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정미칠조약 체결 이후 민족운동가들은 국내에서의 활동이 보다 어려워졌다. 지속적이고 효과적인 항일투쟁의 근거지를 구축하기 위해 국외망명을 단행했는데, 블라디보스토크는 주된 망명지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그 곳에는 여러 갈래의 의병 세력이 모여 각기 독립된 상태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효과적인 항일투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에 유인석(柳麟錫)·이상설(李相卨)·이남기(李南基)·이범윤(李範允) 등이 주축이 되어 노령 안의 의병 세력을 하나로 통합, 십삼도의군을 결성하였던 것이다.
특히, 1895년 의병운동 개시 이후 10여 년동안 항일투쟁을 지속적으로 펼쳐온 유인석이 도총재(都總裁)에 추대되었다. 그 아래에 창의총재(彰義總裁)에 이범윤, 장의총재(壯義總裁)에 이남기, 도총소참모(都總所參謀)에 우병렬(禹炳烈), 도총소의원에 홍범도(洪範圖)·이진룡(李鎭龍)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
유인석을 비롯한 의병 계열과는 달리 국내의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던 신민회(新民會)의 주요 간부 안창호(安昌浩)·이갑(李甲) 등이 도총소의원으로, 이상설은 외교대원(外交大員)으로 각각 참가하였다.
이것은 항일투쟁에 있어서 서로 전술을 달리해 오던 의병운동과 애국계몽운동이 이때에 와서 비로소 협력 내지 합작해 공동전선을 구축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 의군은 거족적인 항일투쟁계획을 추진, 국내의 각 도마다 총재·총령·참모·총무·소모(召募)·규찰(糾察)·통신 등의 임원을 두었다. 다시 도총재의 휘하에 도의 총재를 편성하여 국내까지 조직을 확대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의군이 미처 무력투쟁을 제대로 개시하기도 전에 국권이 강탈되었기 때문에 실제적인 활동은 크게 위축되었다.
더욱이 일제는 블라디보스토크가 항일투쟁의 근거지로 변하는 것을 저지하고자 러시아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 항일운동가들의 체포, 인도를 요청하였다. 결국 그 곳에서의 일체의 항일운동은 위축되었고, 십삼도의군도 오래지 않아 해체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