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조(神照)는 공민왕과 우왕의 측근 승려였으며 후에는 이성계의 군사참모로 활동하였는데, 승려로서는 유일하게 공신호(功臣號)를 받았다. 그는 천태종 소속 사찰인 경상남도 진주의 용암사(龍巖寺), 강원도 원주의 각림사(覺林寺), 경기도 김포의 용화사(龍華寺) 등에서 주지로 있었다.
신조는 공민왕에게 크게 총애를 받았는데, 1370년(공민왕 19) 나옹 혜근(懶翁惠勤)이 공부선(功夫選)을 주관할 때 어려운 문제는 대답하지 못할 거라 여겨 승려들에게 질문하지 않았는데, 공부선이 끝난 후 당시 선사라는 승계를 가지고 있던 신조에게 해당 어려운 문제를 이야기하니 신조가 대답을 했다. 한때 공민왕의 시해 혐의를 받았다가 풀려나기도 하였으며, 이후 우왕의 측근 승려로 활동하였다. 1383년(우왕 9) 신륵사의 대장각을 지을 때 전국의 불교계가 회합하였는데, 이때 신조는 천태종의 대표로 참가하였다. 1377년(우왕 3) 8월 해주의 전장에 이성계의 군사 참모로 참전하였으며, 1388년(우왕 14)에는 이성계를 따라 요동 정벌에 참여하여 위화도에서 회군에 관한 대책을 논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공양왕대에 ‘봉복군(奉福君)’으로 책봉되었다. 1391년(공양왕 3) 1월 만의사(萬義寺)에서 7일간 소재도량을 베풀었고 이듬해인 1392년(공양왕 4) 2월 천태종 소속 대부분의 승려들이 동참하는 법회를 개최하였다. 여기서 신조는『‘화엄삼매참의(華嚴三昧懺儀)』와 『묘법연경계환소해(妙法蓮經戒環疏解)』를 강설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태조로부터 ‘봉리군(奉利君)’이라는 존호를 받았다. 1394년(태조 3)에는 석왕사를 중창하는 데 참여하였다. 이후 만의사에서 입적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경내에 그의 부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