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형 ()

일제 주요감시대상 인물카드 안국형 전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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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사
인물
일제강점기 때, 남만주에서 정의부, 국민부, 재만조선인혁명군 등에서 밀정 처단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칭
이칭
안명보(安明保), 전학송(全鶴松)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09년(순종 2)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평북 구성
정의
일제강점기 때, 남만주에서 정의부, 국민부, 재만조선인혁명군 등에서 밀정 처단 및 군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개설

이명은 안명보(安明保)·전학송(全鶴松). 평북 구성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20년대 초 만주로 망명하여 1922년 8월 남만주에서 조직된 통의부(統義府)에 가입하였다.

1923년 의병 계열의 복벽주의자(復辟主義者)가 통의부에서 이탈하여 참의부(參義府)를 조직한 후, 1924년 정의부(正義府), 1925년 신민부(新民府) 조직되어 통의부가 해체되자, 정의부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1928년 정의부 제2중대장 이윤환(李允煥)의 명령을 받고 홍학순(洪學淳)·이원(李園) 등과, 요령성(遼寧省) 토성자(土城子)에 거주하며 일본 경찰의 밀정노릇을 하던 최상진(崔相振)을 사살하였다.

1927년부터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 결과 참의부·정의부·신민부가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로 통합되자 국민부에 가담하였다.

1930년 봄 국민부 간부들이 군자금을 낭비, 신용을 잃자 이진무(李振武) 등과 흥경현(興京縣)으로 가서 간부들을 처단하고자 하였으나 중국 관헌의 제지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1931년 2월 관전현(寬甸縣) 나한구(羅漢溝) 김석영(金錫英)의 집에서 이진무의 주도로 박인홍(朴仁弘)·황세일(黃世日)·최영걸(崔永杰)·김광도(金廣道)·조국원(趙國元) 등과 함께 노동자위군(勞動自衛軍)을 조직하고, 4월 재만조선인혁명군(在滿朝鮮人革命軍)으로 발전시켰다.

이후 대장인 이진무·이해산(李海山) 등과 국내로 들어와 1931년 10월 평안북도 구성(龜城) 안병명(安秉明)의 집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1933년 6월 26일의 신의주지방법원(新義州地方法院) 판결과, 1934년 1월 29일의 평양복심법원(平壤覆審法院) 판결에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으나 감형되어 15년 정도 옥고를 치렀다.

상훈과 추모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대한민국독립유공인물록』(국가보훈처, 1997)
『독립유공자공훈록』12·13(국가보훈처, 1996)
집필자
조규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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