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양일기 ()

심양일기
심양일기
조선시대사
문헌
시강원에서 소현세자 일행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의 상황을 정리한 실록. 관청일기.
정의
시강원에서 소현세자 일행이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의 심양에 볼모로 잡혀가 있을 때의 상황을 정리한 실록. 관청일기.
서지적 사항

원본은 필사본으로 10책과 8책의 두 질이 규장각도서에 전해지는데, 10책본은 초서로 쓰여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우거나 수정한 부분이 많고 필치와 종이도 각각이다. 이에 비해 8책본은 체재도 정비되었고 해서로 깨끗이 정서된 것으로 보아 원본을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그 밖에도 몇 개의 초록본이 전해진다. 규장각도서에 있는 ≪봉황성일기 鳳凰城日記≫ 1책은 1642년(인조 20) 10월과 11월의 일기이며, ≪북행일기 北行日記≫ 1책은 1644년 4∼6월의 일기인데 이것들은 원래 10책본의 일부였던 것으로 보인다.

내용

소현세자는 1637년 정월에 인조가 삼전도(三田渡)에서 청에 항복한 뒤 화약의 조건에 의해 2월 8일에 조선을 출발, 4월에 심양에 도착한 뒤 5월 7일부터 새로 완성된 심양관(瀋陽館)에 머물렀다. 일행은 소현세자 부부 외에 동생인 봉림대군(鳳林大君) 부부, 시강원 관리를 중심으로 한 수행 신하 등으로서, 수종(隨從)을 포함하면 모두 300명이 넘었다.

청은 심양관을 조선 정부를 대리하는 현지 기관으로 취급하고 조선에 대한 연락과 통보를 비롯해 거의 모든 교섭을 그곳을 상대로 하였다. 이에 대해 심양관에서는 일의 크고 작음을 막론하고 승정원에 장계를 보내어 본국 정부의 지휘를 받고, 때로는 평안감사나 의주부윤에게 세자가 임시 조처를 명하기도 하였다.

세자 일행은 그 뒤 1644년 청의 천도에 따라 9월 연경(燕京)으로 옮겼으나, 중원을 제패해 조선과 명에 자신을 가지게 된 청은 바로 그들을 풀어 주어 그 해 11월에 귀국하였다.

그 동안 소현세자는 인평대군(麟平大君) 등을 대리 볼모로 하여 1640년과 1643년에 조선에 들어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2회에 걸쳐 명군과의 전투에 종군했고 수 차례 사냥 여행을 하였다.

이 책은 다른 일기와 마찬가지로 날짜순으로 날씨, 서연을 비롯한 일상의 동정, 본국과의 연락, 수행한 신하들의 사정 등 소현세자 일행이 청에 거주하면서 겪은 갖가지 일을 기록하였다.

부분적으로는 청으로 세자를 수행한 관인들의 명단, 청에서 사냥 등의 여행에 세자를 수행한 신하들의 명단, 김신국(金藎國) 등 고위 관직자의 상소 등이 그 문건의 제목과 함께 실려 있기도 하다.

또한, 세자가 심양관을 떠나 있을 시기에 대해서는 세자의 동정을 기록한 일기와 심양관의 사정을 기록한 일기 두 가지가 작성되어 나란히 실려 있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엽행일기 獵行日記>·<엽행시관중일기 獵行時館中日記>와 같이 그 제목도 따로 붙였다.

주요 내용을 들어본다면, 1637년 윤집(尹集) 등 삼학사의 처형, 1638년 이후 몇 차례에 걸쳐 세자와 봉림대군이 청의 명 정벌을 수행한 것, 1639년 청의 군사력을 동원하라는 요구와 조선의 그에 대한 대응 등을 기록하였다.

이 밖에 1640년 임경업(林慶業)의 군대가 징발되어 청에 도착한 것과 그 이후 임경업의 탈출과 청에의 압송, 이해 이후 김상헌(金尙憲)·최명길(崔鳴吉) 등의 압송과 석방, 1643년 청태종의 죽음, 1644년 청의 북경 천도 등이 있다.

의의와 평가

이 책은 일찍부터 조선의 피침(被侵) 사실을 강조하는 일제 식민주의 사학자들에 의해 이용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심양장계 瀋陽狀啓≫와 더불어 명말 청초 조선의 대중국 외교 관계를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님은 물론 당시 동아시아의 경제적 관계에 대한 간접적인 자료들도 풍부히 전하고 있다.

서지적 정보

1921년 나이토(內藤湖南)가 활자본으로 정리해 ≪만몽총서 滿蒙叢書≫ 제9권으로 간행하였다. 이후 1936년에는 오사와(大澤龍二郎)가 일부를 일본어로 번역해 ≪조선통속문고 朝鮮通俗文庫≫ 제9집으로 간행하였다. 1975년에는 이석호(李錫浩)의 한글 번역본이 ≪한국명저대전집≫에 포함되어 간행되었다.

참고문헌

「심양일기해설(瀋陽日記解說)」(이석호, 『한국명저대전집』, 대양서적, 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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