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원서(元瑞). 남원 출신. 교리(校理) 안처순(安處順)의 증손이다.
임진왜란 때 서울이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光州)에 있던 고경명(高敬命)이 창의기병(倡義起兵)을 하자, 옥과(玉果)의 유팽로(柳彭老)가 호응하여 모여든 의병 6,000여명을 거느리고 전주를 지나 여산(礪山)에 머물렀다.
안영은 적을 멸하고 서울에 있던 어머니를 찾아 충효를 다하기로 마음을 먹고 양대박(梁大樸)과 더불어 고경명 휘하에 들어갔다.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관군을 거느리고 금강까지 왔다가 갑자기 회군하였으나, 고경명은 계속 북진하고 첫째아들 고종후(高從厚)와 의논하여 은진(恩津)을 거쳐 이산(尼山)으로 향하려 하였다. 그러나 적이 금산에 이미 들어갔음을 듣고 금산성 밖 와은평(臥隱坪)에 진을 쳤다.
적은 관군이 취약함을 알고 먼저 관군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영암군수 김성헌(金成憲)이 도망하고 전군이 흩어지자 적은 고경명군을 포위하고 공격해왔다. 치열한 공방전이 있었으나 결국 싸움에 패하여 전군이 흩어졌다. 안영이 고경명에게 후퇴하여 후일에 재건할 것을 종용하였으나, 고경명은 내가 마땅히 이 자리에서 죽을 것이니 군(君)은 속히 자리를 떠나라 대답하고 움직이지 않았다.
이에 억지로 고경명을 말에 태웠으나, 기마에 서투른 고경명이 말에서 떨어져 말을 놓쳤다. 안영은 고경명을 자기의 말에 태우고, 자신은 도보로 뒤를 따랐다. 적병이 핍박하자 유팽로와 더불어 대장 고경명을 몸으로써 막고 적과 싸우다, 고경명과 그의 둘째아들 고인후(高因厚) 및 유팽로 등과 함께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