구 대한독립촉성국민회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어 국회 상임위원회 제4분과(무역)에 소속되었다.

1948년 8월 23일 반민족행위처벌법안 중 “본 법에 규정한 죄를 범한 자가 단기 4278년 이전에 있어 민족적 운동 또는 민족적 사업에 공헌이 자자했거나 개전의 정상이 현저했던 자는 그 형을 경감 또는 면제할 수 있다”라는 수정안을 발의해 통과시켰다.

1949년 1월 국회에서 여순사건 반란수습대책위원으로 선정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주한미국 군사고문단 설치를 환영하는 성명서에 날인했다. 1949년 8월 한국민주당의 후신인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에 가입하여 재정경제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50년 1월 내각책임제로 개헌하는 헌법개정안에 동의했고, 같은 해 4월 조병옥(趙炳玉)을 후임 국무총리로 추천하는 연서에 서명했다.

1950년 4월 14일 ‘신탁은행부정대부(貸付)사건’ 조사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4월 국회 본회의에서 벌어진 민주국민당과 대한국민당 의원 간의 난투극 사건에 연루되었다. 이 사건은 표면상 대한국민당 이진수(李鎭洙) 의원이 김문평 의원에게 ‘신탁은행부정대부사건’ 조사에 열의가 없다며 지적하며 촉발되었으나, 그 배경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활동을 견제하려는 정치세력 간의 갈등이 있었다.

1987년 1월 27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 의정총감』(국회의원총감발간위원회, 1994)
「해방 후 사회운동」(안종철, 『민주장정 100년, 광주·전남지역 사회운동연구』, 광주광역시, 2015)
「제헌의원 김문평씨」(『경향신문』, 1987.1.27.)
「청년운동반세기, 독립촉성국민회 청년단」(『경향신문』, 1987.3.18.)
대한민국헌정회(www.rokps.or.kr)
여수시청(www.yeosu.go.kr)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집필자
이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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