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는 1919년 5월 국내와의 연락을 위해 교통부 산하에 교통국을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 방침에 따라 그 해 5월 국내로 들어오는 교통의 요지인 안동에 안동교통지부교통국이 설치되었다.
그 위치는 안동현 구시가 흥륭가에 있는 이륭양행(怡隆洋行) 2층이었다. 이륭양행의 주인인 쇼(Show, G. L.)는 영국 국적의 아일랜드인으로 우리 독립운동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의 협조로 사무실을 빌릴 수 있었다. 안동교통지부는 임시정부 초창기부터 국내 정보를 활발히 통신해 독립운동의 연락자 구실을 할 수 있었다.
이 지부의 조직은 국장 밑에 금전모집과·통신과·인물소개과를 두었다. 또 교통소를 두어 소장 밑에 금전모집계·통신계·인물소개계가 있었다. 임시지방교통사무국장정(1919년 8월 20일 공포)에 의하면 국장· 지국장은 교통총장이 임명(1920년 1월 13일 개정장정에는 대통령이 임명함)하였다.
초기의 안동교통지부는 국내 각 군에 교통국을 설치하고 각 면에 교통소를 설치할 계획이었으나, 1919년 10월 17일 임시안동교통사무국으로 그 명칭이 변경되면서 관할구역을 평안남·북도와 황해도에 국한하게 되었다. 또한 안동교통국은 원래 국내의 통신연락을 위해 설치되었으나 뒤에는 만주지방의 통신업무도 관장했는데 만주지방의 것은 통신국으로 불렸다.
이 교통국의 활동은, ① 정부의 자금모집, ② 국내의 정보수집 보고, ③ 정부의 지령·서류 국내전달, ④ 교통국의 조직 및 독립운동을 위한 인물 소개와 연락 등이었다. 이 밖에도 한글활자·한국지도·무기·탄약 등의 물건을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안동교통사무국은 쇼의 비호 하에 제1대국장 선우 혁(鮮于爀), 2대국장 홍성익(洪成益), 3대국장 양준명(梁濬明), 4대국장 장덕로(張德櫓) 등이 잇달아 취임하였다. 그러나 홍성익이 잡힌 1920년 1월 이후에는 활동이 활발하지 못했고, 1920년 7월, 이른바 오학수(吳學洙)사건을 계기로 쇼가 잡히면서 활동이 더욱 침체되었다.
그러다가 1920년 11월 쇼가 보석되면서 다시 활기를 띠었지만, 1922년 8월 이륭양행 고용원 김문규(金文奎)가 잡힌 뒤로는 활동이 어렵게 되었다. 홍성익이 잡힐 때 황대벽(黃大闢)·김기준(金基俊)·장재순(張在淳)·홍정익(洪貞益)이 같이 잡혔을 뿐 아니라 의주교통지국·선천교통지국·경성(서울)교통지국·평양교통지국·사리원교통지국 등의 조직이 탄로났다.
이른바 오학수(안동교통국참사)사건이란 그가 국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상해로부터 무기와 탄약을 운반, 안동교통사무국 연와(燕窩)출장소에 보관한 것이 발각되어 오학수 등 13명이 잡힌 것을 말한다. 이로 인해 쇼는 체포되었다.
쇼는 보석 중에도 다시 이륭양행에 안동교통사무국을 설치하게 했지만 김문규가 검거되자 지원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국측이 일본정부와 쇼를 안동에서 떠나게 한다는 약속으로 쇼를 보석시켰기 때문이다.
1921년 1월 18일 현재 안동교통사무국 통신원 특별배치지역 및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안동 김기준, 정주김수철(金守哲), 북하백이승혁(李承爀), 안주김정선(金正善), 신의주이윤근(李允根), 평양김길수(金吉洙), 용천안정립(安定立), 황해도장홍범(張鴻範), 철산장재순, 서울김기순(金基順)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