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종원 ()

고려시대사
인물
고려후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사청(嗣淸)
쌍청당(雙淸堂),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325년(충숙왕 12)
사망 연도
1394년(태조 3)
본관
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주요 관직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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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안종원은 고려후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고려 후기에서 조선 초까지 문신으로 활동하였다. 1225년 출생으로 1341년 과거에 급제하여 공민왕 대에 전법총랑(典法摠郎)에 이르렀다가 신돈(辛旽) 집권기에 관직에서 물러났다. 우왕 대에 환관의 폐단이나 사신들의 밀무역에 대한 간언을 하기도 했다. 조선 건국 후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나 1394년 사망하였다.

정의
고려후기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 등을 역임한 문신.
가계 및 인적사항

본관은 순흥(順興: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 자는 사청(嗣淸), 호는 쌍청당(雙淸堂). 아버지는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 안축(安軸)이다. 광주 김씨 김휘남(金輝南)의 딸과 혼인하여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 3명이 과거에 합격하여 부인이 경혜택주(慶惠宅主)에 봉해졌다.

주요 활동

1341년(충혜왕 2), 7월 지공거(知貢擧) 이군해(李君侅)와 동지공거(同知貢擧) 김광재(金光載)가 주관한 과거에 안원룡(安元龍) 등과 함께 급제하고, 충목왕(忠穆王) 대에 사한(史翰)으로 선임되었다. 임기가 차서 승진, 전보될 즈음 동료 심동로(沈東老)가 나이는 많고 직위가 낮았기 때문에 그에게 자리를 양보하였다. 안축(安軸)이 이 소식을 듣고 가문에 인물이 났다며 기뻐하였다. 1년 뒤에 삼사 도사(三司都事)에 임명되었고, 공민왕(恭愍王) 초에 전법 정랑(典法正郞)이 되었다. 이때 많은 소송 사건을 법에 따라 공정하고 신속하게 처리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다.

시어사(侍御史)를 거쳐 양광도 안렴사(楊廣道按廉使)로 있을 때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내려온 공민왕(恭愍王)을 충주(忠州)에서 맞았다. 왕이 다시 음죽(陰竹: 지금의 경기도 이천시 장호원읍 · 설성면 · 율면 일대에 있었던 고을)으로 옮겼는데 관리와 백성이 다 도망을 가서 왕을 접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에 문책을 당해 지청풍군사(知淸風郡事)로 좌천되었으나 뒤에 전법 총랑(典法摠郎)으로 다시 승진되었다.

그 무렵 신돈(辛旽)에게 아부하는 사대부가 많았는데, 안종원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로 인해 참소(讒訴)를 당하였고 강릉 부사(江陵府使)로 좌천되었다. 안종원은 좌천된 곳에서 선정을 펼쳤는데 백성들이 생사당(生祠堂: 살아 있는 이를 제사 지내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기도 했다.

7∼8년을 한가로이 지내다가 1371년(공민왕 20) 신돈이 그 죄로 인하여 죽임을 당한 후, 사헌시사(司憲侍史)를 거쳐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에 이르렀다. 우왕(禑王) 초에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 유순(柳珣) 외에 다섯 사람과 함께 도당(都堂)에 글을 올려 환관(宦官)의 폐단을 논했으나 재상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성균관 대사성(成均館大司成) · 우상시(右常侍)를 거쳐 대사헌(大司憲)에 승진되었다가 판숭경부사(判崇敬府事)가 된 뒤, 흥녕군(興寧君)에 책봉되었다. 이 무렵 안종원은 공민왕 때부터 환관으로 있던 김현(金玄)이 내사(內事)를 잘 정돈하지 못한다고 논박해, 김현이 회덕현에 유배되었다. 아울러 환관의 수를 10명 내로 줄여서 국정의 문란을 막아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다. 또 명나라에 가는 사신들이 사행(使行)할 때 기화(奇貨)로 금 · 은 · 말 또는 포목(布木) 등을 밀반출해 장사하는 것을 엄금하도록 건의하였다.

1382년(우왕 8) 5월, 지공거로 동지공거 윤진(尹珍)과 함께 과거를 주관하여 류량(柳亮) · 장자숭(張子崇) · 한상경(韓尙敬) · 이회(李薈 · 李檜) · 조박(趙璞) 등을 선발하였다. 순흥군(順興君)으로 새로 책봉되고 다시 공신호(功臣號)를 받았으며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다.

최영(崔瑩)이 탐관과 권신들을 숙청할 즈음에 청렴한 안종원을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로 기용, 관리의 인사권을 맡겼으나 곧 사임하였다. 그 뒤 흥녕부원군(興寧府院君)이 되었고, 조선조에 와서는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었으나 곧 사망하였다.

안종원은 이색(李穡)과 함께 국자시(國子試)에 합격하였고, 이후에도 이색과 교유하였음을 이색의 시 「유항루상여염동정음(柳巷樓上與廉東亭飮)」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숭인(李崇仁)이 짓고 권주(權鑄)가 써서 1383년(우왕 9)에 세운 여주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의 음기(陰記)에 당시의 고위 관료들과 함께 안종원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그 묘가 경기 장단도호부(長湍都護府) 임진현(臨津縣) 서곡리(瑞谷里)에 있음이 기록되어 있다.

참고문헌

원전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양촌집(陽村集)』
『동문선(東文選)』
『목은시고(牧隱詩藁)』
「신륵사대장각기비((神勒寺大藏閣記碑)」 음기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단행본

박용운, 『고려시대 음서제와 과거제연구』(일지사, 1990)
안용선, 『고려묘지명집성』(한림대출판부,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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