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명세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형조좌랑, 사복시첨정,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덕용(德用)
시호
충경(忠景)
이칭
청운군(靑雲君)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87년(선조 20)
사망 연도
1632년(인조 10)
본관
청송(靑松)
주요 관직
공조좌랑|형조좌랑|사복시첨정|공조참판
관련 사건
인조반정|이괄의 난|정묘호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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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형조좌랑, 사복시첨정, 공조참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덕용(德用). 영의정 심연원(沈連源)의 현손이고, 심강(沈鋼)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참판 심의겸(沈義謙)이고, 아버지는 현감 심엄(沈㤿)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광해군의 난정(亂政)으로 벼슬에 뜻을 버리고 은거하던 중,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에 공을 세워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어 청운군(靑雲君)에 봉하여졌다. 공조좌랑·형조좌랑·사복시첨정(司僕寺僉正) 등을 역임하고 공신으로 책록된 다음, 통정대부 겸 오위장(通政大夫兼五衛將)이 되었다가 곧 가선(嘉善)의 품계에 올라 부총관을 겸하였다.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왕을 공주로 호종하였으며, 환도한 뒤에는 가의대부에 승계되어, 공조참판으로 호위대장을 겸하였다. 그 뒤 세자빈의 가례를 반대하다가 충주에 유배, 1년 만에 석방되었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호위대장으로 강화에 호종하고, 환도한 뒤 내섬시제조(內贍寺提調)를 겸하고 원주목사로 나갔다가 병으로 물러났다. 시호는 충경(忠景)이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택당집(澤堂集)』
『계곡집(谿谷集)』
집필자
이장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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