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신우룡(申愚龍)·신용(申龍). 경상북도 고령 출신.
1919년 만주로 건너가 그해 9월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봉천(奉天)에서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길림성(吉林省)으로 갔다.
그곳에서 김원봉·곽경(郭敬)·양건호(梁建浩)·서상락(徐相洛)·한봉근(韓鳳根)·김옥(金玉, 일명 金相允)·이성우(李成宇)·윤소룡(尹小龍) 등과 같이 파호내외(巴虎內外)에서 의열단(義烈團)을 결성하고 독립운동을 위한 결사대로서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본고관의 암살 및 중요기관의 파괴 등 일제당국자들을 혼란에 빠뜨려 독립을 꾀하려 하였다.
1920년 서울에 왔다가 밀양으로 내려가 동지들과 거사를 계획하던 중 구영필(具寧泌)의 밀고로 잡혀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았다. 출옥 후 1927년 이종암(李鍾巖)의 이른바 경북사건, 1928년 청주의 일심단사건(一心團事件) 등 각종 독립운동에 가담, 활동하였다.
1927년에 조직된 신간회(新幹會) 간부와 조선중앙일보 지방지국장으로도 활약하였다.
1963년 대통령표창,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